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연구소 임원 연길-하얼빈 역사기행
Subtitle
  연변대 동북아연구소 방문
Date
  2014.06.03
Register Date
  2014-06-03
Count
  4658

   
 
 
 
 
 
 
 
 
 
 
 
 
 
 
 
 
 
연길-하얼빈 여행
<2014.04.28.~05.02 4박 5일>

◈ 1~3일차 도문, 연길, 용정
1) 도문시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적지
1920년대 만주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의 포문을 연 봉오동전투는 청산리대첩과 함께 독립군의 위대한 전투로 꼽힌다. 이는 1920년 6월 4일 삼둔자전투에서 시작됐다. 삼둔자란 두만강 중류 북쪽 대안의 한 마을 이름이었다. 그 옛날 홍범도 장군은 이 마을에 와서 두만강 너머 고국산천을 바라보며 “아! 내가 실로 몇 년 만에 고국산천을 바라보는 것이냐”하며 탄식했다고 한다. 독립군은 바로 이곳을 기점으로 일본군을 크게 격퇴했다. 그것이 곧 삼둔자전투다. 삼둔자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이후 대대병력으로 독립군을 추격하였고 마침 봉오동의 독립군 기지와 두만강 가에 있는 고려령이란 산을 목표점으로 삼았다. 고려령을 넘으면 봉오골이 나온다. 이는 사면이 야산으로 둘러싸인 천연 요새였다. 이곳에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의 부대는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부상자를 낸 반면, 독립군은 장교 1명, 병사 3명이 전사하고 약간의 부상자를 냈을 뿐이다. 봉오동전투는 독립군 세력이 더욱 커지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이후 10월의 청산리대첩으로 가는 발판이 되었다. 이곳 봉오동 항일유적지에는 봉오동전투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있다. 도문시 인민정부에서 봉오동전투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1993년 건립한 것이다. 기념비 뒤편으로 난 산길을 따라 걷다보면 이내 봉오동 저수지가 나오는데 그 뒤로 드넓게 펼쳐진 봉오골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2) 대윤동주 시인의 발자취(용정)
연길에서 용정까지는 버스로 약 1시간 남짓. 중국 내 조선족이 가장 먼저 이주한 곳이자 동시에 현재까지 조선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다. 1870년대 말엽 처음 조선족 마을이 조성되었고 현재 70% 이상이 조선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족이 오히려 우리말을 배우는 실정이라고 한다. 용정은 우리 민족이 본격적으로 벼농사를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 때문인지, 용정으로 가는 길목에는 벼가 출렁이는 논의 풍경이 어느 곳보다 쉽게 눈에 들어온다. 옥수수 등의 구황작물을 기르는 밭농사가 한족의 특징이라면 벼농사는 조선족만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용정은 또한 3·13만세운동으로 유명하다.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이곳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항일운동이다. 이는 만주지방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 과시한 뜻 깊은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3) 용대성중학교
지금은 용정중학교 안에 위치한 옛 대성중학교는 대성유교의 공교회에서 세운 학교다. 1921년 7월 11일 정식으로 개학했다. 학교의 옛 건물은 용정중학교 역사기념관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1996년에 이를 헐어내고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성중학교는 뭐니뭐니해도 젊은 저항의 상징인 윤동주 시인의 모교로 유명하다. 학교 건물 앞쪽에는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곳에는 그의 대표작 〈서시〉가 새겨져 있다.

序詩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옛 건물 안에는 용정시 연혁과 용정시가 낳은 자랑스러운 인물들을 소개하는 용정중학력사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대성중학교를 비롯한 명동학교, 정동학교 등 민족학교에 대한 자료도 함께 전시되었다. 그리고 윤동주 시인의 기념관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그의 빛바랜 사진이나 육필원고, 성적표 등이 답사단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대성중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문익환 목사의 모습도 만나볼 수 있다. 현재의 기념관은 독립기념관과 연변대학교 민족연구원 민족역사연구 공동으로 내부 전시자료를 교체 보완하여 2005년 12월에 다시 개관한 것이라고 한다.
그 오른쪽 건물은 이상설 기념관. 1906년 8월 이상설을 중심으로 이동녕, 여준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일치단결하여 세운 연변 최초의 신식 사립학교인 서전서숙에 대한 자료와 그의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항일민족교육을 통한 독립군 양성소로 기능했던 서전서숙의 옛 터는 현재 용정시가 중심의 용정실험소학교 구내에 있다고 한다.

4) 명동촌
명동촌은 1899년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 김약연 목사를 비롯하여 문병규, 남종구 등 6가족 141명이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기 위해 이 지역으로 집단이주를 단행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명동촌은 1905년 경 마을이 거의 완성되어 선바위골, 장재촌, 수남촌 등 명동을 중심으로 한 50리 안팎에 잇따라 마을이 형성되었다. 현재 그 입구에는 윤동주 생가 터를 기념하는 바위 표지석이 서 있다. 그리고 마을 내부로 들어서면 김약연 기념비, 명동교회 터, 윤동주 생가 등이 위치한다. 명동교회 터는 현재 명동역사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김약연 목사의 기념비. 윤동주 시인의 외삼촌이기도 한 그의 기념비는 홍위병들이 훼손해 땅 속에 묻혀 있다가 지난 1994년 그 모양 그대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그 곁에 가까스로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의 우듬지가 인상적이다. 이곳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에 의해 목이 매달린 채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그곳 안내원은 전한다.

5) 청산리대첩 무대
용정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답사단은 오후 2시경 화룡으로 이동했다. 용정에서 화룡까지는 버스로 30분 정도. 용정에서 화룡으로 향하는 길목 비암산 기슭에는 자그마한 소나무와 정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일송정이다. 버스 차창으로 내다본 일송정은 먼 산 위에 마치 하나의 작은 점처럼 떠있다. 화룡에 도착한 답사단은 먼저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를 찾았다. 대리석으로 만든 가파른 계단을 걸어올라 당도한 산기슭 5000㎡의 대지 위에 세워진 거대한 기념비. 그 주변을 휘돌아 70리에 이르는 청산리 계곡 전체가 청산리대첩의 무대가 됐던 곳이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대일승첩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청산리대첩. 독립군은 1920년 10월 21~26일까지 엿새 간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천수평, 어랑촌, 완루구, 고동하 등지에서 10여 회의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하였다. 김좌진,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는 5,000여 명의 일본군 아즈마(東正彦) 주력부대와 벌인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은 약 700명,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은 약 1900명의 병력이 있었다고 한다.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는 청산리전투를 기리기 위해 2001년 8월 31일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수건위원회가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청산리대첩 80주년에 즈음하여 건립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부실공사와 관리 소홀 등으로 비석의 일부는 파손됐다.

6) 대종교삼종사묘
1907년 단군정신을 표방한 민족종교인 대종교의 삼종사, 즉 홍암 나철, 백포 서일, 무원 김교헌의 묘가 있는 곳이다. 이들은 1920~30년 무렵 화룡시 청파호를 기지로 반일계몽운동과 반일교육활동을 진행했다. 묘 뒤편에 세워진 비문에는 ‘북로군정서 소속의 반일무장부대와 국민회 소속의 반일무장부대가 1920년 10월 화룡지구에서 협동작전을 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청산리전투는 일본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반일운동이 깊이 있게 전개되도록 힘있게 추동하였다’라고 적혀있다. 실제로 북로군정서군의 장병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7) 도문(투먼: 圖們)
중국도문은 조.중 국경지역으로 상권이 크지 않은 작은 도시이다. 도문은 지린성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북한과 두만강을 사이에 둔 국경 도시로 두만강 건너편은 한반도의 최북단인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시와 마주보고 있다. 두만강을 우리는 豆滿江이라고 쓰고 중국은 图们江(투먼지앙, 도문강)이라고 썼다.
도문은 연길에서 한시간정도 차량으로 이동을 하여야 하며 북한의 남양시와 마주한 변방도시입니다. 지나가는 아주머니 붙잡고 ''''도문에서 젤 유명한 식당이 어디냐고'''' 여쭤봤더니 "아리랑식당"이라고 한다. 식사비는 65 위안 정도.
도문은 영상을 통해 자주 보던 두만강가의 중국 국경 도시다. 우리 일행 네 사람은 택시를 이용하여 두만강과 도문 여행에 나섰다. 한데 일행도 아직은 중국말이 서툰데다 워낙 한국 사람이 봉으로 인식된 탓인지 600위안이라는 터무니 없는 가격을 부른다. 우리를 안내한 민박집 아주머니를 앞세워 협상한 끝에 260으로 합의를 보고 도문으로 고고~~(어쨌든 연길-도문-만천성선녀봉-연길로 이어지는 여행길은 약 5만원의 택시비를 지불하며서 시작되었다.) 한데 이 중국 기사양반 운전 모습이 거의 카레이서급이다. 참고로 중국은 자동차가 절대로 행인에게 양보를 안한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을 보고도 속도조절 없이 그대로 돌진한다. 그러면 사람이 피해주어야 한다. 행인보다 자동차가 우선이라니 할 말이 없다.^^ 어쨌든 이 기사양반 크락숀 신나게 울리며 달려 시내를 벗어나는 사이 동행한 두 여성은 그냥 청룡열차 탄 듯 비명이 끊이지 않는다.

3) 훈춘
훈춘은 러시아,중국,북한 세나라의 접경지역이다. 원래는 훈춘시내에서 쏘다닐 예정이었으나 접경지역에 가보고 도문에 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훈춘 방천 지역에 도착했다. 길림성 8경중 하나라고 한다. 중국, 러시아, 북한 3국의 접경지역이다. 입장료 20원. 훈춘과 도문 오는 길 곳곳에는 조선족 마을들이 많다. 옛날에는 국경의 개념도 없이 서로 드나들면서 살았다는데, 이젠 북한과 인접해 있어도 드나들지 못한다. 그리고 이곳도 젊은이들은 별로 없다. 모두 대도시로 나가버리고. 노인들만 마을을 지키고 있다. 훈춘에서 도문까지는 54Km이다.

● 연길,하얼빈 방문기 - 중국 기차 여행 [
중국 열차의 특이점 중 하나가 객차에 올라타면 승무원이 종이표를 회수하고 카드표를 내준다. 그러다가 승객이 목적지에 다다를 30분 정도 전에 다시 카드를 회수하고 종이표를 준다. 그리고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가면 대합실 들어가기 전에 짐과 몸에 대한 X-ray 스캔을 합니다. 마치 비행기 탈 때처럼...

* 중국의 열차 종류
(1) D- 动车组(dongchezu) 우리나라로 치면 KTX급입니다.
(2) Z—直达特快列车: 우리나라 새마을호의 개념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3)K—快速列车
우리나라 무궁화호 비슷한 등급이라고 볼 수 있지만, 실제 보면 우리나라 무궁화호가 훨씬 고급스럽습니다.
(4) 普通列车: 우리나라의 예전 통일호의 느낌이랄까...
2. 중국의 열차 좌석 등급
(1) 경좌(硬座 : 잉쭈어yingzuo)
''''딱딱한 좌석''''입니다. 열차 중 가장 일반적인 좌석이고 보통 기차가 끌고 다니는 열차 차량의 반 정도가 잉쭈어로 되어 있다.
(2) 연좌(軟座 : 루안쭈어 ruanzuo) 잉쭈어보다 상위 좌석이고 의자크기가 잉쭈어보다 크고 폭신하다.
(3) 경와(硬臥 :잉워 yingwo)
3층 침대가 마주 보고 있는 6인 객실을 의미한다. 침대는 루안워보다 딱딱하고 객실이라고는 하지만 칸막이는 없다.

2. ‘동방의 모스크바’ 하얼빈
자세히 들여다 본 도시는 조금 색다른 느낌을 주기도 한다. 러시아와 중국의 문화가 뒤섞인 이 선묘한 풍광이란…. 중국 상점의 휘황한 간판 곁으로 잎사귀가 크고 키가 껑충한 나무들과 유럽식 둥근 지붕의 건물들이 잇따라 서 있다. 그래서인지 중국 최북단에 위치한 이 도시는 오늘날 ‘동방의 모스크바’라 불린다. 만주족 말로 ‘그물 말리는 곳’을 이른다는 하얼빈. 그 이름처럼 예전에는 소규모 어민 가정이 모여 사는 한가로운 어촌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가 동청철도를 건설하면서 외국인 거주자들이 속속 생겨났고, 이후 경제·문화의 유례 없는 발전을 이뤘다. 도시는 대번에 상업, 교통의 요충지로 발돋움했다. 처음 조선인들이 하얼빈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 역시 그 무렵이다. 현재 중국에 있는 200만 명이 넘는 조선족 가운데 40만명 가량이 하얼빈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하얼빈은 무엇보다 안중근 의사가 남긴 그 유명한 유언으로 먼저 기억되는 곳이다.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옆에 묻어두었다 국권이 반환되면 고국으로 가져가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간 의사의 넋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2) 해림
하얼빈시 평방구에 위치한 일본 관동군 731부대 유적지. 하얼빈에 세워진 세계 최대 규모의 비밀부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세균 병기의 위력을 확신한 일본 관동군이 만주지배를 발판으로 세균전 연구를 자행한 곳이다. 문을 들어서자 드넓은 뜰 정면으로 본부 건물이 보인다. 그 옆 비석에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생화학무기와 생체실험을 위해 조선, 중국, 러시아, 몽고인 등 3000명 이상의 무고한 생명을 독가스, 동사, 세균 등의 실험 ‘마루타’로 사용했다는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건물 내부에는 당시의 처참한 광경을 재연한 모형과 익명으로 남은 ‘마루타’들에 대한 기록 등이 전시되어 있다. 내부 전시물에 대한 사진촬영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실상 엄격한 편은 아니라는 가이드의 귀띔에 한두 번 셔터를 눌러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도끼눈을 한 안내원들이 어느 샌가 곁으로 다가와 선다.

3) 하얼빈시 도리구의 조선민족예술관
총 7층 높이인 이 건물의 1, 2층은 안중근 의사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다. 평소 20위안의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지만 매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일이면 특별히 무료입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정문을 들어서면 먼저 의사의 흉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청주미술협회 작가들이 의사의 단지된 손을 형상화하여 만든 브론즈 조각품 ‘거룩한 손’도 시선을 끈다. 옆 부스에서는 의사의 일생을 조명하는 영상물 상영이 한창이다. 그 뒤로 의사의 초상화를 비롯한 활동사진과 신문, 문서 등 행적에 대한 갖가지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안중근 의사 할빈에서의 열 하루’에 대한 내용은 글과 그림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대신이었던 코코브체프를 만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한 뒤 몰래 하얼빈으로 숨어들었던 1909년 10월 22일부터 이토를 사살한 10월 26일, 그리고 이후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지하 감옥 취조실에서 닷새 간 조사를 받고 여순행 열차에 올라 하얼빈을 떠난 11월 1일까지의 기록이다. 둘째 날인 7월 24일, 하얼빈을 떠나기 직전 답사단은 아침 일찍 하얼빈역으로 향했다. 안 의사가 권총으로 이토를 저격하고 하얼빈 총영사 카와카미,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등 일제 첨병들에게 중상을 입힌 역내 의거 현장을 참관했다. 이제는 하얼빈 역사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생겼다니 가 봐야겠다.

4) 기타 볼만 한 곳
◆애국열사 ≪안중근 의사 기념관-하얼빈 조선민족 민속박물관≫

◆유럽풍의 건물들이 즐비한 번화가 ≪중앙대가≫

◆1907년 러시아군을 위해 설립된 원동지구의 교회당 ≪성소피야성당≫

◆송화강변에 위치한 하얼빈 대표적 건물 ≪방홍기념탑≫

◆발해국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흑룡강성박물관≫

◆백두산 호랑이를 가볼 수 있는 동북범 사육장 ≪동북호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