제목
  한국-몽골 국가연합 자료 2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6-11-06 오후 11:07:00
조회수
  4288

동북아 균형자를 향한 ‘몽골’의 대질주
전략 요충지•막대한 지하자원 4대 열강 ‘러브콜’ … 몽골리안 동질성,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관심

이러한 교류에도 몽골은 그러나 여전히 미지의 땅이다. 몽골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부족했던 탓인데, 그 결정적 이유는 인구가 260여만명에 불과한 작은 시장이라는 점과 바다를 끼고 있지 않아 항공교통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했다는 점이다. 서해 건너의 중국 산둥성의 인구가 1억명에 육박한다는 점과 비교해보면 몽골 시장의 열등성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같은 취약점 때문에 몽골은 근대에 들어서도 동북아시아의 주요 세력에 끼지 못했다. 우리는 몽골을 소련에서 독립한 CIS(독립국가연합)와 비슷한 나라로 대해왔다.
“몽골은 분명히 아시아 국가이고, 동북아 시대의 한 축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몽골이 제 목소리를 낼 때 비로소 동북아의 평화체제가 구축될 수 있습니다.”(몽골 국립대 바르토르 교수)
요즘 몽골의 주가는 연일 폭등세다. 과거 열강들이 취했던 몽골 홀대 정책이 점차 약해지고 몽골이 적극적으로 동진 정책을 취하면서, 몽골이 요충지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 미국•러시아•중국•일본 등 4대 열강이 앞다투어 몽골에 러브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열에서 빠진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몽골이 주목받는 이유는 첫째,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몽골은 지구상에서 가장 커다란 내륙국가로 러시아와 3480km, 중국과는 4673km라는 장대한 국경선을 맞대고 있다. 몽골은 오랜 기간 중국과 긴장관계를 형성해왔는데, 이는 중국을 견제하고 싶은 미국의 이해와 맞아떨어졌다. 미-일 동맹은 앞으로 최대 경쟁자가 될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할 요충지로 몽골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는 몽골이 갖고 있는 막대한 지하자원이다. 전임 대통령인 바가반디가 공식석상에서 “금덩이를 깔고 앉아 굶고 있는 딱한 처지”라고 말할 정도로 몽골은 지하자원이 많다. 세계 8대 자원 부국으로 불리는 몽골은 1000억t의 석탄과 5.4억t의 구리, 고비사막에 매장된 50억 배럴의 석유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자원이 개발된다면 몽골은 희망으로 가득 찰 것이다.
“몽골은 중•소 양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소국이지만 문화적 자존심을 바탕으로 생존에 성공했습니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줄고, 최근에는 미국의 영향력이 급증했습니다.”(역사연구소 양혜숙 박사)
“몽골은 아시아 국가, 동북아 한 축으로 성장”
몽골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극진하다. 클린턴 대통령이 재임할 당시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몽골을 방문한 뒤 미 국무부 고위 간부들의 몽골 러시가 시작됐다. 올해 초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북한을 비판하면서 “몽골과 필리핀처럼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민주화는 더욱 촉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몽골은 미국이 추진하는 대(對)중국 포위전략의 포스트인 셈이다.
부시 대통령은 2003년 2월 바가반디 당시 대통령을 백악관에 초청해 환대를 베풀었다. 형식은 이라크에 217명의 전투병을 파병해준 데 대한 감사의 자리였으나, 미 공군기지를 몽골에 설치하려는 것과 무관치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 바가반디는 부시 대통령에게 몽골과 미국 간의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계속)

동북아 균형자를 향한 ‘몽골’의 대질주전략 요충지•막대한 지하자원 4대 열강 ‘러브콜’ … 몽골리안 동질성,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관심

한-몽 끈끈한 관계
“역사적 친밀성 재인식하자”
한국인들은 몽골의 침략을 받아 고려가 자주성을 잃은 것으로 알고, 몽골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 견해를 표출해왔다. 이러한 인식을 갖게 된 데는 명나라에서 편찬한 ‘원사(元史)’와 조선이 편찬한 ‘고려사’의 탓이 크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인 이해다. 세계 제국 몽골과의 전면 교류로 고려는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한국은 중국이나 북방 유목제국의 침입에 대해 많은 고심을 했지만, 그로 인해 안보 문제를 다져온 측면도 있다.
고려는 몽골제국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인식을 확대했다. 좋은 예가 조선 초에 작성된 세계지도인 혼일강리도다. 이 지도에는 놀랍게도 아프리카까지 그려져 있는데 이는 몽골제국을 통해 고려의 지리 지식이 넓어진 탓이다. 아주까리는 설탕을 뜻하는 아랍어 아주카르에서 유래됐는데, 아주카리가 한국에 알려진 것은 아랍지역까지 지배한 몽고의 덕택이었다.
반대로 고려의 문물이 몽골제국에서 ‘고려양(樣)’으로 유행했으니, ‘한류’의 시초라고도 할 수 있다. 몽골 지배층은 고려 문화 수입에 열심이었으며 고려 여성을 아내로 삼지 않으면 명문 귀족으로 인정하지 않을 정도였다. 궁중에서는 고려인 환관이 득세하여 고려어를 배우는 귀족도 적지 않았다.

이윤섭.
원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자가 되는 충선왕은 원의 왕위 계승전에 개입해 하이산을 황제로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로써 그는 ‘고려왕’과 ‘심왕’ 두 직위를 얻었는데, 그 덕분에 고려는 요동반도를 지배하게 된다. 1356년 공민왕은 몽골의 승상 톡토의 요청으로 홍건적을 토벌하기 위해 40명의 장수와 2000명의 병사를 파병했다. 이 고려 장수들은 요동에서 다시 고려인 2만1000명을 징병해 홍건적 토벌에 나선다. 이러한 징병권 행사는 고려의 주권이 이 지역에 미쳤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요동 지배를 잃어버린 일은 한국사에서 두고두고 안타까운 일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조선 사신의 보고서에는 몽골인들이 주원장에게 밀려 초원으로 밀려날 때 요동반도를 약탈하며 한족을 해쳤으나, 현지에 거주하는 고려인에 대해서는 ‘동족’이라며 살상하지 않는다는 대목이 있다.
몽골은 조선 세종에게도 형제국이니 힘을 합쳐 명 제국을 치자는 국서를 보낸 바 있다. 20세기 초에는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몽골에 독립운동 기지를 설치하려 했다. 비록 한-몽 간에는 30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도 있었지만, 두 나라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도움을 준 기간이 훨씬 더 길었다.
이윤섭/ ‘역동적 고려사’ ‘쉽지만 깊이 있는 한국사’ 저자

“1218년 칭기즈칸 시대에는 ‘두 나라가 영원히 형제가 되어 자손만대로 오늘을 잊지 말도록 합시다’는 우호적 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1999년 5월 김대중 대통령 몽골 국회 연설 가운데)
7세기 중엽 고구려와 돌궐(옛 몽골)의 강고한 연맹은 당나라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와 두 나라의 동반 몰락을 초래했다. 하지만 똑같은 사건이 반복되지 않는 것이 역사이기도 하다. 몽골리안이라는 동질성과 고구려 시대 이래의 오랜 우호관계, 그리고 근래 한류 열풍으로 다져진 친밀감이 한-몽 관계의 상징어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몽골의 등장이 21세기 동북아 지형에 어떤 변화를 줄 것인가.


몽골VS한국의 국가연합론
◎오늘의 얘기◎2006/06/15 14:54 宣智棒
• "몽골과 한국의 국가연합론..."
• 공동운영자로 있는 "맘단비의 뜨락"에 올려진 글입니다.
• 특정 정치인에 관한 얘기라서 올린 것이 결코 아닙니다.
• 시사하는 바가 영 실현 불가능한 내용이 아니며
• 양국에 바람직한 미래창출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되어
• 모두 함께 생각 해 보자는 의도로 게재하였습니다.
• *아래 내용은 시사월간지 신동아 6월호에 실린 내용의 일부입니다.
• 자세한 내용은 지금 발매중인 신동아 6월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최근 일부 대선주자 진영과 정치인, 학자들 사이에 ‘한국-몽골 국가연합론’이 거론되고 있다. 아직은 ‘아이디어’ 수준이다. 그러나 ‘역사의 새 물줄기’는 언제나 현실의 틀을 뛰어넘는 상상력에 의해 발원한다. 특히 한국사(史)엔 돌궐(옛 몽골)과의 동맹이 고구려의 융성을 가져다 준 ‘달콤한 추억’이 있다. 유럽연합(EU), 독립국가연합(CIS), 영(英)연방 등 국가간 합종연횡은 그리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 이명박 “몽골 인구 적어 실현 가능”
• 한국-몽골 국가연합론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 “한국과 몽골은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인접 강대국으로부터 영토․주권․체제에 대한 안보 위협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반대로 근대 이후 한-몽 양국이 서로 영토적 야욕을 드러낸 사례는 없다. 서로 적대적이지 않고 공통의 대외 환경에 직면한 한-몽은 연대할 여건이 충분하다.
• 한국과 몽골이 국경을 접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은 국가연합 이후 어느 한쪽으로의 일방적 흡수를 방지하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국가연합이 이뤄져도 양국은 각자 외교, 국방, 내정 등에서 완전한 자주권을 행사한다. 남북한 통일과 한-몽 국가연합은 상치하지 않는다. 북한은 한국과 단독으로 통일 문제를 논의하는 것보다는 사회주의 경험을 공유하는 몽골이 완충적으로 참여하는 환경에 더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다.
• 한반도 7배 면적(156만4160㎢)의 영토대국 몽골과 세계 10위 경제규모(2005년 GDP 7930억7000만달러)의 한국이 연합하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 일본, 한-몽 국가연합 3자간 세력균형도 이룰 수 있다. 이는 안보 보장에 있어서도 한-몽 두 나라에 유리하다.
• 경제 측면에서 국가연합은 몽골 경제의 선진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내륙국인 몽골에 한반도는 항구로 기능하게 된다. 몽골의 풍부한 자원, 북한 노동력과의 연계는 한국 경제가 대륙으로 진출하는 ‘블루 오션’이다.”
• 대선주자인 이명박 서울시장은 최근 사석에서 기자로부터 한-몽 국가연합에 대한 질문을 받자 “중국의 반대가 없다면 실현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시장은 “두 나라에 모두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몽골의 인구가 280만 정도밖에 안 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인구 4800만의 한국은 280만의 몽골을 충분히 지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이수성 “한-몽 국가연합 안보상 필요”
• 이수성 전 총리도 “한국인과 몽골인은 똑같은 민족으로 봐도 된다. 몽골과의 연합은 한반도의 위기를 능히 막아낼 수 있는 방패다. 한-몽간 신뢰가 쌓이면서 10~30년의 시간이 지나면 한국-몽골 국가연합은 자연스럽게 가시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대선주자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명예회장으로 있는 ‘한․러문제연구소’는 소속 교수진에 의뢰해 올해 말쯤 ‘한국-몽골 국가연합’의 필요성, 문제점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연구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 권영갑 소장은 “몽골은 국토의 사막화가 가장 큰 문제다. 한국에 극심한 피해를 주는 황사의 발원지 중 하나인 몽골 고비사막의 녹화에 한국이 적극 참여함으로써 한국-몽골간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 “고비사막 녹화로 한-몽 공동체 구성하자”
• 몽골은 1921년 소련의 도움으로 중국으로부터 독립했으나 소련군이 몽골에서 철수한 뒤 중국은 몽골을 중국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고 한다. 몽골은 친미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 김태균 수원과학대 교수(정치학 박사)는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의 옛 영토인 북한지역뿐 아니라 몽골 지역에도 영유권을 주장할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몽골과의 연대는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유력한 카드다”고 말했다.

• 그러나 국내 동아시아 전문가 상당수는 몽골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현재 한국, 중국, 일본, 북한, 몽골, 러시아를 모두 포함하는 ‘동북아 공동체’ 구성안을 정책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 허만섭 신동아기자 • mshue@donga.com•
• *이 기사는 시사월간지 신동아 6월호에 실린 내용의 일부입니다.
• 자세한 내용은 지금 발매중인 신동아 6월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몽골[Mongolia]
공식 명칭 : 몽골(Mongolia)
인구 : 2,519,000
면적 : 1,564,116 ㎢
수도 : 울란바토르
정체•의회형태 : 중앙집권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총리
공식 언어 : 할하몽골어
독립년월일 : 1921. 3. 13
화폐단위 : 투그리크(tugrik/Tug)
국가(國歌) :Darkhan manai khuvsgalt uls("Our sacred revolutionary republic")
• 외몽골, 몽고라고도 함. 몽골어로는 Mongol Uls.
• 북쪽의 시베리아와 남쪽의 중국 사이에 위치한 내륙국.
• 중앙 아시아 북부에 속하며, 면적은 아시아에서 6번째로 넓지만 인구는 가장 적은 편이다. 북위 42~52°, 동경 87~120°에 걸쳐 있는 이 나라의 모양은 길쭉한 타원형이며, 동서 길이는 2,392km이고 남북길이는 가장 긴 곳이 1,259km이다. 수도는 울란바토르이다. 면적 1,564,116㎢, 인구 2,493,000(2003 추계).
• National Anthems provided by Second Line Search, Inc., 1926 Broadway, New York, N.Y. 10023

• [자연환경]
몽골 외뵈르한가이 남서부 고비 사막의 가장자리부터 시작되는 고비알타이 ...
• 몽골은 국토의 약 4/5가 기복이 완만한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초지가 좋아 몽골인들은 수백 년 동안 가축을 키우는 유목생활을 했다. 평균 고도가 해발 1,580m인 몽골은 지형에 따라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시베리아에서 북부와 서부 지역으로 손가락처럼 길게 뻗어나온 산맥, 그 산맥 사이에 있는 산간 분지 지역, 남부와 동부에 있는 거대한 고원과 사막 지역이 그것이다.
• 북부에는 3개의 주요산맥이 있다. • 알타이 산맥• 은 가장 길고 높은 산맥으로, 빙하로 뒤덮인 산도 있다. 이 산맥은 다시 몽골알타이 산맥과 고비알타이 산맥으로 나뉘고, 몽골의 북서쪽 끝에서 남동쪽으로 약 1,600km에 걸쳐 뻗어 있으며, 산봉우리들의 높이는 약 3,350~4,250m에 이른다. 2번째 산맥은 한가이 산맥인데, 이 산맥 역시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있고 높이 3,650m를 넘는 산봉우리가 있다. 한가이 산맥은 몽골의 중심부 근처에서 단층 지괴를 이룬다. 3번째 산맥인 헨틴(헨테이) 산맥은 울란바토르 북동쪽에 있으며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뻗어 있다. 헨틴 산맥은 가장 규모가 작은 산맥으로 산봉우리들의 높이도 1,800~2,400m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낮다. 북서부 지역의 아름다운 분지 복합체인 대호수 지역에는 300개가 넘는 호수가 있다. 그보다 더 북쪽의 한가이 산맥 북부에 있는 호르고 지역에는 화산활동으로 생긴 수많은 호수가 있으며, 중북부 국경 근처에는 거대한 지하동굴들로 유명한 회브스괼 호가 있다. 국토의 약 1/3은 나무가 없는 반건조 지대인 고비 사막으로 덮여 있다. • 고비 사막• 은 돌이 많으며, 일부만 모래로 덮여 있다. 오르혼 강의 본류에 해당하는 셀렝가 강이 몽골에서 가장 대표적인 강으로 중북부 지역을 흐른다. 몽골알타이 산맥의 빙하에서 발원하는 호브드(코브도) 강은 북서부 지역을 흐른다. 몽골의 강들은 가끔 홍수의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상당한 수력발전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우브스 호는 면적이 거의 3,370㎢에 이르는 함수호(鹹水湖)이다. • 회브스괼 호• 는 주요한 담수호(2,620㎢)이며, 수심이 240m가 넘는 가장 깊은 호수이다. 몽골은 지질활동이 활발해서 때로는 엄청난 위력을 지닌 지진이 일어나기도 한다.
• 몽골의 뚜렷한 대륙성기후는 강수량이 매우 적고 기온변화가 잦으며 기온차가 큰 것이 특징이다. 겨울은 춥고 맑으며 건조하여 거의 눈이 내리지 않는다. 여름은 따뜻하고 짧다. 겨울평균기온은 -26~-18℃이고, 여름평균기온은 17~23℃이다. 연간강수량은 북부 산악지대는 350㎜이고 고비 사막은 100㎜인데, 강수량의 3/4이 7~8월에 집중되어 있다. 기후의 뚜렷한 특징은 해가 비치는 맑은 날이 많다는 것인데 연평균 220~260일이 된다. 몽골 북부지역에 자라는 식물로는 시베리아낙엽송•시더•소나무류•자작나무류•가문비나무류 등이 있다. 북부 삼림에는 스라소니•큰뿔사슴•말코손바닥사슴•흰표범•멧돼지•담비와 아시아산 붉은사슴 등이 서식한다. 산간 분지의 초원과 강유역에는 마못과 몽골가젤영양이, 반(半)사막지역에는 낙타•야생양•야생말•곰 등이 산다. 또한 광물 자원도 풍부하여 석탄•철광석•주석•구리•아연•몰리브덴•인회암•텅스텐•금•형석•준보석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그러나 몽골에서 가장 중요한 천연자원은 목초지이다. 또한 광물자원도 풍부하여 석탄•철광석•주석•형석•준보석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 [국민]
• 인구의 약 4/5가 할하어를 사용하는 몽골족이다. 나머지 1/5은 기타 몽골족•카자흐족•러시아인•중국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할하몽골어가 공용어이며, 튀르크어•러시아어•중국어도 쓰인다. 전통적으로 지배적 종교였던 • 티베트 불교• 는 공산당 집권하에서 심한 탄압을 받았으나 1990년 이후 되살아나고 있다. 몽골의 인구는 높은 자연증가율을 보여 1952~84년 사이에 전체 인구가 2배 이상 늘어났다. 이런 인구 증가율은 세계 평균증가율에 비해 높은 편이지만, 1978년에 시작된 몽골 정부의 인구정책은 기존의 높은 출생률을 더 높이고 사망률을 낮추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몽골의 사망률은 비교적 높지만 평균수명은 남자가 64세, 여자가 67세이다. 몽골 정부는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전체 인구의 약 3/5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울란바토르와 울란바토르 북서쪽에 있는 다르한이 몽골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 [경제]
• 1900년까지 소비에트 모델에 의한 사회주의 중앙계획경제를 채택했던 몽골은 이후 1992년 새 헌법을 제정하는 등 민주화 개혁 과정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했다. 그러나 많은 어려움 속에 진행된 시장경제로의 전환은 인플레이션, 실업증가, 생필품 부족, 식량배급 등의 결과를 낳았다. 전체 노동력의 거의 절반이 농업에 종사해 왔으나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4 정도에 불과하다. 축산물이 전체 농산물 수익의 약 70%를 차지한다. 가축의 약 2/3는 양이며, 염소•소•말•낙타도 기른다. 농경지는 국토의 1% 미만으로 밀이 주요작물이다. 국토의 약 1/10은 숲으로 덮여 있고, 이 삼림에서 나오는 통나무는 공업용과 연료로 쓰인다.
• 석탄은 몽골 전역에서 채굴된다. 주요 탄광지역은 울란바토르 남동쪽에 있는 날라이와 다르한 남동쪽에 있는 샤린골이다. 다르한 남서쪽에 있는 거대한 에르데네트 광산 단지에서는 구리와 몰리브덴이 채굴된다. 광물이 전체 수출액의 2/5 이상을 차지한다. 전체 노동력의 1/5이 공업과 광업에 종사하며 GDP의 1/4 이상을 차지한다. 제조업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본재와 소비재는 대부분 수입해야 한다. 공업은 대부분 울란바토르에 몰려 있다. 주요공산품은 가공식료품•의류•신발•판재•목제품 등이다. 전기는 국내 연료와 수입 연료로 생산한다. 광물 외에 기타 원자재•식품•소비재 등을 수출하며, 기계류•운송장비•연료•금속 등을 수입한다. 주요 교역 상대국은 러시아이다. 울란바토르와 다르한을 잇는 도로와 북쪽 국경 근처의 일부 도로는 포장되어 있지만 지방도로는 대부분 비포장 흙길이다. 울란바토르는 모스크바 및 베이징[北京]과 철도로 이어져 있으며 국제공항이 있다.
• [정치•사회]
• 1992년 채택된 헌법은 몽골이 독립 주권 공화국임을 명시하고 있다. 입법권은 단원제인 국가대후랄(의회)에 있으며, 보통선거로 선출된 4년 임기의 의원들로 구성된다. 국가원수인 대통령 역시 보통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다. 정부수반인 총리는 의회 다수당의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최고 사법기관은 대법원이다. 1990년까지는 몽골인민혁명당(Mongolian People's Revolutionary Party/MPRP)이 유일한 합법 정당이었으며 1992년 조직을 개편했다. 이밖에 몽골국민민주당, 몽골사회민주당 등이 있다. 재판은 최고법원과 아이마그(지역) 법원 및 시(市)법원에서 담당한다.
• 복지제도로 질병•임신•신체장애에 대해 보상금을 제공하고, 노인과 신체장애자에게 연금을 준다. 의료비는 무료이며 국가가 요양소조직을 운영한다. 보건시설과 의료종사자의 수는 차츰 늘어나고 있다. 천연두•티푸스•콜레라•디프테리아 등과 같은 질병은 퇴치되었고, 전염병 발생률도 낮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교육은 무료이며, 대부분의 아동은 8~10년 동안 학교교육을 받는다. 유목민의 자녀를 위한 기숙학교도 있다. 고등교육의 주요중심지는 몽골국립대학교(1942 설립)이다. 10여 개의 일간지(중앙 2개)와 20여 개의 지역 신문이 발행되고 있으며, 수십 종의 대중•전문 잡지도 발간된다. 몽골은 국토가 넓고 도시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매우 중요한데,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은 위성중계를 활용한다.
• [문화]
• 몽골의 문화생활은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전통과 새로 나타나고 있는 근대적 요소가 섞여 있다. 몽골의 전통축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해마다 건국기념일인 7월 11일에 시작되는 나담 축제이다. 이 축제에서는 남자들을 위한 씨름•활쏘기•경마 등 3가지 경기를 벌인다. 몽골의 전통 문학에는 영웅서사시•전설•옛날이야기•유롤(행운을 비는 시)•마그탈(찬미하는 시) 등이 있다. 20세기 작가로는 다쉬도르진 나차고르즈와 G. 나반남질이 있다. 공연예술 분야에서는 국립극단•오페라단•발레단이 전통 및 고전 연극과 오페라•발레를 공연한다.
• [역사]
• 신석기시대에 몽골에서는 사냥꾼과 순록 사육자 및 유목민들이 작은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BC 3세기에 몽골은 • 흉노• 족(匈奴族)이 세운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4~10세기까지는 오르혼 돌궐족이 몽골에서 가장 중요한 민족이었다. 745~840년에 동투르키스탄의 • 위구르족• 이 몽골 북부지역에 제국을 세웠지만, 이 제국은 키르기스족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13세기에 • 칭기즈 칸• (테무친)이 몽골 부족을 통일하고 타타르족을 무찌른 뒤, 중앙 아시아와 페르시아 만 연안 지역 및 카프카스 남부를 차례로 정복했다. 이 지역들은 모두 몽골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1234년 칭기즈 칸의 후계자인 오고타이(1229~41 재위)는 중국의 금(金)나라를 정복했다.
• 중국의 원제국(1279~1368)을 수립한 사람은 칭기즈 칸의 손자인 • 쿠빌라이 칸• (1259~94 재위)이었다. 원이 멸망한 1368년부터 수백 년 동안 • 몽골족• 은 원래의 고향인 초원지대를 떠나지 않았고, 내부의 권력 다툼에 대부분의 힘을 쏟았다. 몽골족 최후의 위대한 지도자는 • 리그단• 칸(1604~34 재위)이었다. 리그단 칸은 세력이 점점 강해지는 만주족에 대항하여 그들의 본거지를 지키기 위해 많은 몽골부족을 통일했다. 그가 죽은 뒤, 몽골족은 만주족에 정복되어 중국 청(淸)나라의 일부가 되었다. 19세기 중엽 몽골의 민족의식이 나타났다. 1912년에 청나라가 몰락한 뒤, 몽골의 군주들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중국에 대한 몽골의 독립을 선언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제정이 무너지자 몽골은 다시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러시아 내전 때인 1920년에 벨로루시군 5,000명이 몽골을 침략했다. 그러자 담디니 • 쑤흐바타르• 가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정부의 지원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러시아 적군(赤軍)의 도움을 얻어 벨로루시군을 격퇴시켰으며, 1921년에는 중국인들마저 몰아냈다. 1924년 11월 26일 몽골 인민공화국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이때부터 소련과 몽골은 정치•경제•문화•이념적으로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중•소 관계가 악화되자 몽골과 중국의 관계도 더욱 나빠졌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완화돼, 1986년에는 몽골과 중국 사이에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 몽골은 1990~91년 동유럽과 소련을 휩쓴 민주화 혁명에 동참해 주요 정치•경제 개혁을 단행했다.
• [한국과의 관계]
• 몽골과 북한은 1948년 10월 수교를 합의한 직후부터 상호 상주공관을 두었으며 여러 가지 협조조약을 맺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1986년 11월에는 몽골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국과는 1990년 3월 26일 정식 국교를 수립했으며, 1991년 10월 오치르바트 몽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수교 이전부터도 체육 분야 등 민간차원의 교류가 있었으나, 수교 이후 인력 교류, 예술단 상호 교류 등 각종 분야에서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다. 1996년의 대한수입액은 2,601만 7,000달러, 대한수출액은 206만 4,000달러이다.
• 관심을 두고 자료를 두루 살피다 보니 흥미로운 내용을 많이 발견 하였습니다.
• 만약 차후에 관광차 외국여행을 가게 된다면 제 1순위로 몽골을 향 할겁니다.
• 끝까지 읽어 보신분이라면 한국과 몽골의 연합론에 대해 어떤 생각이신지요.

'한국-몽골 국가연합론' 기사 전문
「 운영자, 2006.06.27 | 프린트하기 」조회: 14 추천: 0
이명박 “양국에 모두 이익, 중국 반대 없으면 가능”(신동아 2006년 6월호)
최근 일부 대선주자 진영과 정치인, 학자들 사이에 ‘한국-몽골 국가연합론’이 거론되고 있다. 아직은 ‘아이디어’ 수준이다. “남북통일이라면 몰라도 이건 비현실적이다”는 견해도 많다. 그러나 ‘역사의 새 물줄기’는 언제나 현실의 틀을 뛰어넘는 상상력에 의해 발원한다. 특히 한국사(史)엔 돌궐(옛 몽골)과의 동맹이 고구려의 융성을 가져다준 ‘달콤한 추억’이 있다. 유럽연합(EU), 독립국가연합(CIS), 영(英)연방 등 국가간 합종연횡은 그리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한-몽 국가연합이 두 나라에 얼마만한 필요성과 현실성이 있는지가 관건이다.
몽골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은 5월8일 울란바토르 대학에서 한국학 전공 학생들과 환담했다. 이 행사는 언론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일부 몽골 전문가들은 각별하게 받아들인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한국 고대 문명에 고대 스키타이 문화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샤머니즘도 그렇죠”라고 운을 뗐다. 한국과 몽골이 스키타이 문화라는 ‘같은 뿌리’를 갖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노 대통령은 한국과 몽골의 우호 관계를 설명하면서 ‘공동체’라는 단어를 다섯 번이나 사용했다. “국가공동체가 확장되어왔다” “공동체가 결국 인간을 마지막으로 포용하는 다리” “국경을 뛰어넘는 화해 공존의 공동체” “멀리 내다보는 가치공동체” “자유와 평화의 공동체”….

“국경 뛰어넘는 공동체” 역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세계에서) 한-몽골이 더 빨리 가까워질 것입니다”라며 결론을 내듯 예상했다. ‘국가공동체의 확장’ ‘가치 공동체’ 등을 언급한 전반적 연설 맥락과 연결지어 보면 노 대통령이 ‘친선우호’ 이상의 한-몽 관계를 심중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곱씹게 된다.
정부 관계자는 “이는 한-몽 관계의 미래에 있어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몽골에서 “(한국 경호원과 몽골 경호원이 섞인) 합동 경호원을 쓰고 있는데,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더군요. 100년쯤 뒤엔 정말 누가 누군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라고 한국인과 몽골인의 ‘민족적 동질성’까지 언급했다. 중국인, 일본인도 한국인과 외형적으로 비슷하지만, 노 대통령이 중국이나 일본을 방문해 이런 수위의 말을 한 적은 없다.
노 대통령의 이번 몽골 방문은 ‘한국 정부가 동아시아 외교에서 몽골의 전략적 중요성에 눈을 떴다’는 징후로 받아들여진다. 1990년 몽골과 국교(國交)를 수립한 이후에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부는 몽골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주(駐)몽골 한국대사 자리는 외교관들 사이에선 한직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도 있었다. “한국 정부의 대(對) 몽골 전략엔 ‘구체적인 목표’와 ‘비전’이 없는 것 같다”는 견해도 있었다. 이는 몽골에 각별한 관심을 쏟아는 중국 러시아 일본과 대조된다는 것.

한-몽 국가연합은 ‘경제•영토 대국’
이런 가운데 일부 대선주자 진영, 정치인, 학자들 사이에선 몽골에 대한 색다른 접근법이 제시되고 있다. ‘길게는 수십 년의 시간을 두고 몽골과의 우호를 증진하면서 ‘한국-몽골 국가연합’도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구상이 그것이다. 한국-몽골 국가연합론은 3~4년 전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추진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부 국내 역사학자에 의해 즉흥적으로 제기된 바 있는데, 현재는 그때보다 더 심도 있고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국가연합은 두 개 이상의 나라가 각자 정부를 두고 내정, 외교, 군사에서 완전한 자주권을 행사하면서 공통의 협의기구를 통해 경제, 외교, 국방 문제에 대해 서로 긴밀히 도움을 주며 느슨하게 결합하는 형태다. 역내 국가간 상호 국민에 대한 내국인 대우 및 활발한 교류가 뒤따를 수 있다.
이에 비해 연방제는 두 개 이상의 나라가 각자 정부를 두되 내정만 담당하고 외교와 국방에 대한 권리는 별도의 연방정부가 맡는 제도다. 현재 몽골은 헌법으로 외국과 군사동맹을 불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가연합론’ 지지자들은 ‘국민 정서’ ‘안보’ ‘경제’의 세 가지 요인에서 한-몽 양국의 이해가 일치하는 점을 국가연합의 근거로 꼽는다. 다음은 이들이 제시하는 기본적 견해다.
“민족감정상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과 국가연합 등 지역공동체를 추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낮다. 마찬가지로 몽골도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섣부른 국가연합을 ‘몽골의 멸망’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한국은 몽골에 대해, 몽골은 한국에 대해 인종•정서•문화적으로 일치하고 교감하는 부분이 많아 ‘양자 공동체 구성’의 수용 가능성이 동아시아 국가들의 조합 중 가장 높다.
한국과 몽골은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인접 강대국으로부터 영토•주권•체제에 대한 안보 위협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반대로 근대 이후 한-몽 양국이 서로 영토적 야욕을 드러낸 사례는 없으며 앞으로도 그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따라서 서로 적대적이지 않고 공통의 대외 환경에 직면한 한-몽은 연대할 여건이 충분하다.
한국과 몽골이 국경을 접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은 국가연합 이후 어느 한쪽으로의 일방적 흡수를 방지하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남북한 통일과 한-몽 국가연합은 상치하지 않는다. 북한은 한국과 단독으로 통일 문제를 논의하는 것보다는 사회주의 경험을 공유하는 몽골이 완충적으로 참여하는 환경에 더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한반도 7배 면적(156만4160㎢)의 영토대국 몽골과 세계 10위 경제규모(2005년 GDP 7930억7000만달러)의 한국이 연합하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 일본, 한-몽 국가연합 3자간 세력균형도 이룰 수 있다. 이는 안보 보장에 있어서도 한-몽 두 나라에 유리하다.
경제 측면에서 국가연합은 한국 자본의 몽골 투자를 촉진해 개발도상국 몽골의 국민소득 증대와 경제 선진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내륙국인 몽골에 한반도는 항구로 기능하게 된다. 몽골의 풍부한 자원, 유라시아 대륙 한복판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 북한 노동력과의 연계는 한국 경제의 ‘블루 오션’이 될 수 있다.”

이명박 “몽골 인구 적어 실현 가능”
대선주자인 이명박 서울시장은 최근 사석에서 기자로부터 한-몽 국가연합에 대한 질문을 받자 “중국의 반대가 없다면 실현 가능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몽골을 방문해 환대를 받은 바 있는 이 시장은 몽골과의 우호친선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 듯 보였다.

-장기적으로 한국-몽골 국가연합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구상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나.
“실현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중국이 반대할 것이다.”
-중국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중국이 반대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선 실현 가능하다.”
-국가연합의 필요성은 있다고 보나.
“그럴 필요성이 있다. 몽골과 함께하는 것은 한국으로선 바람직한 일이다. 한국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여러 여건이 맞다면 몽골도 원할 것이다.”
-중국이 반대하지만 않는다면 두 나라의 연합이 수월할 것으로 보는 이유는?
“두 나라에 모두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몽골의 인구가 280만 정도밖에 안 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몽골 인구가 1000만을 넘으면 문제가 좀 복잡해진다. 인구 4800만의 한국은 280만의 몽골과 충분히 연합할 수 있다.”
‘몽골의 인구가 적기 때문에 국가연합이 쉽게 이뤄질 수 있다’는 논리엔 대다수 몽골 전문가도 동의한다. 이들은 “한국이 인구수로 몽골을 압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연합 이후 한국의 지원으로 몽골의 경제수준을 끌어올리는 비용이 그만큼 덜 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비용 문제만 놓고 보면 같은 민족이지만 인구가 2300만에 이르는 북한과 통일하는 것보다 부담이 훨씬 덜하다는 얘기다. 물론 북한과의 통일은 단순히 경제 문제로만 따질 수 없는 사안이지만.
-몽골에는 어떤 게 이익이 될 수 있나.
“경제적인 면이 가장 크다. 현재 한국에 취업한 몽골인은 몽골 전체인구의 1%인 2만5000명 정도다. 그런데 이들이 몽골로 송금하는 돈은 연간 3억달러로, 몽골 GDP(약 18억7000만달러)의 16%나 된다. 한국이 몽골 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이처럼 크다. 몽골은 한국과 경제활동을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갖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안다.
또한 몽골은 한국을 우방국으로 여긴다. 한국을 안보위협국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 또한 좋은 환경이다. 몽골인도 ‘몽골과 한국은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고 본다. 몽골인은 한국인과 같은 종교(불교)를 믿고 있어 금방 친해진다.”

-몽골과 중국의 관계는 어떤가.
“몽골은 중국 물자에 많이 의존한다. 그러나 중국을 안보위협국으로 생각한다. 중국은 내몽골에서 몽골 민족을 몰아내는 소수민족정책을 쓰고 있다.”

-한국이 몽골과의 우호관계 증진에 더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보나.
“물론이다. 한국과 몽골은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몽골은 육류를 많이 생산한다(몽골의 가축 수는 300만마리 정도로, 인구보다 조금 더 많다). 그런데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까다로운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해 수출을 못한다. 선진국들이 그렇게 기준을 정한 것도 세계화 전략의 일환이다. 한국 전문가들이 몽골에 가서 몇 년 걸리더라도 OECD 기준에 맞추는 방법을 전수할 수 있다. 그래서 몽골로부터 육류를 값싸게 공급받아 국민이 육류를 풍족하게 즐기도록 했으면 좋겠다. 몽골에선 주식이 육류인데, 한국에서 근무하는 몽골 노동자들은 값이 비싸 고기 먹을 엄두를 못 낸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몽골 육류를 수입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이수성, “한-몽 연합, 안보상 필요”
이수성 전 총리도 5월4일 ‘신동아’와 한 인터뷰(154쪽 기사 참조) 뒤에 이어진 자리에서 “내가 1997년에 대통령이 됐다면 엄청난 투자를 해서 한-몽 관계를 획기적으로 증진시켜 놓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몽골에 관심을 소홀히 한 지난 10년이 한국에는 아쉬운 순간이었다는 것이다. 이 전 총리 역시 ‘한국-몽골 국가연합론’에 적극 동의했다.
“정치인들은 몽골의 전략적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선 안 된다. 지금이라도 한국은 몽골과의 협력에 역량을 모아야 한다. 몽골은 중국 일본 미국과 다르다. 한국인과 몽골인은 똑같은 민족으로 봐도 된다. 진정한 형제의 나라다. 한-몽간 신뢰가 쌓이면서 10∼30년의 시간이 지나면 한국-몽골 국가연합은 자연스럽게 가시화할 것이다.”
이 전 총리가 몽골과의 연합론에 동의하는 주된 이유는 한반도 안보상 문제가 있다. 그는 “현재의 동아시아 정세를 볼 때 한국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한반도에 다시 어려운 상황이 밀려올 수도 있다. 몽골과의 연합은 한반도의 위기를 능히 막아낼 수 있는 방패”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일부 몽골 전문가들은 ‘중국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몽골의 지정학적 위치에 주목한다.
차기 대선주자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명예회장으로 있는 ‘한•러문제연구소’는 소속 교수진에 의뢰해 올해 말쯤 ‘한국-몽골 국가연합(또는 연방제)’의 필요성, 문제점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연구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몽골을 방문해 몽골 정부 관계자, 경제인, 지식인들의 의견도 청취할 계획이다. 다음은 이 연구소 권영갑 소장과의 일문일답이다.

-한-몽 국가연합의 필요성과 실현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보나.
“국가연합이 성사되려면 국민투표에 부쳐 통과해야 한다. 지금 정도의 신뢰관계, 유대관계로는 한국과 몽골 양쪽에서 모두 부결될 것이다. 한국과 몽골은 문화•정치적•경제적 우방이라는 현재의 상황을 더 진전시켜 하나의 공동체이며, 미래의 동반자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의식이 양국에 뿌리내려야 한다. 수십년이 걸릴지 모른다. 그런 뒤에야 국가연합이 가능하다.”

-대통령도 한-몽 공동체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는데, 두 나라는 어떤 부분에서 협력할 수 있나.

“한국과 몽골은 환경재앙에 직면해 있다. 몽골은 사막화가 진행 중이다. 국토의 80%가 사막이 됐다는 얘기도 있다. 칭기즈칸 군대가 달리던 초원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대로 두면 100년 뒤 과연 이 국가가 존속할지도 의문이다.
몽골의 사막에서 발원하는 황사는 한국에도 큰 피해를 주고 있다. 서울이 몽골과 중국에서 날아온 황사에 뒤덮이는 날, 미세먼지는 공기 1㎥당 2000㎍을 넘는다. 이는 기준치의 13배가 넘는 수치다. 먼지 속엔 중금속, 발암물질이 포함돼 있다. 한국이 당사국인 몽골과 함께 몽골 사막의 녹화에 적극 나선다면 이는 한-몽 공동체가 형성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정부도 대통령의 몽골 방문 때 몽골 고비사막 등의 녹화를 지원할 의사를 밝혔는데….
“정부가 몽골 사막 녹화에 눈을 돌린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정부는 ‘왜 몽골의 사막에까지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하느냐’는 물음에 제대로 답을 못한다. ‘사막 녹화를 통해 한-몽 공동체를 구축하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설정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정부는 목표 달성을 위한 구체적 실천방안도 아직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측 “사막 녹화로 한-몽 공동체 구축”
-그렇다면 몽골 사막 녹화사업은 어떻게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몽골 사막 녹화를 한-몽 공동체 형성의 계기로 삼으려면 녹화사업을 ‘제대로’ 해야 한다. ‘매년 제주도 면적만한 사막을 숲과 초원, 경작지로 바꿔놓겠다’는 식의 분명하고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해 이를 실현해 보여야 한다. 이는 황사를 줄여 한국의 대기오염을 감소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사막을 녹지로 바꾸기 위해선 태양과 물이 필요하다. 몽골엔 일조량은 충분하다. 몽골측 조사에 따르면 사막 지하에 상당한 양의 지하수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지하수가 없다면 인근 러시아의 바이칼 호 등지에서 수로를 내어 물을 대야 한다. 지하수를 지상으로 끌어올려 스프링쿨러 설비로 지속적으로 공급하면 사막에서도 식물이 자랄 수 있다.
결국 관건은 물 공급에 들어가는 전기다. 황사를 태평양 건너 미국까지 날려보내는 엄청난 에너지의 ‘사막 바람’을 전기생산(풍력 발전)에 활용할 수 있다. 이는 몽골 인근의 중국측 사막에서도 사업성이 증명됐다. 식물이 모래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는 방풍시설도 필요하다. 초원과 사막의 경계지점부터 사막 쪽으로 전진해가는 식으로 녹화사업을 진행한다. 10년쯤 뒤엔 이렇게 조성된 녹지와 숲에서 수분이 증발해 비가 오기 시작할 것이다. 몽골 사막을 녹지로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사막 녹화에 들어가는 비용도 엄청난 규모일 텐데….
“실질적 효과를 내려면 매년 1억달러 정도는 들 것으로 본다. 앞서 얘기했듯 정부가 국고로 추진하면 ‘국민 세금을 왜 남의 나라 사막에다 퍼붓나’ 하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그렇다고 녹화 사업비를 줄이면 실질적 효과가 나지 않는다. 기후협약을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 기후협약은 향후 이산화탄소를 기준치보다 초과해 배출하는 국가나 기업에 막대한 금액의 과징금을 부과할 것이다. 이에 상응하는 보상책으로 기후협약은 식목 등으로 공기 중 산소배출을 늘려 지구온난화 방지에 기여한 국가엔 현금과 다름없는 이산화탄소 배출권을 부여한다. 배출권을 받으려면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유엔의 실사를 받아 배출권 부여 대상 사업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외국에서 벌이는 사업에도 배출권이 부여된다.
한국은 무턱대고 몽골 사막 녹화에 뛰어들 것이 아니라, 수종(樹種) 선택 등 사업시작 이전 단계부터 몽골 사막 녹화사업이 유엔의 배출권 제공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검토해 기후협약에 대한 대응과 연계시켜야 한다. 굳이 정부가 세금을 쓰면서 직접 나설 것이 아니라, 사막 녹화와 배출권 확보에 전문성이 있는 새로운 국제적 환경기구(세계녹십자연맹) 창설을 지원하거나 현재 배출권 확보를 위해 노력 중인 이산화탄소 다량배출 대기업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한국과 몽골은 국경이 맞닿아 있지 않아 교류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렇지 않다. 2000년에 한국은 몽골의 네 번째 교역대상국(5700만달러)이 됐다. 600여 개의 합작회사가 설립돼 있고, 이번 노 대통령의 방문으로 더 많은 몽골인 유학생과 근로자가 한국으로 오게 됐다. 몽골에서도 한류(韓流) 문화 및 자동차, 가전 등 한국 제품의 인기가 높다. 정보통신 등 한국 기업의 투자도 늘고 있다. 현재 2000여 명의 한국인이 몽골에서 활동하고 있다. 몽골은 세계 10대 자원국으로 석탄, 석유, 구리, 우라늄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다. 한국에 절실히 필요한 자원들이다. 철도는 북한 통과 문제만 해결되면 한국-몽골의 자원-상품 교류 활성화에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2006년 5월자 미국 중앙정보국(CIA) 인터넷판은 몽골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몽골은 13세기 칭기즈칸의 거대한 유라시아 제국 건설로 명성을 얻었다. 그 후 몽골은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1921년 소련의 도움으로 중국으로부터 독립해 1924년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됐다. 현재는 대통령제와 내각제가 혼합된 정치체제다. 중국으로부터 해방된 7월11일이 국경일(독립기념일)이다.
국토는 알래스카보다 약간 작으며,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전략적 위치에 있다. 남중부의 고비사막 등 광활한 사막지역, 초원, 서쪽과 남서쪽의 산악지역으로 돼 있다. 자원이 풍부하다. 화석연료 사용으로 수도 울란바토르의 공기가 오염돼 있다. 먼지 폭풍(황사)이 생성된다. 인구는 283만명, 출산율은 1.46%, 영아사망률은 1000명당 52명, 평균수명은 64세, 문맹률은 2.22%, HIV 감염자는 0.1%도 안 된다.
국민 중 몽골족은 94.9%, 카자흐족이 5%, 중국인 러시아인 등 다른 민족은 0.1%에 불과하다. 신도는 불교(라마) 50%, 무교 40%, 샤머니즘과 기독교 6%, 이슬람교 4%다. 직업은 목축업-농업 42%, 광업 4%, 제조업 6%, 무역업 14%, 서비스업 29%, 공공부문 5%로 되어 있다.
휴대전화 사용 대수는 40만대, 인터넷 이용자는 20만명, 실업률은 6.7%, 빈곤층은 인구의 36.1%, 1인당 GDP(2005년)는 2200달러(한국은 2만400달러), 외채는 13억달러, 정부 1년 예산(2005년 세입)은 7억달러(한국은 1950억달러)다.’

中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카드’
몽골은 1921년 소련의 도움으로 중국으로부터 독립했으나 소련군이 몽골에서 철수한 뒤 중국은 몽골을 중국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고 한다. 8000여 명의 육군을 보유한 몽골은 2003년 미국을 위해 이라크에 179명의 전투병을 파병했다.
한국-몽골 우호협력 단체에 소속돼 몽골에서 친선활동을 펴온 김태균 수원과학대 교수(정치학 박사)는 “미래의 몽골 역사도 ‘사막화’ 및 ‘중국’이라는 2대 위협에 맞서 주권을 지켜 나가야 할 역사다. 몽골이 친러, 친미 외교를 펴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귀띔했다. 김 교수는 또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의 옛 영토인 북한지역뿐 아니라 현재의 몽골지역에도 영유권을 주장할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몽골은 한반도 안보에 실존적 위협으로 가시화하는 동북공정에 ‘동변상련’을 느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몽골은 좋은 파트너다. 몽골과의 연대는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유력한 카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천하의 중심, 고구려’의 저자 이윤섭씨(역사 작가)는 자신이 쓴 글에서 “몽골의 각종 여론조사에서 몽골이 앞으로 전략적 동맹으로 삼아야 할 나라로 4대 강국을 제치고 한국이 꼽히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했다. 지난 2004년 우르진훈데브 페렌레이 주한 몽골대사는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몽골 사람은 한국을 외국으로 치지 않는다. 한국과 몽골은 운명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하기도 했다.
4년여 전 삼성경제연구소 고위 관계자가 ‘한국-몽골 경제통합론’을 주장했으나 몽골측에서 부정적 의사를 표시한 바 있다. 그러나 국가연합과 경제통합은 개념이 다르다는 지적이다. 국가연합은 안보•경제 문제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인적 교류를 활성화하는 것이지만 관세철폐 등 경제통합을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 소속 국가들이 느슨하게 연합한 영(英)연방의 경우 영국이 다른 나라와 무력 분쟁을 벌일 때 영연방 소속 국가가 영국을 비판한 일도 있다. 국가연합은 역내 국가들의 공동체적 결속력을 대외에 보여주지만, 역내 국가의 주권을 제약하는 효과는 없다는 것.
또한 국가연합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국가연합은 오랜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수성 전 총리는 “한국과 몽골이 정서적 유대감의 바탕 위에서 경제•문화•인적 교류를 한층 활성화해 신뢰를 충분히 쌓은 뒤 중장기적으로 국가연합도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지, 당장 무엇을 도모하자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정부, “동북아공동체가 우선”
일부 전문가는 “미국은 중국 견제 차원에서 동맹국인 한국과 친미노선의 몽골이 가까워지는 것에 동의할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미국의 태도는 오히려 한미 관계에 의해 좌우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영갑 소장은 “한국과 중국간 우호관계와 교류는 더욱 발전돼야 한다”고 전제한 뒤 “중국은 한국-몽골이 동북공정에 공동대응하겠다고 나선다면 이를 제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힘의 논리’가 국제사회를 지배한다지만, 뚜렷한 명분 없이 주변국의 자주권 행사에 간섭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안보•군사•경제 문제에서 주변 4강(强)의 협력이 필요한 한국과 몽골이 독자적으로 양국만의 국가연합 단계에 이르기는 어렵다”는 부정적 시각도 상당하다. 김선호 부산외국어대 국제통상지역원 교수는 “한국과 몽골이 단순히 가까워지는 정도라면 몰라도,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한계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이에 대해 “중국은 반대하겠지만, 러시아는 한-몽골 연합이 연해주-시베리아 개발과 연계될 수 있어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상반된 의견도 있다.
한국-몽골 국가연합은 노무현 정부가 구상 중인 ‘동북아공동체’와 상충한다. 동북아공동체라는 ‘거대 담론’에 대한 반발의 일종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노 대통령은 유럽연합(EU) 모델을 벤치마킹해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북한 몽골을 포괄하는 동북아(경제)공동체 구상을 밝힌 바 있다. 동북아위원회, 통일연구원 등이 이를 정책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권영갑 소장은 “동북아공동체 구상은 지금의 동아시아 정세에선 추상적으로 들린다. 목표를 너무 높게 잡은 것 같다”고 비판했다. 다음은 권 소장의 말이다.
“미국을 배제한 동북아공동체가 한국의 안보•경제에 어떤 이익을 주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섣불리 추진하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만 훼손하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는데, 이에 대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실제로 동북아공동체에 대해 한국만 얘기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유럽은 비록 여러 나라로 나눠져 있지만 십자군전쟁 등으로 오랜 ‘역사적 공동체’ 경험을 갖고 있으며, 1950년 ‘유럽철강석탄공동체(ECSC)’를 결성하는 등 당면 문제 해결을 위한 현실적 기반 위에서 출발해 유럽연합을 형성했다. 그러나 몇몇 동북아 국가는 민주화의 수준, 이웃국가와의 호혜평등의 전통이 일천한 상태인데, 이러한 동북아시아 지역에 인위적으로 유럽 모델이 이식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나라, 식민 지배를 반성하지 않는 나라와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은 정서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동북아 국가들은 이 지역의 자연재해인 황사를 줄일 ‘환경 공동체’부터 먼저 구성해 모범을 보이고, 신뢰를 쌓는 것이 순서다. 동북아 공동체 구성은 그 뒤의 일이다.”

“몽골? 잘 모른다”
국내 동아시아 전문가 상당수는 몽골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했다. 한국-몽골 국가연합에 대해서도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라는 견해도 상당하다. 정부나 정치권 내에서도 부정적 시각 또는 무관심한 태도가 많다. 외교안보연구원 관계자는 “몽골은 동아시아의 일원이긴 하지만, 한국의 통일•안보•경제 관련 외교는 4강과 북한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좌담>
탈식민지 시대의 동아시아
일 시: 1999. 11. 5 오전 10시
장 소: 연세대 상남경영관
참석자: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
최원식 (인하대 국문학과 교수)
사회자:
유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본지 편집위원)
유석춘(사회) : 이번 좌담은 “탈식민지 시대의 동아시아”를 주제로 한국 일본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21세기로 투사해 보고자 합니다. 동아시아에 존재하던 중세의 ‘중화질서’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유럽으로부터 시작된 ‘세계체계’에 편입되었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식민지배’라는 질곡을 본의 아니게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식민지배라는 질곡은 해방이 된지 이미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알게 모르게 우리의 선택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탈식민지 시대의 동아시아’는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과거의 굴레를 벗고 미래를 함께 설계할 수 있는지 모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역사학자이신 도 선생께서 먼저 시작해 주시지요.
도진순 : 한국문제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긴 시간을 두고 보는 통시적인 관점과 아시아 각국의 경험을 비교하는 공간의 확대가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회자께서 말씀하신 중세의 동아시아를 살펴보는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에서 고대시기는 대체로 문화의 독립성 내지 다원성이 많았지만, 중세에는 불교•유교 등 보편문화가 풍미하였습니다. 저는 중세의 ‘중화질서’ 이전의 몽골제국부터 언급하겠습니다.고려때 몽고제국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하나는 보편적 문명 세계에 관한 것으로, 몽골제국이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를 관통하는 팍스몽골리아나 체제를 구축하였다는 점입니다. 즉 몽골제국의 성립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 문명의 창조가 있었다는 것이죠. 이 점은 오늘날 미국 주도의 세계화와 유사한 측면이 있는데, 워싱턴 포스트』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로 징기스칸을 선정한 것이나, 프랑스의 작크 아탈리가 21세기는 도시형 유목사회라고 언급한 것 등도 이러한 맥락과 관련되는 것입니다.다른 하나는 우리 나라, 즉 고려의 위상이 몽골제국의 부마국(?馬國)이라는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아시아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재미있는데, 몽골이 섬나라 일본 정벌은 실패하였고, 베트남은 대륙에 있지만 몽골의 침략을 저지시킵니다. 일본과 베트남에 아직도 이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 부분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 부마국이란 특별한 위치인데, 한편으로는 제국의 체계 속에서 문명적으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주성에 침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점은 단순히 과거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책봉과 사대를 축으로 하는 중화세계가 일색화되는 것은 조선시대 이후, 특히 조선 후기입니다. 흔히 우리가 전통이라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근대 직전의 어느 한시기의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 적지 않는데, 우리가 전통적으로 중화세계에 일방적으로 포섭되었다는 생각도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의 전통 자체는 매우 다양하고 역동적인 세계관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에서 명나라 파병 이후 중화주의적 세계관은 강화됩니다만, 명청교체기를 거쳐 오랑캐인 청나라가 중화를 석권했기 때문에 우리가 소중화라는 의식 또한 강화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명청교체기 이후 중국 변방의 나라, 즉 일본과 베트남에도 소중화 사상이 강화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면에서 일본이나 월남이 소중화의식이 더 강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일본의 경우는 서구적 시각에서 보면 유교국가일지 모르지만, 일본 자체로는 과거가 국가제도로서 정착된 것도 아니고, 국가의 정상지배계급은 무사였고, 유학은 대체로 실무적인 수준에서 활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소중화의식은 일본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근대문물과 접촉할 때 적지 않은 차이를 발생케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 나라에서 중화의식과 근대문물의 접촉과정에서 중화주의자들이나 의병들은 세계를 ‘중화-소중화-오랑캐’로 이뤄졌다고 보는데 비해, 개화파들이나 근대주의자들은 세계를 ‘개화-반개화-미개’로 독해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 나라에서 표면적인 정치노선만 보면 이들은 서로 정반대이지만, 그 기저의 세계관에는 중요한 공통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둘 다 자신이 옹호하는 세계관의 문화적 선진성만 주장할 뿐, 침략성이나 억압성의 이면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죠. 즉 중화주의자는 중국, 근대주의자들은 일본과 서양의 억압성이나 침략성을 경시한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화론자들도 세계화의 억압적 측면을 경시합니다만, 아무튼 이러한 점은 한국 지성사에서 꼭 집고 넘어갈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소 길게 언급하였지만 하나만 더 추가하겠습니다. 임란 이후에 당쟁이 심화되는 것은 나라의 안위는 명나라가 지켜주더라는 그릇된 믿음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에 대한 지식인들의 거의 절대적인 믿음과는 달리, 대중들은 이미 비판의식이 싹트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의 설화 등을 보면 대중들은 명나라 군대에 감사하면서도 이여송 부대의 토색적 행위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대중들은 질서 정연하게 이론적으로 풀어내지는 못하지만, 지식인 문화가 비켜가기 쉬웠던 대국 선진문화의 억압성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최원식 : 우리는 그 동안 역사를 침략과 저항이라는 이분법으로 보아왔습니다. 통일된 근대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한다는 비원(悲願)에 입각해서 우리 역사를 저항을 중심축으로 파악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국내외적 상황의 변화와 함께 특히 서양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한물 가면서 대두한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의 유행 속에서 이와 같은 반제국주의 담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탈식민지 담론에 대해서 비판적입니다. 포스트주의가 다 그렇듯이 탈식민주의는 마치 오늘날 식민주의, 제국주의 시대가 이미 끝난 듯한 느낌을 강하게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탈식민주의 담론에도 우리 역사의 실상을 리얼한 관점에서 다시 보게 하는 유용한 면들이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도 위계적 세계질서가 아직 해체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국주의적 담론의 유효성이 인정되기는 하지만 침략과 저항의 이분법에만 사로 잡혀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도진순 : 선생이 중세 동아시아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많이 말씀하셨는데, 핵심은 우리 나라가 취했던 사대주의, 그 사대주의를 어떻게 보는가입니다. 우리 근대 역사학계에서는 사대주의를 거의 민족의 원수처럼 여겼습니다. 물론 자주독립이란 기본목표가 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냉정하게 볼 때, 근대이전 동아시아 체제 안에서 사대주의자를 매국노 취급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몽골침략 경우를 들어도 물론 고려의 40년간 항몽전쟁은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하다다다까시(旗田巍)는 고려를 비롯한 아시아 민중들의 항몽 투쟁이 일본을 몽고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했다는 아주 흥미로운 해석을 했습니다만, 몽골 복속 이후도 마냥 굴욕으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일본과 베트남과 달리 고려가 굴복하게 된 것은 우리만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바다로 보호되고, 베트남은 열대밀림이란 강력한 장벽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합니다. 몽골사람들은 한국을 무지개의 나라라는 의미의 ‘쏠롱고스’라고 부르는데, 임형택 교수는 몽골의 세계경영에 고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팍스 몽골리카가 제공했던 세계시장확대가 서구근대자본주의 체제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반이 됐다는 월러스틴의 지적을 음미하면서 항몽전쟁과 함께 고려의 몽고 복속시기를 다시 봐야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가 일본을 너무 모르니까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근대 이전에도 강한 나라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걸 감안하면 사대교린이란 정책도 힘든 노력 속에서 얻어진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지혜였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이런 사대교린 정책을 넘어서 중세 이후 비원인 자주독립을 어떻게 파지해 나갈지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김일영 : 저는 전근대, 근대, 탈근대를 “국가의 성격 변화”라는 관점에서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우선 ‘국가’란 말부터 시작을 해보지요. 실록 등 전근대 중국과 조선의 기록에는 “국가(國家)”라는 말이 없고, 대신 “국(國)”이나 “가국(家國)”이란 단어가 나온다고 합니다. 단순화시키면,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변화는 국에서 국가로의 변화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서 국가는 근대국민국가입니다. 요즘에는 ‘글로벌화’가 등장하면서 국민국가를 ‘초극’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결국 국(國)에서 국가로 와서 탈국가로 가려고 한다고 보입니다.
문제는 ‘국’과 ‘국가’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것이죠. 정치학에서도 근대국가 개념은 많은 논란들이 있습니다만, 서양의 경우 막스 베버의 정의를 토대로 본다면, 영토•주권•국민의 3가지를 근대국가의 요소로 들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전근대시대의 국(國)과 근대의 국가(國家)간의 차이를 잘 드러낸 말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같아요. 이 말을 통해서 동아시아의 구조를 보면 신(身)에서 가(家)로 가고 국(國)으로 가고 천(天)으로 갑니다. 결국 국(國)은 오늘날 국가(國家)와 차원이 다릅니다. 중국에서 국은 제후가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즉, 천하는 천자가 다스리고 국은 어디까지나 제후가 다스리는 영역인 것이지요.
전근대 시대의 국(國)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개념이 사대(事大)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대관계는 기본적으로 위계적이고, 불평등한 관계라는 점에서 전근대 시대 국(國)간의 관계 역시 평등하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중국적 세계관에서 볼 때, 사대질서는 중국내부에도 적용되고, 동아시아 전체, 더 나아가 전체 세계에도 적용됩니다. 그 때 천자가 다스리는 천하는 중국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전세계적 질서를 가리키는 말이지요. 그러면서도 사대질서는 단순한 위계질서가 아니라 다층적인 질서입니다. 중국에는 중앙과 지방(중앙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 외에 소수 민족의 지도자를 토사(土司) 또는 토관(土官)으로 임명해 간접통치하는 지역과 몽골, 티벳, 회족(위구르)과 같이 이번원(理藩院)을 통해 다스리던 번속(藩屬)의 지역이 있습니다. 그 다음이 ‘조공’관계인데, 조선, 샴(타이),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가 이에 속합니다. 일본은 ‘호시’(互市)의 관계였는데, 일본은 이러한 적절한 고립의 상태를 이용하여 필요하면 조공의 관계를 통해 문화와 문물은 받아들이고, 불필요하면 호시의 관계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지요. 수나라 당시 일본의 왕이 “일출처(日出處)의 천자가 일몰처(日沒處)의 천자에게 보낸다”로 시작하는 글을 중국에 보낸 것에서 드러나듯이 일본은 스스로를 천하라고 생각해왔고, 국학이 등장한 이후에도 자기들이 천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은 중화질서에서 천하는 생각하지 못했고, 오직 국(國)에만 머물렀죠. 전근대에 국(國)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중화질서였다면, 오늘날 국가간의 관계는 주권국가간의 체계(inter-state system)입니다. 한국은 청일전쟁 이후 이런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다가 주권을 잃은 것이지요.

도진순 : 물론 그런 것이 있습니다만 이야기가 조금 일방적으로 될 수 있다 싶어서 한두 가지 언급하겠습니다. 중국은 자신의 땅끝을 하늘의 끝(天津)이라 하고, 우리는 땅의 끝(土末)이라고 하는 등 차이가 있습니다만, 우리도 옛적에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구려도 그러했고, 고려도 안으로는 천자의 면모를 내세우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인데, 일본은 천황이라 했고, 베트남도 황제를 칭했습니다. 다만 일본은 섬나라로 대륙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었고, 베트남은 인근 동남아시아에 다른 여러 나라가 있었던 반면, 우리는 주변에 소국들이 거의 없어서 실질적인 의미가 거의 없었다는 차이는 있지요.
그런데 역사를 평가할 때는 자주성과 아울러 선진성도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다소 도식적이지만 전통시대 대륙문명의 시기에는 한반도가 일본이나 베트남 등에 비해서 문명화가 빠른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불교니 율령이니 역사책 편찬이니 여러 가지에서 그런 측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결국 지정학적 위치라고 하는 것은, 매사가 그렇듯이 부정성과 긍정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부정성을 최소화하고 긍정성을 극대화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자주성으로만 얘길 하면 전통시대에는 중국에서 거리가 멀수록 고유문자를 사용하는 등 강한 측면이 있습니다만, 문명화에서는 후진성을 지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또 하나 전통시대 사대종속관계는 피라미드구조를 갖고 있지만 상당히 의례적이기 때문에, 근대자본주의 세계의 식민지 등과는 종속의 강도라든지 하는 점에서 준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 사서에 나타난 사대체계와, 한반도나 일본•베트남 등이 인식하는 세계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즉 중국사서의 사대체계가 역사 객관적 실체였다고 곧바로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김일영 : 저는 근대국민국가라는 기준에서 국(國) 사이의 질서를 규정하는 동아시아 질서의 모습을 말한 것입니다. 부연하고 싶은 것은 중국의 사대 중화논리에서 호시관계의 바깥도 있더군요. 호시까지는 그래도 교화가 가능하지만, 화외(化外)라고 불리는 그 바깥의 지역은 교화가 불가능 한 곳입니다. 이를 통해서도 중화질서라는 것이 중국의 자기편리를 중심으로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석춘 : 중세 동아시아의 세계질서는 비록 제한된 시간이지만 ‘몽고’ 중심의 질서가 있었고 그 다음에 ‘중화’로 바뀌었습니다. 그에 파생된 상황으로 ‘고려’가 있다가 ‘조선’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화질서’에서 ‘유럽질서’로 바뀌면서 ‘조선’이 망하고 ‘대한민국’이 탄생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세계질서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른 우리 민족의 세계관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 등장한 식민지배의 경험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최원식 : 김일영 선생이 말한 국가(國家)란 말이 근대 이전에도 있기는 합니다만, 요즘과 같은 국민국가(nation state)의 의미는 아니었지요. 근대 이전의 중화체제가 계속적인 내부 변모을 겪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변화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에서 그야말로 천하질서로서 세계주의를 구현했던 마지막이 당나라인데, 안록산의 난 이후 당 체제가 몰락하면서 한족 중심의 중화주의, 한족 중심의 세계질서가 심각한 내부 변모를 겪었다고 봅니다. 청(淸) 이후 새로운 중국의 탄생을 세계제국으로부터 근대 국민국가로 변신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저는 청(淸)이전부터 그러한 지향이 일정하게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북방유목민족의 끊임없는 위협 앞에 매우 국수주의적으로 흐른 송(宋) 이후, 원나라나 청나라 시대, 도진순 선생의 말처럼 중국을 한족이 아니라 유목민족이 차지하면서 굉장한 혼란이 생긴 것이죠. 주변국가에서도 중화문명의 실질적인 담당자인 한족 대신에 경멸해오던 오랑캐에 의해 중화체계가 재편되니까가 소중화주의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원과 청의 등장으로 주변민족들에게는 일종의 국민주의 맹아들이 생긴 것입니다. 주변국가의 소중화주의에서나 중화체제 내부에서도 국민주의 맹아들이 싹텄다고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근대 이전 이런 국민주의 맹아들이 진정한 국민주의가 아니거든요. 일본이 전국시대에 보여줬던 민중적 힘의 분출이 억압적 도쿠가와 체제로 귀결되면서 국민주의로의 발전이 봉쇄되었듯이, 한국에서도 병자호란 이후의 소중화주의가 근본적으로는 반동적 억압체제의 이데올로기였거든요. 하지만 일본은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중국도 일본을 특별 취급했고, 조선도 왜놈이라 욕하면서도 교린을 지속했습니다. 동아시아가 근대자본주의체제 안으로 편입될 때, 일본이라는 변수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유럽세력이 동남아를 거쳐 동진하고, 미국이 태평양을 건너 서진하면서 동아시아가 격동을 겪게 될 때, 일본은 먼저 동남아 쪽과 교류하고 나중에 미국과 결합하면서 비서구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근대국가로 넘어서는 데 성공했거든요. 이는 일본이 서양의 영향을 나름대로 소화할 수 있는 어떤 바탕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동아시아의 근대가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편입될 때에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서양이 일본을 대리로 내세웠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서양의 대리자로, 앞잡이로서, 동아시아에서 임진왜란 때부터 꿈꿔왔던 중화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동아시아체제를 만들고, 더 나아가서 서구의 세계체제에 대항하려다가 실패한 것입니다. 중화체제 내에서도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던 일본이 근대국가로 넘어가는 데에 유일하게 성공함으로써 동아시아 근,현대사는 매우 특수한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유석춘 : 유럽이 팽창하면서 세계 여러 지역을 편입시킵니다. 그 지역들을 비교해 보면, 유럽이 지배하려는 지역 중에 유럽에 버금가는 문화를 가졌던 곳은 역시 동아시아가 제일 두드러집니다. 이슬람은 출발부터 유럽과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의 팽창은 이미 이슬람의 패배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우는 유럽과 경쟁할 만한 문명이나 문화가 벌써 사멸하였고, 동남아시아 경우에도 조그만 국가들은 많았지만 문명으로 유럽과 상대가 될만한 경우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얘기하신 유럽의 진출에 있어 발견되는 동아시아의 특수성을 인정한다면 동아시아 내부의 지역별 사정도 동시에 고려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일본은 어떤 위치였고 어떻게 유럽문명을 받아들였나를 살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일본은 비유럽 국가에서 유일하게 유럽에 경쟁할 수 있는 국가를 탄생시켰고, 제국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도진순 : 지정학적인 것은 잘 말씀하셨는데, 문명사적 관점에서 일본의 근대화에 대해 두 가지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는 일본의 내부 여건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침략성에 대한 것입니다.
도쿠가와 막부 시기 일본은 당시의 중국이나 한국과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일본은 유교적 관료국가라기보다 무사•상인문화가 주류를 이룹니다. 유교적 사농공상의 구별이라든지 억말억상(抑末抑商)도 없었고, 유학자•성리학자들은 최정상권력층이 아니라 문사적 실무집단에 가까웠으며, 대표적인 성리학자가 ‘공자가 일본에 쳐들어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시험문제를 낼 정도로 일본적이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 시기 도쿄는 이미 세계 유수의 상업도시로 부상할 만큼 성장합니다. 따라서 개항 이전에 중국•한국•일본을 같은 것으로 예단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 아시아에서 전통시대 중국과 근대 일본의 헤게모니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전통시대 중국은 북방 유목민과 한족이 번갈아 정권을 잡았습니다. 특히 북경에 가보면 알 수 있듯이 변방의 문화를 중앙으로 많이 끌어 들였습니다. 즉 아시아에서 중국의 헤게모니는 오랜 시기에 걸쳐 형성된 역사적인 것이며, 불교•유교 등 선진문화와 결합되기도 하고, 변방 문화에 대해 매우 유연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근대 일본의 헤게모니는 부국강병과 직결되는 힘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부상한 매우 현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그들에게 독특한 천황제적 위계질서로 아시아를 피라미드형으로 편제하고자 하였습니다. 즉 근대 일본의 헤게모니가 훨씬 패권적이었습니다.
김일영 : 중화질서의 붕괴 과정을 말씀하셨는데, 대국으로서의 중국이 사라지면 중화질서도 붕괴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중국도 스스로 중화적 관점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이전의 중화관념에 휩싸여 있던 조선 등 다른 주변국가도 함께 벗어나야 하니 상당한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아편전쟁을 해결하기 위해 난징조약을 맺을 때, 중국은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정부의 성장(省長)에게 그 일을 맡겼다고 합니다. 중화적 관점으로 보면 교화 불가능한 지역으로 여겼던 영국과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싫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실제로는 국가간 전쟁에서 패배하고 맺는 조약체결 방식에서도 중화질서는 아직 무너지지 않은 것입니다.
조선은 강화도조약을 맺은 이후 청일전쟁까지, 한편으로 중국과의 사대관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주권국가로서 서양국가들과 국교를 수립해야되는 양절(兩截)체제에 놓이게 됩니다. 이 때 다른 나라와의 국교수립은 중국이 종주국이라는 것을 꼭 인정을 해야하는 그런 어정쩡한 관계였습니다. 이러다가 청일전쟁으로 중국이 일본에 패하는 바람에 한반도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떨쳐버릴 수 있었고, 일본 덕에 (국제법상의) 주권을 회복할 수 있었지요. 물론 일본 입장에서는 이렇게 조선을 중국에서 분리시키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했습니다. 1905년 노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면서 조선은 이러한 형식상의 주권마저도 상실하게 되니까 실제로 주권을 가지고 있었던 기간은 정말 짧았다고 볼 수 있지요.
유석춘 : 동아시아에 자본주의 체제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일본의 존재입니다. 세계의 모든 지역이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식민지화되는데, 일본만은 스스로 제국주의로 탈바꿈하고 식민지 경영에 나섭니다. 일본과 유럽의 식민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일영 : 국가문제를 중심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반(半)중앙집권적인 봉건제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원래 봉건제는 분권적인데, 기묘하게도 반중앙집권적이며, 무사가 관료화된 봉건제였단 말이죠. 다시 말하면 아직은 완전한 중앙집권화를 이룩한 근대 국민국가가 탄생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일본이 유일하게 근대 국민국가화하는 데 성공했고, 나아가서 아(亞)제국주의로 성장했는데, 일본에서의 근대국민국가 형성과정은 어떠 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국가를 영토, 주권, 국민이라고 할 때, 국가가 만들어지려면, 두 가지가 꼭 있어야 됩니다. 하나는 중앙집권화(centralization), 즉 중앙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통해 대내적으로 주권이 확립되고 아울러 대외적으로도 주권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과정은 자기 영역(영토)의 확정을 동반하며 이것이 바로 국가형성(state building)의 과정입니다. 또 하나는 국민의 확장(extension), 즉 전통적인 신분적 장벽의 철폐를 통해 국민이 생겨나야 하는 것인데 이것이 곧 국민형성(nation building)이지요. 이렇게 국가형성(state building)과 국민형성(nation building)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국민국가’(nation state)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일본은 문호개방 이후 서구와의 불평등을 극복하고 주권회복을 위해 부국강병에 주력합니다. 내부적으로 폐번치현(廢藩置縣) 등의 조치들을 통해서 중앙집권화를 추진했고, 외부적으로는 서구 국가들과 맺었던 불평등조약의 개선을 통해 점차 대외적 주권도 확립합니다. 특히 일본은 중앙집권과 주권(sovereignty)의 확립을 통해 국가를 만드는 과정이 효율적이었습니다. 반면에 일본에서 국민의 확장(extension)은 불균형적으로 진행된 것 같습니다. 물론 전근대의 백성을 국민으로 만드는 과정은 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유럽의 역사에서 보듯이 처음 국민은 강제적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서 보듯, 불어를 쓰던 사람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독일어를 쓰라는 식으로 국민은 위로부터 창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는 소극적 의미이고 마음속으로부터 국민으로 만들지는 과정은 꽤 오래 걸립니다. 처음은 병역, 징세 등의 의무부과를 통해 만들어갑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주로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밀려 이들에게 참정권과 같은 권리가 주어지기 시작하고, 이것을 통해 보다 통합된 국민이 생겨납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국가가 복지서비스까지 제공하게 되면서 이들의 통합 정도는 거의 완성의 수준에 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일본의 경우에 대해서는 신민(臣民)이란 용어에 대한 이시다(石田)의 설명에서 많은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치자와 피치자가 있지 ‘신민’이란 어정쩡한 말은 안 썼다고 합니다. 군(君), 신(臣), 민(民)은 있지만, 신민은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일본의 근대화 추진자들은 조속히 근대국가를 만들고 부국강병을 추진하기 위해 중앙에서 권력을 틀어쥐어야 한다는 것과 급속한 근대적 권리의 부여를 통해 민(民)을 국민으로 만들어 가는 것 사이에 모순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용어가 “신민(臣民)”이라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국민을 만들어 가는 과제를 법적으로 신민, 천황폐하의 신민, 천황의 신민이라는 불완전한 과정으로 처리했던 것이지요. 결국 일본은 동아시아권에서, 비서구권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고, 국민국가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간 나라이지만, 그렇게 탄생한 국가가 서구적 의미에서의 정상적인 국민국가는 아니었습니다. 근대국가를 만드는 두 과정 사이의 불균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이 일본을 비정상적인 국민국가(abnormal nation state) 내지는 불구적인 국가로 만들었고, 이후 파시즘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중국은 근대화에 실패하고 반(半)식민지 상태로 전락합니다. 손문과 장개석 하에서 공화국이 생겨나니까 국민국가가 형성된 것 같지만, 정확하게 보면 장개석의 국가는 당국가(party state)였습니다. 물론 사회주의식의 당국가와는 조금 다름니다만, 어쨌든 서구적 기준에서 볼 때의 정상국가(normal state)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지요. 이러한 당 국가(party state)가 그 후 모택동의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로 넘어가 버리는 상당히 기묘한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조선은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하고, 10년 정도 형식적 주권을 누리다가 식민지화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도진순 : 국민국가의 개념을 엄격히 적용하고자 하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뒤늦게 근대화과정에서 참여하는 후발국가의 현실적 처지를 경시하는 것 같습니다. 후발 아시아에서 근대화가 과연 서구와 같은 ‘정상적 코스’로 가능하였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국민국가의 중요성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욱이 ‘네이션’(nation) 개념은 이 자리에서 길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아시아에서 서구와 많은 차이를 보여 줍니다. 중국의 경우 저 옛날부터 자신들을 이족(夷族)문화와 구분하였으며, 명나라 같은 경우는 ‘한족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 슬로건이었죠. 즉 내부의 민주화 정도는 다르지만, 외부와의 문화•민족적 차이에 대한 인식은 매우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고, 때로는 건국의 슬로건이 되곤 하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 국가(state)의 장벽도 동북아시아와 서양은 다릅니다. 유럽에서는 유로패쓰 하나면 여러 나라를 마음대로 왔다갔다할 수 있지만, 중국이나 몽골의 국경을 넘는데는 엄격한 절차와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의 세계화과정에서 국가의 역할 또한 아시아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컨대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같은 경우 결코 선진적인 모범은 아니지만, 자국의 전통과 가치를 세계화와 생산적으로 접합시키는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컨대 아시아에서는 전통시기에도, 근대화시기에도, 세계화시기에도 네이션이나 스테이트 문제가 서양과 많은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때문에 서구와 비교하기 전에 주변 아시아와 비교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말에 왜 좬월남 망국사좭라는 책이 많이 읽혔는가 하면, 청불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고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자, 다음 차례는 조선이라는 위기감이 고조되기 때문이거든요. 언제부터인가 아시아와의 비교가 우리에게 유실되었다는 점을 반성해야 합니다.
김일영 : 두 가지 한계를 인정합니다. 하나는 서구적 기준을 가지고 얘기를 한 것과, 사회 저변의 움직임을 논외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한•중•일을 볼 때, 근대화를 위해 중앙집권화를 해야한다는 절박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인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국가 차원의 얘기를 꺼냈고 아래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논외로 한 것입니다. 중앙집권화라는 측면에는 세 나라를 비교한다면, 어떤 방식이든 간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 이루어냈느냐의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중국과 조선은 겉으로는 매우 중앙집권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실패하고 있습니다.
최원식 : 일본이 중앙집권화와 주권은 효율적으로 달성했지만 국민형성에 불균형을 보였고, 결국 불구 국가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설명에 한 가지 토를 달겠습니다. 페리에 의해 강제 개국함으로써 제약된 일본의 주권이 청일전쟁•러일전쟁을 고비로 어느 정도 불평등에서 벗어났다고 봅니다만, 일본의 주권은 근본적으로는 항상 위기에 처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메이지 이래 지금까지 일본의 비원은 자주 독립”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미국의 강력한 우산 아래 있지 않습니까? 서구의 압도적 현전성(現前性) 앞에서 일본의 주권을 보전하기 위해서 일본은 침략의 길을 달려왔습니다. 조선침략, 만주침략, 중국침략, 태평양전쟁으로 확산되어 갔던 것이 일본적 주권을 보위, 확립해 가는 과정이란 점에도 주의해야 합니다. 일본이 근대 이전에도 서구 자본주의와 일찍 접촉하고 상업이 발달하는데, 이른 접속으로 일본이 상대적인 우위를 가지긴 했지만, 서구자본에 비하면 역시 후발국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일본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서 조선은 사활적 이해가 걸린 지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후발국인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했다는 조건이 이후 동아시아의 주요한 변수였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해방 직후에 임화는 “일제의 조선지배는 마치 근대적 식민지라기보다는 고대 국가의 정복이었다”고 했는데 이와 같이 후발국 일본에 식민지화됨으로써 한국민중에 가해지는 억압은 엄청났던 거예요. 그렇게 실력이 모자라는 상태에서 식민지를 경영한데다, 조선은 버거운 상대라 일본의 억압성은 더욱 강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자본주의의 후발성이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경영과 달리 식민지 조선의 공업화라는 기묘한 효과를 산출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개발도 효율적 수탈을 위해서지만 말입니다. 영국이나 미국은 식민지를 그야말로 식량공급기지, 자원공급기지, 상품소비시장으로서 모노컬춰로만 키웠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30년대 이후 일본 독점자본이 진출하면서 식민지 공업화가 진행됩니다. 일본 자본의 후발성이라는 운명이 한국 등 일본이 점유했던 지역에 독립 이후까지 이어지는 흥미로운 흔적을 남긴 것입니다.
도진순 : 우선 일본식민지를 영국 이나 미국 등의 식민지와 비교할 때 몇 가지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같은 제국주의 같은 식민주의’라는 공통점이 유실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한국은 일본 단독이라기보다는 미국•영국과의 협의와 협상에 의해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또한 식민 청산의 과제도 단지 ‘일본과 친한 친일파’가 아니라 ‘제국의 이해를 대변한 식민주의자’의 문제가 되어야 근원적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다음, 1980년대 중반 경부터 아시아의 ‘네 마리 용’ 등이 언급되면서, 일본의 식민지가 근대화를 촉진하였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이 풍미한 적 있습니다. 최근 IMF 위기를 맞으면서 이러한 논의는 조금 위축된 듯한데, 거꾸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이나 싱가포르가 위기를 피해갔기 때문에 더 선진적으로 근대화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죠. 아무튼 식민지 근대화론은 매우 현세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 1930년대 초중반 식민지 조선이 상당부분 산업화되고 자본주의적 관계가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의 동력이 자생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당시의 경제발전은 일본의 대륙 진출과 만주 특수 등과 결합된 외부적인 동력에 의한 것이었고, 때문에 그 생명력 또한 1940년대에 들어가면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어야 하는 자연경제적 상황으로 신속하게 몰락합니다.
식민지의 경제발전에 대한 논의는 꽤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20년대 초반 인도의 경제발전을 어떻게 독해하는가에 대한 코민테른의 대논쟁 같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 문제의 쟁점은 ‘식민지도 근대화된다’인가 아니면 ‘근대화되어도 식민지이다’로 요약할 수 있는데, 저의 결론의 후자입니다. 이 문제는 레토릭이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과학의 문제입니다. ‘식민지도 근대화된다’는 사고는 식민지를 자본주의의 옆에다 둡니다. 여기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분별되지 않으며, 여기서 자본주의의 선진성에만 주목하는 근대주의의 결함이나, 거꾸로 계급문제만 강조하는 좌경성이 나타납니다. 세계를 ‘개화-반개화-야만’으로 규정한 것이 근대주의의 한 결함이라면, 부르주아민족주의와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사학을 구분하지 못한 초기 좌경 지식인의 인식은 좌경주의적 결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지배가 이러저러한 특징을 지니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의 경제발전을 규정지을 수 있는 주변수는 되지 않으며, 기본적으로 제국주의적 수탈성을 지닌 것입니다. 60년대부터 경제 발전은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지 15년이나 지난 이후의 일이며, 그것은 오히려 또다른 외인, 즉 미국의 냉전적 동북아 정책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김일영 : 일본이 항상적으로 주권을 위협받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시기에도 일본이 형식상으로 주권을 회복한 듯 하면서도 여전히 쫓겼던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일본의 근대화는 프러시아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방어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방어적이란 말은 일본이 세계무대에서 경쟁에 뒤지면 곧 다시 주권을 잃을 수 있다는 절박함에서 오는 표현입니다. 주권회복을 위한 부국강병, 방어적 근대화가 주변국들에게는 때 이른(premature) 식민지개척 그리고 전쟁도발로 나아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가 유래 없는 약탈성을 띠게 된 것도 이러한 조숙성과 관련이 있겠지요.
그리고 저는 식민모국과 피식민지국 간의 지리적 인접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아일랜드 식민지화를 빼고는 인접국가를 식민지화한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인도에서 영국은 공업화를 진행시켰는데, 일본이 한국에 와서 한 공업화는 성격이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일본은 30년대 한국에서 중공업까지 일으켰습니다. 만주 침략을 위한 것이지만, 식민지에 중공업을 일으켜 놓은 예는 거의 없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지리적 인접성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조선을 생각하는 것과 영국이 머나먼 인도를 생각하는 것은 조금 달랐을 것 같아요. 영국은 인도를 언젠가는 떨어져 나갈 곳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일본은 한국을 36년간 지배하면서 완전히 일본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고 식민지배를 한 것 같아요. 중화학 공업을 일으킨 이유 중에 하나가 장기적으로 지리적 인접성 면에서 볼 때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토지조사사업 당시 땅에 박아놓은 측량 기준표식을 아직도 쓸 수 있을 정도라고 하는데, 이러한 철저성도 한편으로는 일본인들의 민족성에서 기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 나라를 측량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인접성에서 오는 식민정책의 독특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다른 차원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일본의 부국강병은 메이지 이후에 부각되지만 1930년대에야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의 원형이 만들어졌지, 메이지 시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찰머스 존슨(C. Johnson)은 통산성(MITI) 연구를 통해 일본에서 발전국가의 원형을 1930년대로 찾고 있어요. 물론 일본 내에서 전전과 전후간의 관계를 연속으로 보느냐 불연속으로 보느냐를 둘러싸고 학자들간에 논쟁이 있습니다만, 저는 존슨이나 1940년대 체제를 말하는 노구치(野口)의 주장에 동조하고 싶습니다.
어쨌든 저는 이 논쟁을 한국에 적용시켜 볼 때, 우리도 60년대 이후 등장한 발전국가의 원형을 30년대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1930년대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이룩했던 경제성과를 이어받아 우리가 해방 후에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식으로 비약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제가 뜻하는 것은 단지 모델로서의 의미인데, 1930년대 일본에 발전국가의 원형이 만들어지고, 만주와 조선에서도 유사한 모델이 시행이 되었다는 점이죠. 당시 일본은 정책적인 여러 실험을 일본이 아닌 만주국에서 우선 시행해 보고, 모국으로 역수입했다고 합니다. 흔히 일본과 조선에 관한 연구에서 만주는 잘 고려되지 않았는데, 만주는 중요한 연구대상입니다. 간단히 인적인 커넥션을 고려해보더라도 1930, 4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던 박정희, 김일성, 최규하 등이 당시 일본이 만주에서 했던 많은 실험들 특히 발전국가 모델의 실험 등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해방이후 정치적 리더였던 이들이 1950-60년대 북한의 경제발전과 1960년대 이후 남한의 경제발전을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이러한 경험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보면, 상당히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만주가 부상하게 되고, 일본, 조선, 만주로 이어지는 커넥션의 분석이 30년대와 60년대간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관건이 될 듯 합니다.
그리고 남북한을 비교할 때 이 지점에서 뭔가 찾아낼 수 있다고 봅니다. 1930-40년대 남북한의 리더들이 어떤 경험을 했느냐가 해방 후 두 나라의 발전방향과 관련해서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와다(和田)가 북한을 ‘유격대 국가’라고 표현하는데 타당성이 있다고 봅니다. 북한 지도부의 정신세계에서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본 대신 미국이 자신들을 재(再)식민화 하려 한다는 위기 내지는 피해의식 상태가 지속되어 왔습니다. 마치 일본이 항상적인 주권위기 상태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특히 70년대 이후에 남북한의 경제력이 역전이 되면서 이런 의식은 더욱 강화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유격대 국가의 원형은 1930-40년대에 찾아집니다. 1960년대 이후 남쪽 지도층도 만주에서 군대 경험을 하면서 세계관, 경제관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이 60년대 이후 그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다시 나타난 것이지요. 인적 커넥션 면에서도 일본과의 관계가 부활되는데, 예컨대 기시(岸信) 같은 일본의 만주인맥의 대부가 한일관계를 맺어주는 데 앞장을 서는 모습에서도 볼 수 있지요.
유석춘 : 이미 지금 말씀하시는 내용들이 식민지와 탈식민지의 연계 혹은 연속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의 주제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보다 본격적으로 토론해 주시지요.
도진순 그것은 부루스 커밍스 등도 언급한 바 있는 내용이지만 상당히 논쟁적인 것이며 어쩌면 본질을 전도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1930년대의 경험이 현재의 남북관계로까지 확대되면 일제의 만주정책에 호응한 쪽은 발전국가형의 유형이 되고, 거기에 반발했던 부분은 몰락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저는 오히려 비슷한 것은 외인(外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30년대 후반 한반도 북부의 공업화가 만주전쟁이라는 열전과 상당히 관계가 있다고 했는데, 60년대 한반도 남부의 공업화는 미국의 동북아 냉전정책과 상당한 관련이 있습니다. 1950년대 북한과 제3세계의 경제적 발전과 국제사회의 세력화에 대처하기 위해, 1960년대 미국은 제3세계에 한손에는 빵을, 다른 한손에는 ‘의사 민족주의’라고 하는 이데올로기를 활용합니다. 이리하여 아시아에서 소위 발전국가라고 하는 것들이 묘하게도 미국의 초생달 방어선과 일치합니다.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 태국의 군부 정권,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권, 한국의 박정희 정권 등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등장합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냉전이 대체로 내부의 계급적 문제 정도인데 비해, 당시 아시아에는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 세계 최대인구의 중국, 당시 열전 중인 베트남 등이 관련되는 중차대한 위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에 미국와 일본은 이중헤게모니 전략으로 안보와 경제발전을 분업적으로 담당하여, 아시아는 40년간 세계 어느 곳에서도 누리지 못한 지원과 선진시장으로부터 보호받았습니다. 이것이 경제적 약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베트남전 종전, 중국과 미국의 수교, 소련의 붕괴 등에 따라 각국마다 냉전적 위상이 변화하였고, 냉전이 단계적으로 해체되면서 한편으로 민주화과정, 다른 한편으로 선진 세계시장에의 개방에 따른 경제적 위기를 겪었습니다.
1960년대의 경제발전에 1930년대의 경험을 활용하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인맥도 그러한 점이 있고, 농촌진흥운동이 새마을운동으로 활용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30년대가 60년대를 낳은 것은 결코 아니고, 거꾸로 60년대가 30년대를 활용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입니다. 더욱이 이것을 남북문제로까지 연결하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많습니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현재 한반도 문제에서 정치군사적인 문제와 경제적인 측면의 위상을 면밀하게 비교 검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경제적으로 몇 배나 부강한데, 우리는 사실상의 두 국가를 인정하는 국가 연합을 주장을 하고, 북한은 일국 연방제를 주장합니다. 여기서는 경제보다는 주한미군이라는 정치군사적 문제가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경제면만 보더라고 40-60년대가 북한이, 70-90년대 남한이 경제발전을 하였는데, 이것으로 게임이 끝났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중국의 경우를 보면 미국과 수교하는 70년대 10년, 내부 정비에 10년, 그후 20년간 두 자리 수 경제성장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북한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아직도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경제는 외풍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1930년대 경제적으로 발전하였다가 40년대 자연경제로 후퇴하였으며, 60-90년대 경제발전 이후 IMF 위기를 맞았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남북 승패론이 아니라 탈냉전 세계시장에 대한 준비일 것입니다.
최원식 : 김일영 선생은 60년대 이후 한국의 공업화가 30년대 만주의 실험을 배경으로 삼았다고 하고, 도진순 선생은 50년대 북한을 비롯한 제3세계의 사회주의권의 약진에 대응하려는 케네디의 냉전의 띠가 60년대의 공업화에 관련된다고 하시는데, 저는 두 의견을 통합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차대전 이전에는 서구자본이 일본을 앞잡이로 삼아 동아시아를 자본주의적 개발을 수행하다가 일본이 서구에 도전하는 사태에 직면하여 전후에는 미국의 주도 아래 직접지배하는 방식으로 돌아서지만, 중국혁명의 성공(1949)을 계기로 그에 대한 대항마로 다시 일본자본을 부양하지 않습니까? 일본 자본주의가 일정한 부흥에 도달하자 미국은 다시 일본을 앞잡이로 내세우는 전전의 방식으로 회귀하였습니다. 이 점에서 미국의 후원 아래 그리고 일본과의 직접적 제휴 아래 추진된 60년대 이후 남한의 공업화는 두 요인의 합작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맥코맥이 만주국에 대해서 쓴 글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는데, 만주국이라는 게 일본의 중국침략을 위한 전초로서 만들어진 괴뢰국이지만, 한편 새로운 사회를 실험하는 이상국가적인 측면이 있었다는 거지요. ‘오족협화’(五族協和)니 뭐 이런 게, 물론 다 실제로는 침략의 변증으로 타락하고 말았지만, 원래는 나름의 이상주의를 내장했다는 겁니다. 만철(滿鐵) 조사부라는 데는 이를 추진하기 위한 일종의 싱크탱크(think tank)인데, 개중에는 일본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어, 일정한 타협 아래일망정 만주에서 새 길을 추구했던 맑스주의자들도 끼어있대요. 그게 바로 전후 일본과 한국에서 이른바 근대화를 추진한 만철인맥입니다. 이 점에서 일본에서 실험할 수 없는 것을 만주에서 실험을 해서 식민지 조선에서 추진했다는 김 선생 얘기는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만주에서 활동한 항일세력은 해방 후 북한의 지도부로, 만주국 지배체제에 편입되었던 친일세력은 남한의 지도부로 60년대 공업화의 추진자들이 되어 남북한이 대립적 경쟁을 했다는 지적은 매우 날카롭지만 저는 대립되는 측면이 있으면서 동시에 어떤 점에서는 또 공통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항세력이 그 대상과 어느 틈에 닮아가는 측면이 있듯이. 북한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남북한은 적대적이면서 상호의존적입니다. 어쩌면 공통점이 더 많을 수도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20세기 사회주의 실험이라는 것이 사회주의 이름을 빌었지만 사실은 ‘근대 따라잡기’라는 측면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북한의 식량위기에 이어 남한의 금융위기가 병발한 것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일본모델에 바탕을 둔 남북한 공업화의 방식, 그 유효성이 거의 거덜난 개발독재 모델을 넘어설 새로운 엔진에 대한 재설계가 절실합니다.
김일영 : 이런 점에서도 유사합니다. 앞에서 후발 산업화 국가가 대개 방어적 근대화의 성격을 띤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점은 북한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 대한 두려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미국이 일본과 남한을 앞세워서 북한을 포위해온다는 위기감 등에서 나타나는 방어적 성격인데, 이러한 방어적 산업화의 큰 특징이 중화학공업을 조숙하게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남북한이 동일하지요. 그리고 남북한의 지도자가 모두 군인 출신이라는 점도 산업화 추진방식 면에서 유사성을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리더쉽 스타일 면에서도 김일성과 박정희는 상당히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야전군 사령관(commander)스타일입니다. 이 점은 두 사람이 다 현장에서 가서 직접 지시하고 지도하고 확인하는 현장지휘관 스타일이라는 점입니다.
도진순 : 식민지 조선이 국민국가라는 범주로 분석하기 힘들 듯이 현재의 남북 분단 상황을 일반적인 국민국가론으로 이해하기는 곤란합니다.
유석춘 : 그렇다면 식민지시대와 탈식민지시대는 별 차이가 없다는 말씀인가요.
도진순 : 아니어요.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 우선 공통성에 대해서 너무나 주목을 안 하기 때문에 얘기를 좀더 하겠습니다. 우리는 1948년 유엔에 등록될 때에도 National State라는 표현을 얻지 못하였고, 한국전쟁 당시 이북을 점령하였을 때에도 우리가 직접 통치한 것이 아니라 유엔사령부가 통치하였습니다. 아까 김 교수가 일본에 National State란 개념을 엄격히 적용하여 언급하였는데, 그런 각도에서 우리의 구체성•특수성도 분석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황을 분석하고 예측하는데 여러 가지 실수를 하게 된다는 것이죠.
예컨대 세계적으로 냉전해체가 됐는데 왜 한반도에는 아직 해체되지 않은가라는 문제를 다룰 때, 대체로 국민국가 일반론으로 접근하면서 남북 자체의 적대적 공존으로 결론 내립니다. 그러나 현재 목도하다시피 한반도의 냉전은 북미간의 적대관계 미청산이 핵심입니다. 즉 정전협정으로 대표되는 남한•북한이 미국과 지니는 특수관계를 놓치면, 냉전이 한반도 내부 때문이 아니라 외부와의 관계에서 비롯되었고 아직 유지되고 있는 엄연한 측면을 놓치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것은 남북관계를 보는 데에도 적용됩니다. 남북관계의 역사를 보면, 중요한 특징이 단층적이다는 것이어요. 이것은 남북관계가 대미관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도 남북관계의 역사적 진전의 연장선상이 아니라, 미국 부시행정부의 소련과의 협상, 동북아 및 한반도에서 핵무기 철수 등을 경유하여 한반도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최원식 : 남북문제는 물론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해결에서 미국이 핵심적이라는 말, 또한 동감입니다. 한반도를 비롯해서 동아시아 정세가 이처럼 복잡한 양상을 띠는 것도 기본적으로 서구자본주의, 특히 미국의 압도적 현전성(現前性)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미국이 변해라, 일본도 변해라, 하고 규탄하고 탄식하고 애원해서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란 말이죠. 남북관계를 제대로 풀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분단을 축으로 대립과 분쟁을 거듭해온 동아시아의 불안정성이 해소되는 데에서 그 단초가 마련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동아시아 전체의 변화, 기존의 냉전시대의 동아시아관계로부터 탈냉전시대의 동아시아의 근사한 관계로 연착륙이 이루어지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연착륙이 분단체제의 변혁을 통한 미국의 압도적 현전성을 극복할 전망을 줍니다. 이 점에서 한반도, 특히 남한 민중의 성숙한 자각과 지혜로운 실천이 절실합니다.
유석춘 : 지금 토론하시는 맥락과 연관지어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의 문제로 넘어 가기로 하겠습니다. 탈식민지 시대에는 한 중 일 세 나라의 관계가 그리고 한반도의 남북관계가 글로벌한 자본주의와 어떤 관련을 맺고 움직일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최근 우리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개입과 같은 위기를 겪으면서 영미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아시아권의 경제공동체 예를 들면 아시아통화기금(AMF)의 설치와 같은 가능성을 일부에서는 논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아시아적 가치’의 보편화 문제를 주장하는 입장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연 아시아의 가치는 독재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수단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우리의 대안 가운데 하나로 검토될 수 있는 실체를 가진 것인지 등의 문제를 토론해 주시지요.
김일영 : 탈식민지시대의 동아시아와 남북한관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정부수립 이후에 100% 완전한 국민국가가 아니었다는데 대해 저도 동의를 합니다. 우선 1948년 12월에 유엔에서 한국을 승인할 때, 우리를 한반도 전체의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한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 외에도 군사적인 면에서 작전지휘권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제약 당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시점에서 남북간의 문제를 잘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손국가라는 입장에서 풀어 나가야 할지, 아니면 100% 완전한 국민국가는 아니더라도 전세계의 많은 국가들과 수교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법상 국민국가로 인정하고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할까요. 저는 후자의 생각입니다.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남한은 전혀 하자가 없는 국민국가이지요. 북한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국민국가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문제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북한이 취하고 있듯이 남한은 휴전협정에 서명도 안 했으니까 남한하고는 얘기할 필요가 없고, 미국과 직접 얘기하겠다는 식의 태도는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약간의 결손된 측면이 있겠지만, 그 동안 남북한이 실질적으로 국민국가로 살아왔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도진순 : 처음에 몽골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우리시대의 먼 후대가 볼 때 지금의 우리들을 어떻게 평가할지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반드시 말씀드리고 싶은 문제 몇 가지를 언급하겠습니다. 하나는 한반도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한•북한•미국의 삼각관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관계를 무시하고 자본주의 세계체제로 바로 연결시키는 것은 경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한반도에서 21세기의 첫 화두는 아시아 지역문제이나 문명 일반, 또는 자본주의세계체제 등이 아니고 처음 언급했던 삼각관계의 조정이라는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다음의 문제는 ‘아시아성’이라 할 수 있는데, 먼저 아시아의 경제적 발전은 미국의 냉전방어선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은 이미 지적했습니다. 때문에 아시아성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아시아에 압도적인 힘을 구사하고 있는 서구의 힘을 일단 직시해야 합니다. 이러한 냉전적 보호가 해체되고 선진세계시장에 개방되면서 몇몇 나라는 IMF위기를 겪었고요. 그런데 대만의 경우 1996년 양안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국제자본이 빠져나가는 경험을 통해 IMF 위기를 극복하는 면역력을 길렀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우리도 냉전적 보호나 특혜가 제거되는 그런 상황에 대해서도 미리 준비를 해야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아시아를 이야기할 때 유럽하고 달리 수직적 패권이 자주 행사되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중국의 전통적인 패권 행사도 문제이지만, 근대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은 아시아성을 언급하지만 실질적인 내용은 아시아지배이거든요. 이처럼 서구적 힘의 실체를 직시하여 대응하고 서로 간의 수평성이 확보된다면, 아시아는 세계 최고의 다양한 민족•문화•종교 등으로 다원성의 잠재력이 거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최원식 : 도 선생이 말씀하셨듯이 삼각관계를 제대로 풀기 위해서는 미국의 아태적 현전성을 충분히 인정하여야 합니다. 남북한의 현재상태를 현상으로 접수함으로써 출발하자는 김 선생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온전한 국민국가의 상정은 조금 재고하는 것이 어떨지요. 사실 온전한 국민국가라는 이념형에 놓고 보면 세상에 그런 나라가 거의 없지요. 우리가 맨날 프랑스 시민혁명을 모델로 상정하여 한국은 진정한 의미의 시민혁명이 부재했다고 논의를 펼쳐서, 뭐가 부족하고 뭐가 결여되고 따지는데 그런 혁명은 프랑스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념형적 설정이 문제예요. 거기서 엉터리 보편주의가 둥지를 틀곤 합니다. 김 선생이 말씀하신 대로 남북한의 현상황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지금 큰 변화의 징조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지역화와 지구화, 이 변화를 물론 자본의 전지구화 현상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이지만 또 크게 보면 구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이루어질 대동세계라는 인류의 이상으로 가는 중요한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괴테는 일찍이 ‘세계문학’론을 제기했는데, 국민문학을 넘어서는 세계문학, 진정한 세계문학을 건설하기 위한 지식인들의 초국적인 운동을 설정했거든요, 그런 점에서도 저는 남북문제를 구시대적 국민국가로의 통일이라는 잣대로는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그런 면에서 국가연합을 과도적인 것이 아니라 최종형태로도 상정할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실제로는 두 국가로 나누어져 있다가 다시 그냥 하나로 된다는 것이 과연 좋은 건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통일 왜 하냐’는 물음도 곤란하지만, 온전한 국민국가로의 통일론도 재고했으면 합니다. 현실적으로도 그런 통일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 같아요.
분단이 국제적 요인에 더 의존하고 있어서 분단의 해소도 국제적인 협력이 없이는 해결이 난망입니다. 이런 점에서 삼각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동아시아, 한 중 일 이 세나라 관계에서 뭔가 의미있는 변화가 일어나야 하고 그 변화를 추동할 우리의 성숙한 자세를 가다듬을 때입니다. 동아시아가 풀리면 한반도 문제도 풀리고 결국 동아시아에서 차지하고 있는 미국의 압도적 현전성의 지위에도 중요한 변화가 오리라고 전망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저는 아시아적 가치, 아시아 모델이 IMF로 끝났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또 마하티르식으로 ‘무조건 옳다’라는 것도 반대하지만. 동아시아의 20세기는 온갖 이데올로기의 비극적 실험실이었습니다. 자본주의도 실험되고, 사회주의도 실험되고, 동아시아형 사회주의(마오주의, 주체사상)도 실험되고 동아시아형 자본주의(일본, 대만, 남한)도 실험되었는데 이런 실험들이 제가 보기에는 이제 임계점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젠 아시아 모델 추구를 포기하고 서구모델에 일방적으로 적응만이 남았는가.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아시아의 전통적 지혜와 그 동안의 중난한 역사적 경험, 그 속에서 뭔가 동아시아적 대안을 만드는 노력 없이 우리문제도 제대로 풀 수 없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해야지만 뭔가 서쪽의 도(道)가 쇠진한 이 시대에 한국 또는 동아시아가 세계에 독특하게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유석춘 : 세 나라가 허심탄회하게 여러 가지 수준에서 학술적인 면도 그렇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서로 좀 대화도 하고 대안을 같이 모색해 보는 그런 게 필요한데 현실은 ‘일본의 우경화’와 ‘중국의 패권주의’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두 국가의 이러한 틈바구니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문제를 얘기해 주십시오.
김일영 : 지금 동아시아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상을 보면, 조금 단순화시킨다면, APEC과 ASEAN이 경쟁관계에 있는 걸로 여겨집니다. 미국은 사실 전통적으로 대서양국가로 스스로를 규정해 왔습니다. 그런데 20세기말로 오면서 아시아쪽의 몫이 자꾸만 커지니까 미국은 태평양쪽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자신을 태평양 연안국가라고 강조하기 시작했지요. APEC은 미국이 태평양 연안국가로서 아시아에 대한 발언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서 미국 말을 가장 잘 들어주고 있는 나라가 한국과 호주이지요.
반면에 ASEAN은 1960년대 후반 미국이 동남아 지역통합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는 아시아의 입장을 강조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이럴 경우 미국은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의 뒤에는 일본의 입김이 강합니다. 마하티르가 아시아의 가치와 이해를 주장하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일본의 후견 하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구요. 결국에는 APEC과 ASEAN이 아시아의 향방을 둘러싸고 암암리에 맞서는 형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재는 탈냉전 이후 중국이라는 변수가 새로 등장하여 양쪽에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할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고, 북한은 이 모두에서 전혀 끼지 못하고 자의반 타의반 배제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이러한 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국제투기자본의 농간이라는 얘기가 나오면서 일본 쪽에서 우리가 언제까지 IMF에 당해야만 하는가, 우리도 동아시아에 그와 유사한 조직체, AMF를 한번 만들면 어떻겠느냐라는 이야기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동안 일본이 보여준 행실이 여타 아시아 국가들에게 별로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AMF에 대해 경계를 품는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을 한다면 이제는 고려해 볼만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아시아적 가치에 대해 말씀드려 보지요. 저는 당위성의 측면이나 사상적 측면에서는 아시아적 가치와 농경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났던 가치가 어떻게 다른지가 해명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서는 그 보다도 사회과학에서의 설명의 차원, 즉 인과성의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보고 싶습니다. 이 차원에서 저는 아시아적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고 봐요. 그러나 아시아적 가치를 직접적으로 경제발전문제하고 연관시키는 것은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문화라고 하는 요인은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마술과 같은 요인인데, 그걸 직접적으로 경제문제와 연관시키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고 우리가 중간에다가 많은 매개항(예컨대 기업조직과 같은)을 설정해서 인과적 설명에 끌어들이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유교적 문화와 기업조직이나 기업경영스타일을 연결시키는 것 등이 그 좋은 예지요. 저는 유교 문화와 경제발전 사이에 국가의 성격을 중간 매개항으로 넣을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특히 한국, 북한, 중국, 일본 등의 동아시아 전체에서 유교와 강성국가(strong state) 사이에 상당한 친화성을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강성국가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강성국가는 대개의 경우 권위주의체제입니다. 그런데 권위주의 중에는 발전적 권위주의도 있고 그렇지 못한 그냥 권위주의도 있을 수 있거든요. 이중 경제발전과 관련이 되는 것은 주로 발전적 권위주의체제입니다. 단순한 권위주의는 오히려 경제적 정체와 관련이 될 수도 있겠지요.
도진순 : 저는 문제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한반도와 주변 열강에서 출발하여 아시아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최 교수님 말씀하신 대로 주변 열강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한두 가지를 추가한다면, 먼저 한반도가 강할 때 동아시아에서 해양패권이든, 대륙패권이든 일방성이 저지되고 균형이 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동북아시아에서는 탈냉전 이후 국가가 강화되고 군사비가 올라가는 등의 현실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 문제는 미국의 위상입니다. 정전협정의 당사국인 미국은 남북 모두와 깊은 관계에 있으므로, 열강이라는 다수의 무리군과는 준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미국을 무조건 배척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한반도의 21세기에서 미국은 여전히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이나 서구를 볼 때 선진적이라 평가할 수 있는 것, 우리와는 다른 것이라는 보아야 할 부분, 침략 내지 패권에 해당하는 경우 등 세 가지를 잘 분간해내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성 또는 아시아적 가치에 대해 말씀드리면, 이를 위한 1차적인 과제는 아시아에 있는 미국과 서구의 힘의 실체를 직시하고 수평성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와 전통 중에서 세계적 가치의 발판을 만들어내어야 할 것입니다. 중국에서 범봉건성(泛封建性)논쟁이 있었는데, 이것은 ‘봉건 시절에 있었던 것은 전부 봉건적이다’라고 해서 역사에 대한 청산주의•타도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유교에는 봉건적인 교리도 있고, 그야말로 미풍양속으로 교화하는 문명이나 공동체정신 이런 것도 분명히 있습니다. 어느 하나 때문에 다른 하나까지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통적인 것 그리고 아시아적인 것을 21세기 세계에 통용될 수 있는 것으로 주체적으로 재창조하는 것이지, 과거 무엇을 단순히 복원하거나, 우리 것을 모두 버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유석춘 : 장시간 말씀을 해주셨는데 마무리하는 작업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꼭 추가해서 말씀하실 내용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이미 상당히 긴 분량의 토론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간단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원식 : 오늘 많이 배웠습니다. 아까 김 선생이 아시아적 가치가 스트롱 스테이트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정확한 지적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동아시아 나라들에서 보이는 부국강병의 대국주의적 지향에 대해서 제대로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중국과 일본의 대국주의, 이 와중에 북한도 ‘강성대국’, 역시 대국주의를 표방하고 있는데, 한국 마저 부국강병주의를 그대로 밀고 나가서는 역내의 평화, 역내의 균형이 파열될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 부국강병주의에 대한 반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적 가치를 부국강병주의와 연결시켰는데, 사실 왕도를 지향하는 유교는 소국주의거든요. ‘소국과민’을 이상으로 삼는 도가는 물론 소국주의지요. 그런 면에서도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진정한 재해석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먼저 남한의 지식인들이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재해석을 통한 한반도 통일 논의를 새로이 가다듬고, 창조적인 아시아 모델을 근사하게 만들어나가는 토론들을 벌여 그것을 바탕으로 일본과 중국 지식인들을 설득하고 이렇게 해서 지혜를 공유하는 국내외적 토론을 확충하는 작업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이 난국을 헤쳐갈 우리의 자각이 절실한 때입니다.
유석춘 : 유교는 소국주의적인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는 말씀을 들으니 소국주의가 세계화시대에 과연 살아 남을 수 있을까하는 의심이 듭니다. 세계화라는 게 무제한의 경쟁을 지향하는 건데.
최원식 : 아니 그냥 소국주의로 가자는 게 아닙니다. 우리 나라가 이미 소국주의를 하려고 해도 세계체제 안에서의 위치 때문에 소국주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상당한 규모의 나라 아니예요. 저의 주장은 대국주의를 반성하자는 것입니다. 실제로 금융위기로 그 동안의 대국주의 지향의 개발독재 모델이 일정한 파탄에 처하기도 했구요. 그래서 저는 언젠가 ‘대국주의와 소국주의 긴장’이란 표현을 썼는데, 대국도 소국도 아닌 중형국가(中型國家)로 나아가는 게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근대에 제대로 잘 적응을 하고, 그런데 무조건 적응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할 준비를 하는 작업을 동시에 밀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작업에서 아시아적 가치의 재창안, 재창조가 절실한 겁니다.
김일영 : 제가 아까 유교하고 발전을 직접 연결시키지 말자고 했는데, 그것은 유교가 소극주의를 지향했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유교와 부국강병은 거리가 있습니다. 유교사회적 지향은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면서 그 사회가 단순재생산을 가능할 정도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죠. 따라서 유교에서 발전을 직접 끌어내려면 상당히 곤란한 인과적 문제에 봉착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유교사회에서 나타나는 국가는 강한 국가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유교와 강한 국가 사이에 상당한 친화성이 있는데, 문제는 그걸 둘러싸고 있는 조건이 농업사회적 조건인가 산업사회적 조건인가, 그리고 산업사회적 조건에서도 그것이 시장과 조우했는가 아니면 계획(planning)하고 만났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바로 이런 조건의 차이를 우리가 고려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교, 강한 국가, 시장 또는 계획 사이의 콤비네이션이 낳는 결과의 차이를 인과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도진순 : 시작하기 전에 최 교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만, 몽고에서는 우리 나라를 솔롱고스(solongos) 즉 ‘무지개 나라’라고 한답니다. 저 옛날 실크로드의 험로를 통해온 이슬람 상인들도 우리 나라를 ‘대륙 동단의 이상향’이라 하였고, 신라•고구려•고려•조선 등 우리 나라의 국호에도 모두 ‘아름답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의 역사는 사대•식민•분단•전쟁의 상처가 있었으며, 이에는 지식인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됩니다. 21세기에는 평화 통일이 성취되어, 한반도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이것이 아시아의 균형 발전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한 아시아는 세계 어느 곳보다 다양한 인종•종교•문화 등이 병존하였는데, 근대 세계이후 식민문화로 일색화 되기도 하였습니다. 21세기 아시아는 서구적 일색화에서 벗어나 본래의 다양성을 회복하고, 그것이 또한 세계문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유석춘 : 토론을 마무리하면서 저도 마지막으로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제가 토론의 마지막 주제로 ‘아시아적 가치와 아시아적 제도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시아적 ‘가치’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토론이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제도’ 차원에서는 토론이 활성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만약 자본주의와 아시아적 가치가 결합할 수 있다면 자본주의와 아시아적 제도도 마찬가지로 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재벌’이나 대만의 ‘가족기업’ 중국의 ‘향진(鄕鎭)기업’ 일본의 ‘게이레츠’(系列) 혹은 동남아의 ‘화인 네트워크’ 등이 좋은 예가 되지요.
이러한 기업조직의 방식을 두고 서구에서는 일종의 ‘정실주의’(cronyism)라고 폄하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최근의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들 기업조직은 살아남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대우가 해체된 것을 두고 마치 재벌 전체를 해체한 것인 양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저는 단지 하나의 재벌이 해체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재벌은 거의 대부분 살아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과거에도 똑같이 반복된 일이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의 국제그룹 해체가 예입니다. 이제 IMF 개입 2년을 넘기며 한국 정부는 ‘졸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재벌의 강력한 영향력이 계속될 것임을 예고하는 전주곡일 뿐입니다. 아시아 ‘정실주의’의 경쟁력을 시험한 위기는 이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시험을 받은 한국의 재벌은 물론이고 나머지 국가의 ‘정실주의적’ 기업조직 방식 또한 자본주의와 튼튼히 결합하여 나름의 경쟁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아시아적 가치뿐이 아니고 아시아적 제도 또한 자본주의와 잘 결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 싶습니다. 한 걸음 나아가 이제는 보다 본격적으로 우리의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의 장점을 재발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특히 전통적인 사회의 조직방식인 ‘연고주의’가 자본주의와 결합되는 방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고주의의 단점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장점을 생각해 보면 분명 우리가 재활성화 해야 할 부분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연고집단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부분입니다. 향우회 등에서 서울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설립해 운영하는 기숙사가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제도의 활성화는 복지의 문제를 국가의 세금에 의지하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따라서 이러한 아시아적 제도는 해외로의 수출도 가능한 즉 세계화나 보편화의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고주의는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 시장에서 국가의 특별한 부담 없이도 개인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장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인사말이 너무 길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성균관대 정외과 졸업, 동대학원 정치학박사. 하버드대 엔칭연구소 객원교수 역임. 「동아시아 발전모델의 재검토」, 「박정희체제 18년, 어떻게 볼 것인가」, 「’이승만 수정주의’에 대한 수정」, 공저: 『동아시아의 정치체제』, 『현대한국정치론』 외 논저 다수. (iykim@yurim.skku.ac.kr)
도진순
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 한국역사연구회와 한국사연구회 편집위원 역임. 『백범일지(주해)』,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1945-1948년 우익의 동향과 민족통일정부 수립운동」, 「백범 김구 시해사건과 관련된 안두희 증언에 대한 분석」 외 논저 다수. (dodemy@sarim.changwon.ac.kr)
최원식
인하대 국문과 교수, 창작과비평사 주간.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 문학박사. 계명대, 영남대 국문과 교수 역임. 『민족문학의 논리』, 『한국근대소설사론』, 『韓國の民族文學論』, 편저: 『한국근대문학사론』, 『전환기의 동아시아 문학』외 논적 다수. (cws919@inha.ac.kr)
유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대학 사회학 박사. 한국사회학회 편집위원, 한국동남아학회 총무 역임. 『막스베버와 동양사회』, 『발전과 저발전의 비교사회학』, 『동남아시아의 사회계층』, 「유교자본주의의 가능성과 한계」 외 논저다수. (www.suny.yonsei.ac.kr/~sclew, sclew@bubble.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