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명
  글로벌정치연구
표   제
  한국인의 호주이민
발행처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정치연구소
작성일
  2011-02-16 오후 5:20:00
조회수
  4203

   
 
* 연구논문은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소장 이재형 박사가 외대 글로벌정치연구소 제2권2호(2009년 12월)에 기고한 논문임(pp. 127-162 참조)

한국인의 호주이민*
- 이민의 역사, 현상, 그리고 발전적 미래상 -

인천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겸임교수 국제정치학 박사 이재형

I. 들어가는 말

이민(移民)이란 다른 나라에 옮아 사는 일, 또는 그런 사람이라고 정의 할 수 있고, 이주(移住)란 개척·정복 등의 목적으로 종족이나 민족 등의 집단이 한 곳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정주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이민자’ 하면 유대인이나 중국의 화교(華僑)를 떠올리게 된다. 유대인의 경우 민족의 역사가 곧 ‘유랑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 이들은 전 세계 134개국에 1천4백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한편 중국의 화교는 돈을 벌 목적으로 자의에 의하여 타국으로 이주한 사람들로써, 이들은 대부분 중국 국적을 가지고 다른 나라에 정착하여 상업과 무역업에 종사하므로 우리는 중국화교를 ‘화상(華商)’이라고 부른다. 화교는 동남아시아, 미국, 일본,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한국 등 국가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수는 약 5천5백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김성회 2007, 78).
우리나라의 이민 역사는 1903년 하와이의 농장으로 102명의 한인들이 노동이민을 떠난 것을 그 시작으로 하고 있다. 이제 우리의 재외동포도 670여만 명을 헤아릴 정도로 확대되었으며, 이들은 중국, 미국, 일본은 물론 유럽과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와 중남미에 이르기까지 그 국가 수도 무려 173개국이나 된다. 물론 재외동포라는 개념은 이민, 취업, 유학 등을 목적으로 해외에 체류하고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며, 이들 670만 명의 재외동포 가운데 대한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재외국민은 290만명 가량이다(김봉섭 2009, 27).
이들 이민의 동기는 무엇일까? 과거의 이민은 단순하게 국내여건의 어려움, 예컨대 경제적 곤궁이나 한국적 현실에 대한 도피성 이민이었다면 오늘날의 이민은 좀 더 나은 삶, 즉 자녀교육, 기회의 나라에 대한 동경, 더 나은 환경을 가진 국가로의 이동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호주로의 이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한국인의 호주 이민역사는 50여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제 한국 교민들은 호주사회에서 아시아인이라는 벽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호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서서히 그 정체성을 정립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호주로의 이민은 호주정부의 까다로운 이민정책, 영국인을 비롯한 유럽인 위주의 인구구성, 그리고 서구문화와 동양문화의 이질성 때문에 한국교민들은 호주 내에서 그들의 사업, 교육, 정치활동 등 여러 분야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상당량의 산업 원자재를 호주로부터 수입함으로써 호주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으며, 호주로의 관광객, 유학생들의 숫자도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아직도 호주 정부의 한국교민에 대한에 대한 인식이나 배려가 그러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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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2007-08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 산물임(과제번호: B00012)

그 배경에는 호주가 원래 유럽인들의 이민에 우선을 두고 아시아인들에 대한 이민에 대해서는 제한을 해 왔기 때문이다. 호주에서 1973년 백호주의가 공식적으로 철폐되었지만 아직도 유색인종의 호주로의 이주는 여러 면에서 제한을 받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렇게 호주로의 이민이 쉽지 않은 가운데에서도 왜 한국인이 호주로의 이민의 길을 택하고 있고, 오늘날 서구문화 국가인 호주에서 우리 교민이 한국문화를 꽃 피워나가고 있으며, 앞으로 그들이 자랑스러운 호주인으로써 한국-호주 양국의 선린우호관계 증진에 기여해 나갈 것인가를 전망해 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우선 한국인의 해외 이주사를 개관해 보고, 영연방으로서의 호주의 탄생, 그리고 다문화 국가이면서도 초기 이민정책의 기조였던 백호주의 배경 등을 알아본 후에 이 차별적 이민정책의 철폐 배경과 한국인들의 호주로의 이주 역사와 현상, 그리고 한국인의 호주이주에 대한 발전적 미래상을 모색해 보려고 한다.
호주로의 한국인 이주에 관한 국내의 선행연구는 극히 미미하나 관련성이 저술로는 “나 호주로 이민간다”(고태규, 1998), “법을 알면 호주가 보인다”(대한무역진흥공사, 2004), “다문화 가정 도래에 따른 법제지원방안 연구”(한국법제원, 2006), “현대 서양사회와 이주민”(박단 외, 2009), “재외동포가 희망이다”(김봉섭, 2009) 등이 있다. 이들 단행본에는 한국인의 호주이민에 대한 일반적 정보를 소개하고 있으나 이민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 그리고 호주 이민에 대한 발전적 미래상 제시가 불충분하다고 보여 진다. 따라서 필자는 이 연구를 위해 기존의 문헌기록을 검토함은 물론, 호주의 캔버라, 시드니, 애들레이드 등 3개 도시를 방문하고 그곳에 있는 한인회장을 비롯한 평통자문위원, 한국학연구원, 시의원, 그리고 목회자들과 면담을 실시하여 그 결과를 연구에 반영하였다. 그러나 이 연구가 호주 이민에 대한 전반적인 현상을 두루 설명하는 데는 제한이 있을 뿐만 아니라, 면담자들과의 대담내용이 호주에 있는 10만명의 재외동포 생각을 포괄적으로 대변하는 데는 제한이 있음을 밝혀둔다. 앞으로도 한국인의 호주로의 이주는 흐르는 물과 같이 지속될 것이며 교민사회의 명암과 발전상도 변화를 거듭해 나갈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후속 연구가 지속되기를 기대해 본다.

II. 한국인의 해외 이주사 개관

1. 조선조 시대의 이민
간도(間島)는 우리 민족이 최초로 해외이민을 시작한 개척지였다. 1830년대 계절영농 이민자들이 간도에 첫발을 내딛었다. 간도는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에 접한 대안지역으로서 고구려와 발해로 내려오면서 한민족이 고대문화를 형성하였던 곳이며, 현재는 중국의 요령성과 길림성, 흑룡강성 등 동북삼성의 일부지역에 해당된다. 일제는 한국의 완전한 합방과 대륙침략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한국인을 보호한다는 미명으로 1907년 8월 용정에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를 설치하게 되자 중국과 일본은 각자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국인의 활동을 간섭・통제・탄압하게 된다. 이때를 기하여 일본과 청나라 간에는 각종 조약과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1909년의 간도협약이다.
한편 1860년부터 일부 조선인들이 러시아의 연해주로 이동하여 벼농사를 보급하고, 러시아를 도와 항일전에 참전하였다. 1937년 당시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은 20여만 명에 이르렀는데, 그들은 연해주 곳곳에서 한인 마을을 이루며 민족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채 살고 있었다. 그중에는 구소련에 귀화한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비귀화인들이었다. 1937년 8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극동지역에서 일본 첩자의 침투를 차단’한다는 명목 아래 한인의 강제이주를 단행한 것이다. 1937년 9월과 11월 세 달 사이에 약 20여만 명의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이송호 외 2004, 35).
또한 미국으로의 한인이민의 역사는 1903년 102명의 한인들이 인천항을 떠나 사탕수수 노동자로서 하와이의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을 시점으로 한다. 이 시기에는 미혼의 젊은 남성 노동자들과 이들과 사진교환을 통해 결혼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 간 젊은 사진신부들(picture brides), 그리고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유학생의 신분으로 미국으로 건너 온 정치 지도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김원용 2004, 34).

2. 해방 후의 이민
1955년 패전국 독일의 주권회복으로 독일군이 다시 구성되면서 50여만 명에 이르는 군복무 의무자들이 노동시장에서 빠져나갔다.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50년대 중반 이후 남부 유럽과 북아프리카 국가에서 노동력을 공급받던 독일 정부는 1963년 우리나라에 인력수출을 요청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63년 파독(派獨) 광부 500명 모집에 4만 6000명이 몰려들었는데, 상당수가 대학졸업자와 중퇴자들이었다. 당시 남한의 실업자가 250여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매월 600마르크(약 160달러)의 직장에 지원자가 밀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은 루르탄광 지하 1000m~3000m 사이의 막장에서 일했다. 간호사의 사정도 비슷했다. 1966년 1월 128명이 독일로 떠날 때의 고용 조건은 월 보수 440마르크(약 110달러)였다. 독일 땅에 도착한 한국 간호사들이 처음 맡았던 일은 알코올 묻힌 거즈로 사망한 사람의 몸을 닦는 작업이었다. 1966~76년 사이에 한국 간호사 10,030명이, 1963~78년 사이에 광부 7,800명이 독일로 건너갔다. 이들의 송금액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우리나라 GNP의 2%에 달했다고 하니 이들이 조국의 근대화에 기여한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김성진, 2007, 95).
한편 해방 후 미국으로의 한인이민은 2차세계대전후 미국이 한국에 군사적으로 깊이 개입하면서 시작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은 40,000여명의 주한미군을 한국에 주둔시켜 왔는데, 그들 중 일부와 결혼한 한국여인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1950년부터 1964년까지 6,000여명의 여성들이 미군의 배우자로서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같은 시기에 5,000여명의 아동들이 전쟁고아, 혼혈아, 또는 입양아로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63년 미국의 개정이민법에 따라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의 일부 국가들은 한 나라에서 매년 20,000여명을 미국으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강석희 2003, 28). 1965년과 1990년 사이에 총 660,000여명의 한인들이 미국 영주권을 획득하였다. 미주 한인인구는 1970년의 69,150명에서 1980년에는 357,393명, 1990년에는 798,849명, 그리고 2000년도에는 약 12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미국 인구센서스, 1910-1990, 1903-1944, 2000-2001).

3. 한국인의 해외 이주와 한상(韓商)
1) 한국인의 해외 이주
한국인은 1962년 이민법 제정 후부터 2006년 말까지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이주자는 미국에 699,117명, 캐나다에 105,186명, 호주에 19,717명, 뉴질랜드에 16,622명, 라틴아메리카에 56,445명, 유럽에 33,549명, 기타지역 7,390 등 938,026명이다. 한편 이주 형태별로 보면 집단이주가 275명, 사업(투자)이주가 56,501명, 취업이주가 153,628명, 연고이주가 501,760명, 국제결혼이 136,446명, 국제입양이 82,550명 등이었다(외교통상부. 2007)
한국인의 해외 이주자는 1980년 37,000여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한 이래 1990년대 후반 15,000명, 그리고 2005년의 경우 8,300여명 등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주지역은 미국 등 기존 이주지 이외에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지역으로 다변화되고 있으며, 이주 형태도 연고이주는 감소한 반면, 취업, 투자 및 사업, 교육 등 경제적 동기 내지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하기 위한 이주가 증가하고 있다.
해외이주는 원칙적으로 이주희망자의 자발적인 의사결정 사항으로 정부가 이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거나 제한할 성격의 사안이 아니다. 그러나 1960-70년대에는 과밀인구해소를 위한 인구정책 및 외화획득 차원에서 정부가 적극적인 해외이주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최근 우리 사회의 심각한 저출산․고령화 문제 및 경제발전 수준을 감안할 때 더 이상 이민 장려정책은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이민에 대한 기본 입장은 해외이주를 적극 장려하거나 제한하지 않으며, 수민국과의 협력을 통해 우리국민의 이민을 지원하고, 이주 희망자를 위한 편의 도모 및 안정적 정착지원이라고 할 수 있다(외교통상부. 2006).
2) 한상(韓商)
한상이란 해외에 이민 나가있는 한국 기업인을 말한다. 제6차 세계한상대회가 2007년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3일간 부산광역시에서 열렸는데, 여기에는 동포 경제인 1,110명이 참가하였고, 365개의 기업과 단체에서 418개의 기업 전시부스를 설치하는 등 역대 최대 규모로 열렸다(부산일보. 07/10/31). 전 세계로 떠난 한국인의 이민 역사가 100년을 맞고 있는 때에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비즈니스맨을 한곳에 모이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한국경제는 이제 이들과 함께 전 세계의 중심으로 향하며 한걸음씩 전진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한상의 역할은 적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다. 이들 재외 동포 한상들이 2006년 기록한 매출 31조 원은 2007년 한국 예산 중 국방(23조원), 수송 및 교통(28조원) 예산을 웃도는 금액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동포 한상들과의 유대관계를 강화하여 경제발전은 물론 한국의 정체성과 발전상을 대외에 홍보하는데도 노력을 기울여 세계적인 이민 국가로서의 이점을 국익과 접목시켜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III. 호주의 국가형성과 이민정책

1. 호주 개황
1) 호주의 초기 역사
호주를 신대륙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원주민들이 4만 년 전부터 정착하여 살아오던 곳이다. 애버리진(Aborigine)으로 알려진 호주 원주민의 역사에 대해서는 논쟁이 되고 있긴 하지만, 약 7만 년 전 인도네시아인들이 바다를 건너왔다는 것이 정설이다(호주교육청. 2007. http://www.studyinaustralia.gov.au/Sia/ko/LivingInAustralia/History(검색일: 2008. 10. 21). 그런데 1600년대 초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호주대륙의 존재가 인지되었는데, 1606년 스페인인 루이스 토레스(Luis Vaez de Torres)가 토레스해협을 항해하였고, 1642년 네덜란드인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이 타스마니아에 도착하였다. 그 후 1688년 영국인 윌리엄 댐피어(William Dampier)가 영국인 최초로 호주대륙에 상륙하였고, 1770년 영국해군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호주대륙 동해안의 보타니 만(Botany Bay)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1788년 1월 미국의 독립으로 영국은 새로운 죄수 유배지를 필요로 하였고, 경제적, 전략적(해군기지) 필요에 의하여 필립 선장 인솔 하에 11척의 선박으로 1,530명(이중 736명이 죄수)의 영국인을 이주시켜 현재의 시드니지역에 죄수유배지를 건설하였다. 이들은 1788년 1월 18일 시드니 남부에 도착하였으나, 1월 26일 정착여건이 보다 양호한 포트 잭슨(오늘날의 Sydney)으로 죄수 유배지를 옮겼으며, 이날을 호주 국가창건일로 기념하고 있다.
호주의 죄수 유입은 1788-1867년 사이에 155,105명이 유배되어 왔는데 1823년 메리노양 도입으로 양모 산업 등 목축업이 발달하면서 죄수유배지를 식민지로 전환하고, 육상 및 해상탐험 등으로 식민지역을 확장하여 6개 식민지를 건설(현 6개주로 발전)하였다. 호주로의 본격적인 이민은 1816년 자유이주자라는 이름으로 비롯되었다. 그런데 1851년 호주 이민역사에 커다란 변혁을 예고하는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는데, 바로 에드워드 하그레이브(Edward Hagrave)에 의해 금광이 발견된 것이었다(김형식 2000, 365). 뉴사우스웨일즈와 빅토리아 지방에서 금광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골드러시(Gold Rush)의 열풍은 급속도로 퍼졌다. 금광발견의 여파로 인한 이민의 증가로 호주인구는 1850년 40여만 명에서 1860년 115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농장과 금광을 찾아 새로운 곳을 마구잡이로 개척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호주 원주민은 그들의 주거지에서 일체의 보상도 받지 못하고 무자비하게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2) 호주의 행정과 경제
호주는 6개주(뉴사우스웨일즈: New South Wales NSW), 빅토리아: Victoria Victoria), 퀸즐랜드: Queensland QL), 남호주: South Australia SA), 서호주: Western Australia WA), 타스매니아: Tasmania)와 1개 준주(Northern Territory NT), 그리고 1개 수도특별구(캔버라: Australian Capital Territory ACT)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주는 연방정부와 마찬가지로 독립된 입법・행정・사법부를 보유하고 있다. 1901년 단일 헌법하에 6개의 주가 연합하여 연방이 결성되었다. 호주의 면적은 768만km²로써, 한반도의 약 35배이지만 국토의 약 30%는 사막이다. 인구는 약 2,100만 명(2007년 말 기준)이고, 인구 분포는 앵글로색슨 80%, 기타 유럽 및 아시아계 18%, 원주민 2% 등이다. 호주의 국가 및 정부형태는 입헌군주제이며 의원내각제이다. 국가 원수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고, 여왕이 임명한 연방총독이 여왕을 대신하지만, 실질적인 국정은 수상이 전권을 행사한다.
2006년 말 기준 호주는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며, 수출은 1,963억 불로 인구대비 세계 8위의 부국이다. 전 후 60년 간 호주는 66만 명의 난민과 650만 명의 이민을 받아들여 그 기간에 인구는 700만 명에서 세 배인 2100만 명으로 불어났다. 호주는 쾌적하고 친환경적인 환경, 선진 의료서비스, 합리적 교육방식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민의 목적지가 되고 있다.

2. 호주의 이민정책
1) 백호주의 정책(白濠主義政策: White Australia Policy)
백호주의라는 용어는 1901년부터 1973년까지 유색인종의 이민을 제한하는 정책이다. 이 정책에 따라 이민을 원하는 유색인종은 받아쓰기 시험을 치러야했고, 취업금지 등의 불이익을 받게 됨으로써 백인 이민자들에게만 특혜를 주는 인종차별정책으로 간주되었다(이태주 2009, 481). 이 백호주의 법안은 1855년 빅토리아 주에서, 1861년에는 뉴사우스웨일스 주에서 입안되었고, 후에 1901년 호주라는 국가가 정식으로 탄생한 이후에도 이 백호주의 정책은 유지되어왔다(John Vrachnas, et.al. 2005, 6-7). 이 이민제한정책은 처음에는 중국인의 유입을 제한할 목적이었다. 1841년부터 20년 간 4만여 명의 중국인이 골드러시로 호주에 입국하여 부를 축적해 나가자 이를 시기한 백인들은 중국인을 학대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중국인들은 1860-61년 시위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빅토리아 주와 뉴사우스웨일즈 주는 중국인 이민금지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이 백호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됨과 동시에 호주가 비영국인과 유색인종의 이민을 받아들임으로써 서서히 완화되었고, 1972년부터 집권한 노동당 정부하에서 백호주의 원칙은 현저하게 둔화되었다. 드디어 휘트램(Whitlam)의 노동당이 집권한 직후인 1973년 호주 정부가 인종차별정책이 불법이라고 인종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킴으로써 백호주의는 없어지게 되었다.
2) 1975년 이후의 이민정책
호주는 다민족 국가로써 사회적 결속과 조화유지를 위하여 다문화사회를 구현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1975년 이후의 이민정책 발전으로 월남 피난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1970년대 초 아시아인의 이민 비중은 5%였으나 1980년대 초에는 그 비중이 28%로 증가하였고, 상대적으로 같은 기간에 영국 및 아일랜드계의 비중은 45%에서 24%로 감소하였다(김형식 2000, 362). 호주는 아직도 인구가 적으므로 국력신장 및 경제발전을 위해 해외인력수입 차원에서 이민을 시행하고 있다. 1970년대가 아시아 이민을 통제했던 백호주의가 철폐되었다면, 1980년대는 다문화정책의 선포일 것이다. 그러나 다문화주의도 1998년부터 몇 차례의 사건 발생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98년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폴린 핸슨(Pauline Hanson)은 한나라당(One Nation Party)을 창립하고 백호주의의 부활과 유색인종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주장하였다(이태주 2009, 490-497). 또한 2004년 2월 15일에는 시드니 레드펀(Redfern) 지역에서 약 150여명의 호주원주민인 애버리진의 폭동으로 40여명의 경찰관이 부상하였고, 2005년 12월 4일에는 시드니 외각 해변에서 레바논계 청년 2명이 백인 인명구조 대원을 폭행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일주일 후에는 약 5,000여명의 백인 청년들이 모스크 앞에 있던 중동청년들을 보복 공격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런 일련의 사태 이후 2007년 1월 하워드 정부는 통합을 다문화주의의 대체개념으로 공식 채택함으로써 다문화주의에 중대한 위기가 왔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2007년 11월 24일 호주 총선에서 캐빈 러드(Kevin Rudd)의 노동당이 승리함으로써 그러한 우려는 수그러지게 되었다(이태주 2009, 476-492). 호주의 다문화주의는 호주의 국익, 예컨대 경제성장, 국가안보, 그리고 단합된 국가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방안으로 꾸준하게 재구성되고 발전해 나갈 것이다.
오늘날 호주 정부는 다문화주의를 주장하고 있지만 아직도 호주이민정책은 매우 까다로운 것이 특징이다. 호주이민을 위한 영주권은 물론, 모든 비자의 신청에 있어서 공통적인 체크포인트는 건강상의 이상 유무와 성격점검이다(DIMIA, 2001). 건강진단의 목적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질병의 소지자인지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다. 성격체크는 대체로 과거 범죄경력의 유무로 좋은 성격의 소유자인가를 판단하지만 과격한 사상 등으로 정치적, 사회적 분란을 일으킨 전력이 있는 사람도 부적격자의 대상이 된다. 특히 호주사회와 같은 다문화국가에서는 인종, 문화, 종교의 화합차원에서 필수불가결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3) 호주 이민의 종류
호주의 이민제도는 크게 일반(혹은 비인도주의: non-humanitarian program)이민과 인도주의(humanitarian program)이민으로 구분되며, 다시 일반이민은 가족초청이민, 기술사업이민, 특별자격이민으로 분류된다.
(1) 일반이민
(가) 가족초청이민
이 범주에는 배우자 및 약혼자, 부양자녀, 그리고 부모가 포함된다. 초청자의 일반조건은 호주 국민이나 영주권자, 혹은 18세 이상의 뉴질랜드 국민 등이다. 가족 초청 이민 프로그램은 크게 2가지로 분류되는데 일차적으로 우선권이 주어지는 가족초청이민 및 일반가족초청이민이다.
(나) 기술사업이민(취업이민)
기술사업이민은 이민자의 기술, 직장근무 경험 및 영어구사 능력을 기준으로 하여 수용 여부를 결정하는 이민선발 방식이다.
- 독립기술이민: 독립기술이민은 호주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 소지자를 받아들이는 제도로써, 2005년의 경우 전체 기술이민의 52%를 차지하였다. 이 이민의 필요조건은 기술, 나이, 영어 구사력에 부여되는 일정수준의 평점획득을 요구하고, 주정부로부터 지명을 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 고용주의 지정 초청: 호주 고용주는 호주의 노동시장에서 조달할 수 없는 숙련공을 해외에서 취업이민 초청 케이스로 지정하여 이민을 신청할 수 있다. 2005년도의 경우 13,020개의 비자가 발급된 바 있다.
- 사업기술이민: 호주에서 사업을 운영하거나 투자를 계획하는 자를 대상으로 한다.
- 특수재능이민: 예술이나 스포츠 등 직업에서 탁원한 재능을 보유한자를 대상으로 한다.
- 일반기술이민: 이 범주에는 비자신청 시 45세 이하인자, 호주에서 지정한 리스트에 등록된 기술 보유자, 높은 수준의 영어 구사력을 보유한 자, 호주 기술자격을 인정받은 자 등이 포함된다.
(다) 특별자격이민
특별자격이민에는 과거에 호주의 시민권자나 영주권자, 뉴질랜드 가족이 포함된다.
(2) 인도주의 이민
인도주의 이민에는 난민이나 정치적 망명자가 여기에 해당된다.

3. 호주의 대외정책과 한호관계
1) 외교정책 기조
호주의 외교정책 기조는 아시아에 외교정책의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아세안(ASEAN) 국가들과의 포괄적 외교관계를 추진하며, 중국, 일본, 한국 등 동북아 국가와의 선린우호관계도 강화하고 있다. 또한 미국과는 안보강화를 기본 축으로 하여 아・태 국가와의 안보 협력을 확대하면서 미국의 강력한 대아시아 공약이 유지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호주는 서구 선진국과 아태지역 개도국과의 연계를 위한 조정자 역할을 수행하면서, 유럽과 북미기업이 호주를 아태지역 거점으로 활용하도록 정책을 발전시키고 있다.
2) 한국과의 관계
호주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승인을 하였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호주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참전하게 된다. 호주의 한국전 참전은 1950년 9월 28일 육군 제3대대가 부산항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그 후 호주는 항공모함 1척, 구축함 2척을 포함하여 해군병력 4,507명, 공군은 1개 전투기 대대 2,000명을 파견했다. 1951년 4월 24일 호주군은 가평에서 중공군을 격퇴하였으며, 한국전쟁 기간 중 호주 군대는 연인원 1만7천여 명을 참전시켰는데, 그 중에서 사망 339명, 전상자 1,216명, 포로 29명의 피해를 입었다. 호주는 지금도 매년 3대대의 가평전투 기념일 행사를 가평 현지에서 개최하고 있다.
한국과 호주는 1961년 수교 이래 민주주의, 시장경제, 인권 등 국제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면서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바탕으로 긴밀한 실질적 협력관계 유지하고 있다. 양국은 상호 보완성과 유사성을 근간으로 양자관계 뿐만 아니라 지역 및 세계적 차원에서 안보, 군축, 경제, 통상 분야의 협력을 공고히 하고 있다. 호주는 우리 국민들이 매우 선호하는 이민, 관광, 유학 대상국 중의 하나이다. 2006년 호주를 방문한 한국인은 30여만 명에 달하였고, 유학생도 3만 2천명(한국은 중국, 인도에 이어 3대 유학생 파견국)에 육박하였다. 양국의 민간차원 교류 촉진 및 지원을 위해 한・호재단 및 호・한재단, 양국 민간경제협력위원회 등이 적극 활동하고 있다.


IV. 한국인의 호주이민


1. 초기 이민
1920년 당시 소수의 한국인이 호주에 거주한 흔적이 있는데, 이들은 호주의 선교사들이 입양한 아동들이었다. 또한 1921~1941년간에 극히 소수의 학생이 호주로 유학하였고, 1953년 한국전쟁 이후 일부 한국인이 호주 군인의 처나 입양아로 호주에 입국하였다. 그러나 호주 이민성의 비자가 찍힌 여권을 소지하고 이민자의 신분으로 입국한 최초의 한국인은 최영길씨였다. 그는 한국전쟁 기간 중 연합군의 일원인 호주 군대에서 보급관 및 통역관으로 근무한 공로로 호주 정부의 초청을 받고 호주에 입국하였다. 전쟁 당시 16살의 소년병으로 호주군의 마스코트였던 최영길은 33세의 나이로 1968년 6월 20일 부인과 딸을 데리고 호주에 입국한 것이다.
그 후 1969년 숙련기술인력 이민 프로그램으로 한국인 이민자들이 시드니를 통해 입국하였고, 콜롬보계획 장학금 수혜 공무원 및 유학생 약 50-60명이 호주에 체류하였다(외교통상부 2007, “호주개황,” http://aus-act.mofat.go.kr/index.jsp 검색일: 2008. 12. 20). 그리고 1970년 9월 이후에는 호주의 로트 웍(Rort Work)) 헬기회사의 취업제의로 7명의 헬기 조종사가 호주로 입국하여 광맥탐사활동 등에 종사하였다. 태권도 사범자격으로 초청받아 호주에 태권도를 처음으로 보급한 인물은 1970년 이주한 이종철이다. 그는 입국한 해에 멜봄, 애들레이드, 퍼스, 브리스번에 각각 리태권도 도장을 개관하였고, 그 후 그의 두 형이 호주에 이주하여 호주는 물론 뉴질랜드와 파푸아뉴기니 지역까지 도장을 확대하였다. 1975년까지 다수의 태권도 사범들이 이주하여 호주의 주요 도시에 도장을 개관하고 태권도 보급에 기여하였다. 이렇듯 세계로 뻗어 나간 태권도 붐이 오늘날 올림픽에서 태권도가 공식 종목으로 포함되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1974년 이후에는 월남전에서 패배기운이 짙어지자 미국, 영국, 호주 등의 용역회사들에 고용되어 있던 한국인 노무자, 기술자 500여명이 관광비자로 호주에 피난 오게 됨으로써 본격적인 한국인의 호주 이민은 비롯되었다(김형식 2000, 363). 이들 대부분은 1966년 당시 채명신 파월한국군 사령관이 본국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입안한 정책에 의해 월남 현지에서 전역하여 한국 및 외국 업체에 취업한 제대 장병들이었다. 그러나 1973년 1월 27일 파리 4자회담으로 월남전이 종식되기에 이르자 이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호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74년까지 무려 500여명이 3개월에서 6개월까지의 관광비자로 호주에 입국하여 비자조건을 어기고 구직광고를 보고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아직 백호주의가 살아있었으나 구직난을 겪고 있던 회사들이 이들의 영주비자를 신청해 주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불법체류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런데 1976년, 1978년 및 1979년 노동당 프레져(Fraser) 정권의 ‘사면령’을 통해 당시 호주에 거주 중이던 대부분의 한국인이 영주권을 취득하고, 한국 내 가족을 초청할 수 있었다.
2. 백호주의 철폐 이후의 이민
특히 1976년 1월 26일 호주 건국기념일에 호주정부가 자국 내 불법체류자를 구제하는 이른바 제 1차 사면령을 발동하여 한국인 486명이 영주권을 획득하게 된다. 이렇게 많은 한국인들이 일시에 영주권을 획득한 것은 단순히 사면령 때문이라고 하기보다 그들이 3~6년 동안 월남에서 근면하고 숙련된 기술자들로 근무하다가 호주에 입국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추은택 2008, 62). 당시 호주정부는 부족한 노동력이나 고급인력을 확보하려고 노력 중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1976년의 한국인 체류자의 영주권 소식은 이란을 비롯한 중동, 브라질 및 우루과이를 비롯한 남미, 그리고 광부와 간호원이 파견되어 있던 독일까지 전파되어 호주는 한국인이 선호하는 이민의 선호지가 되었다. 그 때부터 영주권자의 가족과 위에 열거한 여러 나라로부터 한국인들의 호주 입국이 급물결을 타게 되었다. 1962년 한국인의 호주 이주가 시작된 이래 1979년까지 한국인의 호주 이주현황은 아래 표와 같다. 이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호주 동포사회는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표 4-1> 초창기 한국인의 호주 이주현황

년도
62
~68
69
70
71
72
73
74
75
76
77
78
79
이주인(명)
7
34
32
45
75
25
86
55
728
454
476
509
출처: 외교통상부 해외이주자 통계(2007년)
1980년 이후에도 한국인은 입양, 가족초청 이민, 취업, 사업투자 이민, 유학 등으로 호주로 이주하였다. 호주 한인사회는 1980년 6월 19일 호주정부의 제 2차 사면령 발효로 양적으로 도약하게 되었다. 많은 한국인 불법체류자들이 수용소에서 혹은 직장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안은 것이다. 1986년부터는 투자이민이 시행됨에 따라 한국인의 호주이민은 더욱 활발해졌다. 또한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호주를 찾는 관광객이 급증하고, 영어연수생과 조기 유학생,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소유한 젊은이들이 대거 입국함으로써 호주 동포사회도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한국인의 호주 이주는 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한국인의 호주 이주는 2000년대에 다시 증가하고 있다. 2006년 8월 8일 시행된 호주 인구센서스에서 한인 인구(남한에서 출생하여 호주로 이주한 한인, 여기에는 호주에서 태어난 한인 후세들이나 제 3국에서 태어나 호주로 이주한 한인은 제외된 숫자임)는 52,763명으로 집계되었다. 한국인의 호주 이민 50주년이 되는 2007년 현재 130여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호주에서 한인 이민자 그룹은 소수민족 가운데 29번째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추은택 2008, 5). 한편 2007년도 호주의 각 주별 한국인 동포 수는 다음 표와 같다.


구분

ACT
Victoria
SA
WA
Tas
NSW
QL
NT

105,558
2,000
12,000
3,700
4,790
500
68,448
14,029
91
시민
권자
24,531
910
3,532
500
1,600
40
16,650
1,250
49
영주
권자
30,101
340
2,204
650
400
50
23,540
2,877
40
일반
체류자
19,669
314
1,292
1,019
549
92
14,100
2,303
0
유학생
31,257
436
4,972
1,531
2,241
318
14,158
7,599
2
<표 4-4> 호주 한국인 동포현황
출처: 외교통상부 재외동포현황(2007년도 말 기준)을 필자가 요약 정리한 것임
3. 가족이민과 기술이민
초기 이민자들은 영주권을 획득하면 가족을 초청한다. 1970년대 가족이민이 부인과 자녀 등 직계가족이었다면 1980년대 이후에는 형제, 친지까지로 확대되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이민은 1980년대 중반 전체이민의 54%에서 2003년도에는 26%로 감소한 반면 같은 기간 기술이민은 20%에서 61%로 크게 증가하였다(추은택 2008, 106). 이제 호주는 영어실력을 갖춘 기술인력을 선호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은퇴비자를 도입하여 재정능력이 있는 노년층에게도 의료비를 본인이 부담하는 조건으로 이민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2007년 말부터 시민권 획득에 영어 소양시험과 호주에 대한 기본소양시험을 채택하는 등 비영어권 아시아인에게는 적잖은 노력이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4. 뉴질랜드 한인 시민권자들의 이주
1995-6년 사이에 뉴질랜드로부터 소수의 한인들이 호주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1990년대 초 호주의 투자이민 문호가 닫히면서 1992-93년 경 뉴질랜드로 가서 시민권을 획득한 교민들이다. 이들은 약 3만 명으로 뉴질랜드 350만 인구 가운데 거의 1%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들 뉴질랜드 시민권자들 2000-2003년도에 약 1만 명이 호주로 이주하였다. 2001년 호주이민법이 뉴질랜드 시민권자라도 호주 영주를 원할 경우 다시 이민절차를 밟도록 개정되자 이 법 시행 전 및 유예기간에 이들이 호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Australian Bureau of Statistics, 2004). 호주의 집값이 뉴질랜드에 비해 2배 정도 비쌌기 때문에 그들은 시드니 북쪽으로 모여 들었다. 아무래도 호주가 뉴질랜드 보다는 기회의 땅이라고 본 연유 때문이다.


V. 호주이민의 발전적 미래상 모색

1. 재외동포 지원사업
한국재외동포재단에서는 차세대 지도자의 주류사회 진출 지원을 목표로 지도자 워크숍 개최 및 재외동포 차세대 단체 육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2003년부터 매년 호주교민에 대한 차세데 지도자 워크숍도 지원하고 있다.

<표 5-1> 차세대지도자 육성사업 추진실적(단위: 천원)

연도 년도
사업내용
2003
2004
2005
. 차세대 지도자 워크숍
. 차세대 단체지원
10개국 24명
3개국 3건
6개국 25명
3개 단체
9개국 19명
3개국 5개 단체
예 산
96,000
78,485
97,190

출처: 재외동포재단(2007년도)

또한 한국 정부는 재외동포의 법적 지위 향상을 위해 재외국민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이중국적을 허용하며, 출입국 및 취업 자유화 등의 조치를 강구하고 있다. 재외동포단체에 대한 재정지원 확대 조치로써, 한인회관, 이주기념관 등 동포사회를 위한 건물 매입 또는 신축 지원, 한인회 등 동포단체의 연례행사 또는 기념행사 개최 지원, 영세 동포사회 단체들에 대한 보조금 지원을 하고, 한국 문화・예술 전통을 거주국에 홍보하기 위한 동포사회 자체추진사업 지원 등을 검토하고 있다. 또한 ‘세계한상대회’를 통한 비즈니스 네트워크 구축으로 재외동포 경제인 및 국내외 경제인 간 교류촉진을 통해 모국과 재외동포 사회 간 비즈니스교류를 확대하고, 우리 기업의 신규 시장 진출을 위한 안내자 역할 및 한상들의 모국 경제에 대한 투자 확대를 유도하고 있다.

2. 한인교민사회의 성장과 자구노력 방향
호주에 한국 교민이 많은 도시는 대략, 시드니, 멜버른, 브리스베인, 골드코스트, 퍼스, 캔버라, 애들레이드 등이나 필자는 이 중 시드니, 캔버라, 그리고 애들레이드 등 세 개의 도시를 방문하여 그곳의 한인회 간부 및 전현직 평통자문위원들과 면담 및 설문을 실시하였다. 면담의 목적은 호주 한인 사회의 발전역사와 현재 안고 있는 문제점, 그리고 호주 이민을 위한 제언 등을 청취함으로써 본 연구의 내실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방문기관과 면담인원, 그리고 설문 내용은 도표와 같다.

1. 방문기관/면담내용/설문내용
가. 방문기관 및 면담자
(1) 시드니: 한인회 사무총장 조양호 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선임연구원 김삼오 박사, 캔터버리 카운슬 시의원 남기성, 시드니 한인교회 박은성 목사
(2) 캔버라: 한인회장 김천주, 주호주 한국대사관 권재환 서기관
(3) 애들레이드: 한인회장 이경연, 평통자문위원 김필기, 전평통자문위원 이 연
나. 면담내용
(1) 호주로의 이민 동기
(2) 교민으로서의 자긍심과 정체성
(3) 이민사회의 문제점
(4) 호주 이민을 위한 도움말
(5) 한국-호주 교류 역사와 현황
(6) 호주대학 내의 한국학과 현황
(7) 호주 내 한류의 현주소
다. 한국인의 호주 이민에 대한 설문서
(1) 언제 어떠한 사유로 호주에 이민을 오시게 되었습니까?
(2) 호주에 이민 오신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3) 지금은 없어졌다고 하는데 호주의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 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호주에서 아시아인이라는 사실이 장애/불편함으로 느껴진
적이 있습니까?
(4) 성공적인 이민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무엇입니까?
(5) 이민 생활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가장 힘이 되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6) 호주의 이민 정책에 대해서 귀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7) 귀하는 한국에 있는 아시는 분에게 호주이민을 권하고 싶습니까?
(8) 현재 종교 활동을 하고 계십니까? 하고 계신다면 어떠한 종교인지와 그 종교
활동에 대해 말해 주십시오.
(9) 현재 소속되어 있는 교민사회(대략적인 수 포함)와 그 활동에 대해 간략히
말씀해 주십시오.
(10) 현재 귀하가 거주하시는 도시에 한국 유학생들이 대략 얼마나 있습니까?
(11) 귀하께서 거주하시는 도시의 대학에 한국학과가 개설되어 있습니까?
(12) 한국인의 이민이 호주사회에 끼친 좋은 영향이 있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3) 호주에 있는 한국인사회와 타국의 이민사회(중국, 일본, 베트남 등)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4) 호주 이민의 원활한 발전과 한국-호주의 바람직한 관계를 위해
국가차원에서 어떠한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필자는 앞에서 열거한 세 곳을 방문하고 면담자들과 대화, 그리고 설문을 통해서 얻은 자료를 분석하여 대략 다음과 같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1) 캔버라 이민의 발자취와 교훈
설문에서 김천주 한인회장은 이민생활은 그야말로 고독과 개척의 부담을 안고 시작된다고 했다. 이민자들은 단지 자식의 미래와 교육을 위해서만 이민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들 나름대로 호주의 새로운 생활과 환경에서 정착하고자 먼 길을 건너 왔지만 이민 1세대는 취약한 영어 실력, 그리고 그러한 영어 실력의 제한으로 인한 직장의 한계, 새로이 외국에서 적응을 시작하는 자녀들의 문제로 이민 초반에는 많이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호주에서 1970~80년대를 보낸 중산층의 이민 1세대는 생활이 매우 어려웠으며, 과거 호주의 생활보다는 좀 더 익숙하고 나은 생활을 했던 한국의 삶을 되돌아 볼 때에는 자신의 삶에 대해 괴리감을 느끼게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1966년에 시드니에 소재하던 재 호주 한국대사관이 캔버라로 이전함으로써 캔버라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늘어나게 되었으며, 1979년까지 캔버라에는 한인 20여 가구, 소수의 유학생 그리고 대사관 직원들이 거주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2008년 6월 현재 1,300 여명의 한인 동포들이 캔버라에 거주하고 있다. 캔버라는 호주의 시드니나 멜버른과 같은 다른 도시들과 차별성을 띄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캔버라가 상업도시가 아닌 행정도시라는 것에서 기인한다.
1970년대 한국인들이 호주로 이민을 결심한 이유는 첫째, 많은 한국인들이 당시 급여가 상대적으로 높은 호주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한국에 계속 살기보다는 더 좋은 환경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외국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둘째, 당시의 호주의 경제상황이 한인들의 취업 요구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셋째, 당시 기술이민의 붐으로 월남전 참전 후 한국으로 귀국했다가 다시 호주로 이민을 선택한 사람들이 많았다. 정하욱씨는 캔버라 한인 최초의 기술이민자이며,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기술이민을 이유로 캔버라를 비롯한 호주 전역에 이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편 1980년 이후 한국인들이 호주로 이민을 결심한 사유로는 첫째, 1970년대 사면령으로 취득한 영주권자와 1980년대 초 제 2차 사면령으로 합법적인 신분을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1980년대 당시 호주의 정부기관에 근무하던 한인들이 호주 시민으로 신분을 전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이민 초창기에는 미국 달러와 호주 달러의 비율이 70 : 100으로 호주 달러의 환율가치가 높았으나 상황이 역전되어 미국에 비해 호주의 학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호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호주의 일반이민이 줄어드는 추세이고 호주 정부는 예전에 비해 영어 실력이 확실하고 뚜렷한 직업군을 선택할 수 있는 젊은 이민 층을 선호하는 추세이다.
2006년 7월부터 캔버라한인회 김천주 회장은 한인들을 위해 변호사나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무료 강좌를 개설하였고, 대사관과 협조하여 호주사회와 한인사회의 긴밀한 유대관계가 유지되고 정착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또한 2006년 10월 한글학교를 개설하여, 유치부, 초등부, 중등부 등 5개 반을 운영하고 있으며, 앞으로 입양아반과 성인반도 운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김천주 한인회장은 호주 이민을 생각하는 동포들에게 몇 가지 정보도 제공해 주었다. 호주로 이주하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는데 첫째, 이민이든 유학이든 호주로 오는 것을 결정하는 이유가 아이들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인지를 본인 스스로 확실히 숙지하고 있어야 한며, 둘째, 유학을 생각하는 가정은 아이를 혼자 유학길에 오르게 할 수 없어 한쪽 부모가 동행하는 경우인데, 부부가 떨어져 살게 될 경우 여기에 대한 세심한 준비가 있어야 자녀의 효율적인 유학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셋째, 이민을 생각하고 있는 가정은 이민을 오기 전에 어떠한 일을 할 것이며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인 목표와 계획이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캔버라에는 많은 한인 레스토랑이 있지만 정작 한국인 주방장은 많이 없는 실정이다. 즉, 처음부터 호주에서 음식점을 창업하려고 결심하고 온 사람들이 레스토랑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할 만한 일이 없으니 레스토랑을 차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호주에 도착하기 전에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사전에 파악하고 준비해야 만 호주에 도착해서 그 일에 착수할 수 있지, 도착 후 할 일을 결정하겠다는 안이한 생각은 결국 자신이 원하지 않거나 처음 이상과는 동떨어진 일을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김천주 회장은 면담 당일 한국대사관에서 나온 권재환 서기관에게 몇 가지 당부도 하였다. 첫째는 호주에 입양되어 있는 약 6,000명의 입양아들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이민 알선자에 대한 내용이었다. 호주에 이민을 결정하고 호주에 오는 사람들은 처음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처음 도착한 이민자는 자세한 계획이 없이는 마중 나온 사람들의 집 근처에 살게 될 경우가 많고, 그들이 아는 사람들과 친분을 쌓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직장 역시 비슷한 분야나 아예 같은 직종에 종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결국 처음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들의 영향은 실로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마중 나온 사람의 환경이 처음 이민 온 사람이 새로운 환경을 구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공항에 마중 나오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며, 과연 도움을 줄 만한 자격요건을 충분히 갖추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아무나, 또는 시간이 되는 누군가가 공항에 마중 나갈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직업적으로 좀 더 검증되고 성공적인 이민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나가야 처음 오는 사람들이 좀 더 발전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민사회 내부 자체에서 누가 그러한 일을 할 적임자인지를 선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이 문제를 대사관 차원에서 도와준다면 좀 더 효과적으로 처음 이민 온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대사관의 권재환 서기관도 호주 이민을 생각하시는 한국인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였다. 첫째,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호주라는 나라 자체에 대해 사전 지식을 갖고 이민을 생각 해 보시길 바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주에는 소득세라는 세금제도가 있어서 수입의 일정량을 세금으로 환원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사전에 호주의 세제를 충분히 숙지하고 이민을 결심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또한 이민을 온다는 것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이제까지와는 다른 생활을 하게 된다는 뜻이므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생활에 정착하려는 마음가짐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일에 스스로 부딪혀 봐야 그 안에서 경험과 지식을 쌓을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스스로 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며, 이러한 정신은 이민 후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캔버라 한인회장과의 면담을 마치고 느낀 것은 캔버라는 호주의 다른 여타 도시들과 달리 상업적인 면이 부각되는 도시이기보다는 학업과 공무원의 삶이 주로 이루어지는 도시라는 것이었다. 결국 캔버라는 조용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는 투철한 의지를 가진 한국인들이 이민지로써 택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인상을 갖게 하였다.

2) 애들레이드 이민의 발자취와 교훈
남호주 애들레이드에는 10년 전만해도 교민 가정이 20여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교민이 2,000여명으로 불어났다. 이경연 한인회장은 남호주의 수도 애들레이드는 2000년도 이전까지 호주에서 한국인 이민이 적은 도시 중의 하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아들레이드는 투자가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2008년도에 2만여 명의 각국 이민자들이 아들레이드로 몰려들었다. 아들레이드에 사는 아시아인들의 분포를 보면 베트남인, 중국인, 한국인 순이다. 아들레이드에 사는 한인들은 최근 들어 켐벨타운(Cambell Town)으로 많이 모이는 추세인데, 그 이유는 교통이 편리하고 학군이 좋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도 한국인들의 교육열을 엿보는 것 같다.
이연 전 평통자문위원도 아들레이드 한인사회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한인회가 교민들을, 교민들이 한인회를 서로 받쳐주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아들레이드 한인회는 여기도 호주 내 여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김치와 비빔밥, 그리고 불고기가 서서히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에 축제를 통해 좀 더 많은 호주 사람들에게 한국음식을 알리려고 계획하고 있다. 현재 아들레이드 시에서 집계한 한국유학생들의 숫자는 2,000여 명인데, 이는 예전에 비해 크게 늘어난 수치이다. 아들레이드 한인회는 사업을 목적으로 이주해 온 이민자들을 여러 면에서 많이 도울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들이 호주사회에 빨리 정착하고 좋은 결실을 맺으면, 한인사회도 더불어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시드니 이민의 발자취와 교훈
한국 교민이 제일 많이 살고 있는 시드니 한인회 사무총장 조양훈 박사와 2007년 7월 4일 인터뷰를 가졌다. 그리고 7월 5일 오전에는 김삼오 박사와 같은 날 오후에는 박은성 목사와 대담을 가졌다. 이들 3인에 대한 질의응답 내용과 설문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한인사회와 다른 소수민족 사이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조양훈 박사는 상호 간 대화는 많지 않지만 종종 미팅 날짜를 정하고 만나기도 하며, 또한 정치적인 모임에 가면 시의회 의원들이 모이게 되는데 이 때 서로간의 정보를 주고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2006년 말을 기준으로 이 지역 한국동포는 115,000명이었는데, 이들 중 3만 명이 Working Holiday Visa로 들어온 사람들이고, 다른 3만 명은 유학생, 그리고 나머지 6만 명이 순수 교민이라고 한다.
우리 교민들의 위상을 묻는 질문에 김삼오 박사는 한 나라의 위상은 교민들의 인구수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기 나라의 교민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정치적 이슈가 대두되었을 때나, 어떤 주장을 펴야할 때도 발언권이 강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시드니의 중국화교 숫자는 약 80~9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베트남 교민들도 약 20~30만 명 정도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교민 단체의 활동이 한인회 보다는 활발하다고 볼 수 있다. 시드니의 한인 교민수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지만, 만약 중국 사람들의 Working Holiday Visa가 호주정부 측에서 승인될 경우,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이 호주 전역에 걸쳐 들어오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많은 중국 사람들이 호주로 들어오게 된다면 상대적으로 한인들의 생계나 사업이 어느 정도 타격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한인사회에서는 중국인들에게 Working Holiday Visa가 언제 나올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들이 호주 이민을 오기 위해선 어떠한 절차를 밟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박은성 목사는 한국인의 경우 나이가 45세면 나이 점수가 0이 되지만, 나이가 20대인 경우에는 나이 점수가 20이 되기 때문에 영어점수가 조금 모자라도 나이가 20대인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이민을 오기가 수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래 호주정부는 나이도 적으면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민자를 선호하고 있기 때문에 이민을 오기 전에 어느 정도의 영어실력은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호주는 이민을 선호하는 국가이지만 모든 종류의 기술이민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이 필요로 하는 직종의 기술이민을 원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현재 호주에서는 간호사가 많이 필요하지만 반드시 영어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그렇기 때문에 호주에서 간호사가 필요하다 하더라도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채용을 하지 않는다. 앞으로 청소부와 용접공, 건설업계 그리고 의사와 교사 등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한 기술이민이 이루어지리라 예상되지만 여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영어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할 것이다. 호주로 이민을 와서 자식들은 호주 학교에 보내 놓고 정작 자신은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훗날 영어가 더 편한 아이들과 대화나 의사소통이 어려운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호주로 이민을 온다고 해서 호주에만 머물 생각보다는 세계를 향하여 글로벌하게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한국 유학생들은 방학이면 한국으로 돌아가기에 급급한데, 방학을 이용해 가까운 다른 나라를 방문하고 문화를 체험하는 것은 호주에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좋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3. 이민사회의 명암과 발전적 노력
한국과 호주 간의 긴밀한 협력 이면에는 호주와 이민사회의 갈등도 있어 왔다. 호주 정계나 재계 인사들은 수시로 ‘한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우리 한인 동포들에 대해서도 ‘가장 근면하고 경제적으로 성공한 소수민족’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호주 언론에 묘사된 우리의 모습은 전혀 상반된 느낌을 주기도 한다. 1997년은 아마 호주 한인 동포사회에 있어 영원히 잊지 못할 ‘가장 어둡고 참혹한 기간’이었다고 생각된다. 시드니 모닝 헤럴드(Sydney Morning Herald), 오스트렐리안(Australian) 등의 유력 일간지뿐만 아니라 호주 주요 방송사들도 총동원돼 연일 한인 폭력배 문제를 거론했다. 한인 폭력배들은 조직범죄 단원들이고 이들 조직 폭력배들은 시드니 카지노를 중심으로 불법 고리대금사업권을 두고 주도권 쟁탈전을 하고 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또한 2007년 11월 3일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요사이 택시를 타면 영어하는 택시 기사를 만나기가 어려워 택시 타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면서 그 원인을 한국인 택시기사의 급증현상으로 돌리기도 했다.
호주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이 바라보는 한인사회와 호주언론이 평가하는 한인사회는 엄청난 괴리가 있음이 분명하다. 내부적으로는 목소리도 크고 사소한 일에도 ‘법대로’를 외쳐대는 우리 한인 동포사회가 호주 언론사의 일방적 비판에 대해서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호주 언론 매체에 우리의 정체성을 제대로 정립시키려면 무엇부터 해야 할지 진지하게 숙고해야 할 시점이다.
이곳 호주에서 세 곳의 한인회장들과의 면담을 통해 얻은 정보이지만 이민사회의 어두운 면은 한인사회 자체에도 있다는 것이다. 호주로 이민을 오기 전 한국의 신문과 방송에서도 가끔 같은 동포에게 사기를 친 사건과 사고 소식을 듣기도 한다. 막상 호주로 이민을 와서 이민자들이 한국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 같은 한국 교민을 속이는 경우가 가끔 있다고 하는데, 몇 년마다 한 번씩 터지는 계 파동, 친구에게 속아 평생 모은 돈을 몽땅 날린 사건, 비자 사기사건 등이 그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치솟는 부동산 가격과 사교육비, 치열한 입시경쟁, 합리가 존중받지 못하는 분위기, 정치 및 경제 지도자들의 각종 비리 등으로 한국의 미래를 짊어져야 할 젊은이들을 자꾸만 국외로 떠밀고 있다. 젊은 층 사이에서 호주이민에 대한 열풍이 불고 있지만 장벽은 여전히 높고 문제점도 많다. 이민 갔다고 해서 모두가 그 사회에 성공적으로 편입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민 갔던 이들 가운데 현지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역이민자도 상당수 있다. 2006년 한국의 총 이민자는 11,178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역 이민자는 3,000여명에 달했다(주간 동아 03/09/25). 현지 적응에 실패한 이들 가운데는 가족만 현지에 남기고 자신만 돌아와 ‘반 기러기 아빠’ 신세가 되는 이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물론 이를 역이용해 처음부터 가족이민 형식을 취하면서 자신은 떠나지 않고 남는 이도 있다. 한국 생활의 불안정성을 보완하기 위한 ‘보험용’으로 영주권을 얻어두고 이중생활을 하는 경우이다.
이민자 대열에 선 젊은 층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문은 크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규범이 무너지고 믿음이 실종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민지로 선택한 사회도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국내의 불확실성보다는 오히려 그쪽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세계화 시대인 지금 그들이 한번 떠나면 영구히 우리 사회와 담쌓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로운 외국생활 속에서 더 애국심이 커져 오히려 한국사회에 기여할 가능성도 높은 게 사실이다. 따라서 ‘젊은 이민 행렬’을 한꺼번에 줄일 수 없다면 기왕 떠나는 이들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적극 지원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 사회에 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VI. 결론

호주는 국토에 비해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나라이다. 따라서 국가의 발전을 위해 아직도 이민을 선호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강국이 되려면 적절한 규모의 국토와 인구, 경제력, 국방력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호주는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이민유입을 국가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1975년부터 1983년 사이 호주수상을 지낸 말콤 프레이저(Malcolm Fraser)는 지리적으로 호주 국가의 북쪽에 인구가 많은 대국들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인구가 2천5백만 명 정도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 인구로는 영토를 방어할 능력도 국제 경쟁력을 갖출 조건도 부족하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는 현재의 호주 인구만으로 과연 지난 50년간 이룩한 것 이상을 달성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 하면서 환경이나 물 부족과 같은 문제는 보다 나은 관리 체계의 도입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역설한 바 있다.
한편 유럽인은 물론 아시아인들도 호주로의 이민을 선호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첫째, 그 나라가 영어권이고, 둘째, 기후와 환경이 쾌적하고, 셋째 교육 및 사회보장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국민들도 유학이나 투자이민의 대상국가로 호주를 선호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호주가 이민의 낙원은 아니다. 그 나라에는 아직도 백호주의의 잔재가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강수량이 적어 수자원 부족문제도 안고 있다. 그리고 인구도 적고, 공해 방지를 위해 공장신축도 통제됨으로 공장도 많지 않고 따라서 일자리 찾기가 힘들다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영어를 구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동아시아 국가들, 즉 한국, 중국, 일본의 유학 열풍을 당분간 잠재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호주는 원래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국가이므로 투자이민으로 가서 성공하기가 비교적 쉬울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도 그 나라로의 이민을 선호하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비록 우리나라의 이민정책이 이민을 권장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호주로의 유학이나 이민을 고려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 나라에서의 정착을 위하여 지원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도 호주 이민의 기원과 현상을 분석해 보고 앞으로 호주로의 이민이나 유학을 준비 중에 있는 국민들에게 준비과정에서부터 정착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편집해 보았다. 이미 언급한대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도 국민 대비 이민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들 중의 하나이다. 국가발전과 이민의 관계를 따지기 전에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민의 역할과 비중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경우 타국으로의 이동이 자의에 의한 자발적 이주였든, 타의에 의한 강제 이주였든 상관없이 이주자들은 한민족의 활동 범위를 그만큼 넓혔고 국위를 선양하였으며,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군에 자금을 조달하고 직접 일본군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해 온 것도 사실이다.
또한 해방 후에는 해외에 나가있던 동포들이 외화를 송금하고, 최근에는 한상(韓商)들이 우리나라에 투자하고 국내기업과 합작이나 무역을 통해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일부 재외동포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국가에서 정치가, 기업가, 사회사업가 등으로 한국인의 위상을 제고하고 있으며, 그들은 오늘날 한류의 확산과 함께 세계 속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호주로의 이주역사는 그렇게 길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유학생이 늘어나고 투자이민이 활성화되면서 호주 이민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민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영어라는 언어 장벽을 일차적으로 극복해야 하고, 서로 다른 문화적 충격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민을 받는 나라의 정책도 중요하겠지만 이민을 가고자 하는 개인의 태도도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아무런 준비 없이 무턱대고 이민을 가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면 어떤 국가가 좋아하겠는가? 이민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나라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아보고 연구하여 행복한 이민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사전 준비를 면밀하게 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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