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어떤 베트남 연구자의 못 다한 여로(旅路)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1-11-13 오전 11:16:00
조회수
  1487

어떤 베트남 연구자의 못 다한 여로(旅路)

윤대영(서강대 동아연구소 HK조교수)

서대문 로타리에서 독립문 사거리 방향으로 가다가 우측 골목 안에 위치한 ‘대성집’이란 음식점은 수육과 도가니탕으로 서울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바로 이 음식점 옆에는 꽤나 넓은 공간의 주차장이 자리 잡고 있는데, 주소로는 홍파동 120번지와 121번지에 해당한다. 50년 이상 같은 자리에서 장사를 해 온 사장님(현재는 따님이 운영)의 증언에 의하면, 이 주차장에는 과거에 일본식 집과 관사 비슷한 것이 있었다고 하는데, 1946년 5월 당시에는 김영건(金永鍵)이란 사람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 1910년대 중반부터 한인 청년들이 동남아 현지를 제한적으로 경험하였고 베트남 남부에서 1920년대부터 약 20년간 활약한 김상률이 있었다면, 1930년대부터 베트남 북부에는 20대의 청년 김영건이 프랑스 원동학원(É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 도서관에서 사서로서 베트남 연구를 하고 있었다.

서울 출신의 김영건(1910년생)은 일제 시기의 관리였던 부친 김정현(金定鉉, 1868-?)을 따라 유소년 시절을 주로 황해도 지역에서 보냈다. 그러다가 그는 1923년 부친의 서울 전근으로 해주고등보통학교에서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복고등학교)로 전학하여 1927년 졸업하였다. 졸업을 즈음하여 1931년 초반까지 우울한 습작시들과 좌익 사상에 경도된 소설들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후, 김영건은 상해와 남경 등지에서 수년간 불문학(佛文學)을 전공하고 경성 프랑스 총영사관에서 근무하다가, 영사관의 주선으로 1931년 4월 13일 한국을 떠나 신호(神戶)를 거쳐 새로 부임하게 될 인도차이나로 향하였다. 그리고 그는 1931년부터 1940년에 이르기까지 베트남 하노이의 프랑스 원동학원의 보조사서, 일본도서관 주임 등을 역임하면서 ‘베트남학’에 점차 친숙해져 갔다.


인도차이나로 출발할 당시 김영건의 모습.

(출처 : 조선일보, 1931년 4월 13일자 2면)


인도차이나로 떠나게 된 계기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1926년 김영건이 17세 때 사회주의 팜플렛 속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읽었는데, 20년이 지난 후에도 그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의 하나가 되었다.


남양의 토인들이 사는 어떤 섬 위에 백인들이 와서 기상대를 세웠다. 이 섬 위에 폭풍우가 오게 되면, 그 기상대 위에 낮이면 붉은 기를 밤이면 붉은 등을 달아, 토인들에게 미리 경고를 했다. 이것을 본 무지(無智)한 토인들은 부락 회의를 열고 숙의(熟議)에 숙의를 거듭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즉, 백인들이 와서 이 섬 위에 기상대를 세운 뒤로, 때로는 붉은 기를 때로는 붉은 등을 달아 폭풍우를 불러오는 까닭에 우리 섬의 평화는 깨어지고 말았다. 우리 도민(島民)들은 일어나서 이 악마와 같은 기상대를 부셔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이 섬의 토인들은 그 기상대를 습격하고, 득의양양해서 돌아왔다. 그러나 폭풍우는 여전히 이 섬을 찾아왔다.


이러한 남양 토인들의 무지에 관한 우화(寓話)가 계기가 되어 동남아시아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일까? 어쨌든 김영건은 당대 동남아시아 지역의 저명한 프랑스 연구자들의 지원과 베트남 학자들과의 지적 교류를 통해 1932년 중반부터 각종 학회지나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등장한 󰡔印度支那と日本との關係󰡕(1943)는 그간의 개별적인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는 동시에 베트남-일본 관계나 태국의 역사 혹은 베트남사 자체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보완하였으며, 특히 베트남-한국 교류사에 대한 새로운 내용이 첨가되었다.

1930년대부터 해방 직전까지 왕성한 연구 성과물을 세상에 내 놓을 수 있었던 김영건의 학문 역정은 1945년 해방을 전후하여 현실적인 굴곡과 굴절을 겪으면서 소위 ‘남해사’ 연구와 같은 ‘동남아학’ 개척이라는 임무를 미완의 상태로 남겨 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1948년의 어떤 글에서,

"나는 남양으로 가고 싶다. 그리고 물질적 경제적 사회제도나 또는 그 조직이 아직 발달되지 못하고 원시적 그대로의 순진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회에 들어가서 그들의 애정 심리를 연구해 보고 싶다."고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17세 때 남양 토인들의 ‘무지’에 충격을 받은 김영건이 2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자신의 못 다한 학문적 여로(旅路)를 현지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완성해 보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출처: 서남포럼 뉴스레터 2011.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