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북한과 주요 4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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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2-09 오후 1: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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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한의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


북한의 대중국 관계는 중•소 관계의 변화 움직임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중국 역시 안보적 이해관계에의해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북한과 중국과의 관계 역시 '우호와 갈등'이라는 변화가 있었다.
1966년 5월 7일 중국의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북한은 이에 자극받아 김일성 신격화 작업에 착수하는 한편 중국파 간부들의일대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중국과북한은 완전히 냉각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다가 1969년 7월 1일 노동신문을 통해 "세계평화를 위해 중국인민들과 하나의 친선에서싸울 것"을 천명하면서 관계개선을 시작, 1970∼80년에는 중국과의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1992년 8월 한•중 수교가이루어지자 중국을 "제국주의에 굴복한 변절자 •배신자" 라고 비난하였으나 1995년 중국의 적극적인 북한회유정책으로 우호관계가회복되었다. 갖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중국과 맹방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북한이 그동안 중국의 정치•외교•경제적지원을 받아왔고 사회주의의 마지막 동반국가인 중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없다는 현실인식 때문이다.

1999년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중국 방문에 이어 2000년 3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평양주재 중국대사관 방문과 백남순 외상의 중국 방문 등 연이은 북한의 중국에 대한 접근으로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소원해 왔던 양국 관계를 해소하는 계기가 조성되었다.

특히 2000년 5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 직전 중국을 전격 방문하여 강택민 주석 등 중국지도부와의 회담을 통해 상호 입장을 조율하는 등 우호협력관계를 복원하였다. 한편 중국도 2000년 9월 당 대외연락부장과 정보산업부장을, 2000년 10월에는 국방부장을 방북시켜 북한 중시 입장을 보여주었다.

북한과 러시아와의 관계는'유착•갈등•화해' 등의 변화를 되풀이 해왔다. 정권수립이래 스탈린 사망까지는 소련의 충실한 괴뢰국 역할을 하다가 1956년 2월후르시쵸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이 김일성 1인지배체제 강화의 장애요인이 되어 북한과 소련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이에 따라 북한은1962년에는 쿠바 미사일 사건을 계기로 소련의 정책을 간접비난하다가 1963년 10월 28일에는 노동신문을 통해 소련을 '수정주의'라고직접적으로 비난을 가했으며 소련은 모든 대북원조를 중단했다.

1965년 코시긴의 북한방문을 계기로 소련의 군사원조가 재개되며1970∼80년대 까지 다소 관계가 개선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1990년 9월 30일 구소련이 한국과 수교를 맺자 북한은 노동신문을통해 "소련이 사회주의 제국으로서의 존엄과 체면, 동맹국의 리익과 신의를 30억달라에 팔아먹은 것이다"라고 비난, 관계가 급속도로악화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총선(1995.12)에서 러시아 공산당이 승리하는 등 러시아정국의 보수화 추세에 따라 러•북 관계는 점차 개선되고 있으나 1996년 9월 「조•러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이 파기되어 군사동맹관계는 청산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2000년 2월 러시아 이바노프 외무장관을 초청하여 舊 동맹조약을 대체한 新조약을 체결하여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어며, 2000년 7월 19일부터 20일까지 러시아 국가원수로는 최초로 푸틴 대통령을 방북 초청하여 북-러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공동선언을 발표하였으며, 2001년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7월 26일부터 8월 18일까지 러시아를 방문하여 북-러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모스크바선언'을 채택하는 등 양국간 관계가 한층 증진되고 있다.


2. 북한과 미국, 일본과의 관계


최근 북한외교는 대미 관계개선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이는 세계유일 초강국인 미국과 유대를 강화, 외교고립을모면하고 경제파탄을 벗어나 보려는 의도로 보인다.
북한의 대미접근은 1972년 5월 김일성의 "대미관계개선 희망" 표명(N.Y.T.지 기자회견)이 시초로 1974년 3월 대미평화협정체결 주장 이후1984년 1월 미•북 평화협정체결을 위한 '3자(남, 북, 미)회담'을, 1986년에는 '3자 군사당국자회담', 1988년에는 '3자 국회대표회담' 등을제의한 바 있으며, 접촉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북한이 1993년 3월12일 NPT(핵안전협정)를 탈퇴,한반도 전쟁 및 핵무기개발을 협박하면서부터이다.

북한과 미국은 3단계 고위급회담을 개최하여 1994년 10월21일 제네바 「기본합의문」을 채택, 북한이 NPT 복귀•핵사찰 수락등 핵개발 포기조치를 취하는 대신 미국이 중유 제공 및 경수로 제공을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대포동 1,2호)개발 및 발사 문제가 또다시 제기되어 1년여에 걸친 장기간의 협상끝에 대북 경제제재를 푸는 조건으로 미사일 회담타결(99냔 9월 12일, 베를린) 을 보았다 이후 미국은 대북 포용정책을 바탕으로 한 폐리보고서를 발표(99.9.15)하고 그 후속조치로 대북 경제제재를 완화하는 조치를 발표(99.9.18)함으로써 미-북 관계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북한은 2000년 6월15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이후 미국과의 고위급 접촉을 통해 양국간 관계 개선의 돌파구 마련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사상 처음으로 7월28일 미-북 외무장관 회담이 개최되었고, 이어 10월 8일부터 12일까지 조명록 북한 군 총정치국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특사로 미국을 방문하여 쌍방 현안관련 공동성명을 발표하였고,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북한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2차에 걸쳐 회담을 개최하는 등 양국관계는 급진전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 사이의 회담에서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방북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으나, 클린턴 대통령이 가까운 시일내에 북한을 방문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 아직까지 구체적인 일정은 나와있지 않은 상황이다.

북한은 일본과 1991년 1월30일에서 1992년 11월6일 사이8차례에 걸쳐 수교회담을 진행하였으나 일본의 보상문제,북한의 핵개발문제,이은혜(KAL기 폭파범 김현희의 일어선생) 납치문제 등에대한 쌍방간의 입장차이로 결렬되고 말았다.

그후 1994년 10월21일 미•북간의 제네바합의를 계기로 하여 일본과 북한과의 수교회담재개 움직임이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북한의 노동당과 일본의 연립여당은 1995년 3월28일∼30일 사이 평양에서 회담을 갖고국교정상화를 위한 4개항에 합의한후 실무접촉을 진행하였으나 합의서 해석문제,일본의 보상문제 등으로 진전을 보지못했다. 특히최근에는 일본인 여중생 '메구미'양 납치사건, 일본인처 귀국문제 등이 새로운 이슈로 등장,수교회담이 진전되지 않고 있다.

그러던 중 99년 12월에 일본 초당파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하여 수교회담 재개를 촉구하는 공동 보도문을 발표함으로써 99년 12월과 2000년3월 2차에 걸쳐 적십자회담이 개최되었으며, 99년 12월에는 수교예비회담이 개최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2000년 4월에는 7년간 중단되었던 제9차 수교회담 (4.5-7, 평양)이 개최된데 이어 외상회담 (7.26, 방콕), 제 10차 (8.22-24, 동경) 및 제11차 (10.30-31, 북경) 수교회담이 연이어 개최되었으나, 북한이 '일본의 과거사 사죄, 보상 우선'을 주장하고, 일본이 '납치,미사일 문제 해결병행'을 요구하고 있는데다 과거청산 관련 양국간 현격한 입장차이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 출처 : 코리아스코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