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의 현대적 함의
Subtitle
  제5회 역사NGO세계대회 연구소 심포지엄
Date
  2013.07.24
Register Date
  2013-07-26
Count
  10245

   
 
 
 
 
 
 
 
 
 
 
 
 
 
 
 
 
 
 
 
 
 
2013 역사NGO 세계대회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포럼
2013 History NGO World Conference
Forum by the Institute for East Asia Peace Studies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의 현대적 함의
Interpretation of Ahn Joong-Geun's ‘On Peace in East Asia'



7월 24일(수) 오후 세부 일정(Afternoon session)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Ahn Joong-Geun' Oriental Peace Theory>

◈ 제 1부 등록 및 상호 인사 (Registration and Greetings)
▶ 13:00-13:10 등록 및 인사 (Registration and Greetings)
◈제 2 부 학술회의 (Forum)
 사회: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교 교수
Panel Coodinator: Professor Hosaka Yuji (Sejong University)
▶ 13:10-13:15 환영사: 연구소 소장
Welcome address: Dr. & President Lee Jae-Hyung of the IEAPS
▶ 13:15-13:45 중국 유학생 오영매 발표
Presenter: Wuyongmei, Chinese student
▶ 13:45-14:15 한국 학생 이로미 발표
Presenter: Lee Ro-Mi, Korean student
▶ 14:15-14:45 일본 유학생 카와무라 미사키 발표
Presenter: Kawamura Misaki, Japanese student
▶ 14:45-15:00 휴식(coffee break)
▶ 15:00-15:10 일본 유학생 카와치노 요코 토론
Discussant: Kawachino Yoko, Japanese student (To Wuyongmei)
▶ 15:10-15:20 중국 유학생 오연 토론
Presenter: Wujuan, Chinese student (To Lee Ro-Mi)
▶ 15:20-15:30 한국 학생 우제경 토론
Presenter: U Jae-Gyung, Korean student (To Kawamura Misaki)
▶ 15:30-15:40 발표자, 토론자 질문에 대한 답변
Answers to the discussants by presenters
▶ 15:40-15:50 참석자 질의 및 응답
Questions & Answers by audience and presenters
▶ 15:50-15:55 사회자 결론
Closing remarks by Panel Coordinator
▶ 15:55 폐회 (Forum Ends)

* 연구소장 환영사
Welcome Address
by Dr. Jae-Hyung Lee, President of IEAPS.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소장 이재형입니다.
Good afternoon, Ladies and Gentlemen!
I am Dr. Lee Jae-Hyung, President of IEAPS. Thank you very much for your participation and concerns for today's forum.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할빈역에서 일본의 초대 총리대신이었고 대한제국의 초대 통감이었던 이등박문을 살해하였습니다. 당시는 일본이 1905년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시늑약이 체결된 직후였으며,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하려든 시기였습니다.
On October 26, 1909, Ahn Jung-geun assassinated Itō Hirobumi (伊藤博文), the first Prime Minister of Japan and then-Japanese Resident-General of Korea, following the signing of the Eulsa Treaty(乙巳條約: The Japan–Korea Treaty of 1905, deprived Korea of its diplomatic sovereignty and made Korea a protectorate of Japan), with Korea on the verge of annexation by Japan.

안 의사는 거사 당시 현장에서 러시아 경호원에게 체포되었고, 곧 일본 당국에 인계되었습니다. 안 의사는 법정에서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그가 동양의 평화를 방해하고 한일관계를 소원하게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Afterwards, Ahn was arrested by Russian guards who held him for two days before turning him over to Japanese colonial authorities. In the court, he said that “I killed Ito Hirobumi because he disturbed the peace of the Orient and estranged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Japan.”

안 의사는 동아시아의 대국 중국, 한국, 일본, 이 세 나라가 굳게 단결하면 ‘백인들의 위험’, 즉 이 지역에서의 유럽 제국주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고, 동아시아의 평화회복은 가능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Ahn strongly believed in the union of the three great countries in East Asia, China, Korea, and Japan in order to counter and fight off the "White Peril", namely, the European countries engaged in colonialism, and restore peace to East Asia.

안 의사는 이제 이토 히로부미는 죽었으니, 한일 양국은 많은 전통과 역사적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친구관계로 발전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한일 양국의 연합에 중국까지 우호대열에 합류한다면 동아시아의 삼국은 국제사회가 닮고 싶어 하는 인접국가 간의 우호협력관계 모델케이스가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Ahn felt that with the death of Itō, Japan and Korea could become friends because of the many traditions that they shared. He hoped that this friendship, along with China, would become a model for the world to follow.

그는 저서 ‘동양평화론’에서 ‘범아시아의 평화’ 사상을 피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형이 예상보다 앞 당겨지는 바람에 이 책자가 완성되지는 못 했습니다. 그는 ‘동양평화론’에서 한중일 삼국의 연합방위군과 화폐통합을 제안하였습니다.
His thoughts on Pan-Asianism were stated in his essay, "On Peace in East Asia" (東洋平和論) that he worked on and left unfinished before his execution. In this work, Ahn recommends the organization of combined armed forces and the issue of joint banknotes among Korea, Japan, and China.

메이지대학 법학과 사사가와 노리카추 교수는 안 의사의 아이디어는 오늘날의 유럽연합과 비유할 만한 혜안이었으며, 국제연맹의 개념을 10년이나 먼저 착안해낸 발상이었다고 극찬했습니다.
Sasagawa Norikatsu (笹川紀勝), a Professor of Law at Meiji University, highly praises Ahn's idea as an equivalent of the European Union and a concept that preceded the concept of the League of Nations by 10 years.

안 의사의 투철한 정신과 정의감, 그리고 인간미를 보고 감옥의 일본인 간수들, 제판과정에서 일본인 변호사와 검사들도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While Ahn was staying in the prison and on the trial, many Japanese prison guards, lawyers and even prosecutors were inspired by Ahn's great spirit, righteousness, and humanity.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자 한국인은 물론 당시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맞서고 투쟁하고 있던 다수의 중국인들도 그를 높이 칭송했던 것입니다. 당시 중국의 저명한 지도자 원세계와 손문은 시를 지어 그의 쾌거를 격찬했습니다.
The assassination of Ito by Ahn was praised by Koreans and many Chinese as well, who were struggling against Japanese invasion at the time. Well-known Chinese political leaders such as Yuan Shikai (袁世凱), and Sun Yat-sen (孫逸仙; 孫文) wrote poems acclaiming Ahn.

안 의사는 여섯 번의 재판 후 일제의 법정에서 사형이 언도 되었고, 뤼순에서 1910년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얼빈에 있다고 하는 그의 무덤은 아직도 발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After six trials, An was sentenced to death by the Japanese colonial court, the execution took place in Ryojun, on March 26, 1910. His grave in Harbin hasn't been found yet.

이제 우리는 그의 유해를 우리나라로 송환하고 아직도 찾지 못한 그가 남긴 유명한 붓글씨 휘호와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 원본을 찾는데 온 국민적 힘을 결집해야 하겠습니다.
We, all Korean people have to bring his remains from Harbin to his motherland, and eager to find his renowned calligraphy works, and original copies of his two books, namely, 'History of Ahn Eung-Chil' and 'On Peace in East Asia'.

본 세미나를 통해서 이러한 미완의 과제를 우리 국민에게 부각시킴은 물론 관련국가인 중국인과 일본인들에게도 그의 정신을 널리 홍보하여 그들이 보관하고 있는 안중근 의사의 유물들을 자발적으로 한국에 반환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자 합니다.
Through today's forum, I hope we illuminate above unaccomplished tasks to the peoples of Korea, China, and Japan, and thereby whoever has his relics would willingly return them to the Korean government.

또한 그의 동양평화론 사상에 입각하여 이 지역 국가 국민들이 서로의 반목을 청산하고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계기로 삼기를 기대합니다.
I also anticipate that through his 'Oriental Peace Theory', all peoples of East Asia clear off antagonism of the past, and try to open a new era pursuing peace and prosperity of the region.

그러면 오늘 학술대회의 사회를 맡아 주실 세종대학교 호사카유지 교수님을 소개하겠습니다. 교수님은 현재 세종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겸 세종대독도종합연구소장으로 재직하고 계십니다. 발표자와 토론자의 소개는 차후 사회자가 해 주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오늘 참석해 주신 내외 귀빈 여러분들께 고맙다는 인사말씀을 드리고 아울러 모든 분들께 건강과 행운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I would like to introduce today's panel coordinator. Professor Hosaka Yuji will preside over the symposium. He lectures at Sejong University in Seoul. He is also the President of Sejong University's Dokdo Research Institute. In the early stage of the event, Professor Hosaka Yuji will introduce today's presenters and discussants. I once again thank you very much for your concerns and participation in this meaningful symposium, and I wish you all the best. Thank you very much.

* 안중근 의사를 통해 바라본 한중 관계의 미래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학
오영매

목 차
1. 서론
2. 안중근 의거
1) 안중근 의거
2) 안중근 의거가 중국사회에 미친 영향
3.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1) 동양평화론이란 무엇인가
2) 현대사회에서 볼 수 있는 동양평화론
4. 한중 관계의 미래
5. 결론


1. 서론

한중 양국은 1992년 부터 정식 수교한 지 약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아시아 국가로서 한국과 중국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 문화사상을 공유되고 있으니 통하는 부분도 많다. 이러한 문화, 역사배경 속에서 그 동안 한국과 중국의 외교관계는 시대에 따라 ‘우호협력관계’‘21세기를 향한 협력동반자 관계’‘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로 발전하였다. 각 시대의 특징은 조금씩 다르지만 한중 양국은 20여년 간의 공통된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협력관계이다. 협력관계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한 나라의 발전은 그 나라의 경제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또한 정책을 얼마나 잘 새우는지, 국민의 생활수준은 높은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국과의 관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어떻게 보면 결정적인 요소라고도 볼 수 있다. 안전한 환경을 지켜야 국민들의 생활 원동력이 생기고 국가의 발전도 기본적으로 보장을 받을 수 있다. 한국과 중국은 매우 가까운 이웃이고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는 중국의 번영과 안정에 직결된다. 따라서 한반도와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올해는 한국과 중국에게 아주 특별한 해이다. 2013년2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시진핑 주석도 같은 해에 중국의 주석이 되었다. 두 나라 모두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이전과 다른 외교관계를 맺으려고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27일-30일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남겼다. 그것은 첫째 청화대에서의 연설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정치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국민의 신뢰라는 것이다. 외교도 역시‘신뢰외교’를 기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은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앞으로 더욱 발전적인 대화와 협력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그는 지난 20년 동안의 성공적 한중 관계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뢰의 여정을 시작하고자 한다고 했으며 한중 관계가 이제 더욱 성숙하고, 내실 있는 동반자 관계로 발전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현재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 정세는 매우 불안정하고 역내 국가 간의 경제적인 상호의존성이 확대되는 반면, 역사와 안보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불신으로 인해 정치, 안보 협력이 위협받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를'아시아 패러독스'현상이라고 불렀다. 지금 동북아에는 역내 국가 간에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고 평화와 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다자적 매커니즘이 없다고도 하였다. 더욱이 그는 국가 간에도 서로의 신뢰를 키우고, 함께 난관을 헤쳐 가며, 결과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긴요하므로 점차 정치, 안보 분야까지 협력의 범위를 넓혀가는 다자간 대화 프로세스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신념이 담긴'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이 한국과 중국이 신뢰의 동반자가 되어 '새로운 동북아'를 함께 만들어 가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 둘째는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과 회담에서 한국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를 중국 하얼빈시에서 한중 양국 국민들이 모두 존중하는 역사 인물인 안중근 의사의 기념비 새우기를 바란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아주 깊은 뜻이 담겨져 있고, 역사를 통해서 한중 양국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맺고 싶어 하는 그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과거의 역사를 살펴보면, 안보와 평화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의사들이 수없이 많았다. 각 국가마다 자신의 피를 흘리며 눈물을 삼키면서 오직 자신의 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를 지키려는 의사들도 많았다. 각 시대의 영웅들은 자국의 평화를 되찾는 일에 의미를 둔 것만이 아니라 인류가 추구해온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도 자시의 모든 것을 바친 분들이다. 특히 안중근 의사는 한중 양국에 대해 매우 중요한 역사인물로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 역할의 의미 또한 크고 깊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은 안중근 의사를 통해 그 시대에 안중근 의사라는 존재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또한 의거한 후 저술한 미완성의‘동양평화론’의 의미도 함께살펴보고자 한다. 특별히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과거를 넘어서서 현대사회에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또한 이것을 통해 바라본 한중 관계의 미래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도 하는 문제도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2. 안중근 의거

1) 안중근 의거

1909년 10월26일 오전9시, 중국 하얼빈 기차역 플랫폼에서, 한국의 민족영웅 안중근 의사는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당시 일제 추밀원 의장인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체포되어 기차역 안에 설치된 러시아 헌병대 파출소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러시아정부는 일본의 요구대로, 안중근 의사가 일본의 전임 조선통감을 사살한 것은‘살인 행위’로 재판 관할권은 일본정부에 속한다고 보았다. 안중근 의사는 여순감옥에서 11차의 심문을 받았다. 일본 검사의 심문에게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죽인 것은 대한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를 의해서였고, 나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해서였으며, 의병 참모 중장의 신분으로 한국을 위해 실행하였으므로 보통 자객의 소행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라고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하지만 결국 일제는 불법적으로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이 사건은 중대한 정치사건으로서 세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당시 세계의 보도 태도는 주로 3가지로 분류되고 있다. 첫째는 안중근 의사를 비판하며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하는 일본 측과 한국 친일 언론들이다.
둘째는 단지 객관적인 보도를 하며 안중근 의사의 행위에 대해 평가하지 않은 프랑스 등 서양의 보도이다. 당시 한국 국내의 보도도 대체로 여기에 속한다고 판단된다. 물론 안중근 의거의 과정과 신문(訊問)상황을 자세히 보도를 했지만 전면적으로 안중근 의거를 찬양을 할 수는 없었다.
셋째는 공개적으로 안중근 의사를 애국의사, 평화의 대표자라고 극찬을 한 주장이다. 이것은 국외 한국 언론과 상다수의 중국의 보도에서 나타난다. 안중근 의사의 민족정신과 영웅기개는 반일투쟁을 고무시켰다. 특히 당시 하얼빈에 있던 한인들의 항일활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10년, 하얼빈에서‘대한기독교청년회’,‘대한국민회 민주리아지역총회’,‘항일소년단 하얼빈지단’,‘대한공립회’등 항일 단체들이 잇따라 나타났다. 항일사상교육을 실시하고 애국정신을 선전하며 교육을 발전시키고 독립운동을 벌였다.
여기서 안중근 의거에 대한 다른 평가에서 과연 어떻게 이 의거의 정당성을 인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등장한다.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첫째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은 한국을 침략한 원흉과 동양평화의파괴자를 처단한 것으로 정의가 불의를 징벌한 의거였다. 둘째로 당시 한국과 일본은 전쟁 중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의병 투쟁의 계속이며 반일전쟁의 일종의 수단이었다. 셋째로 안중근 의거는 세계인에게 일본의 침략 행위를 폭로하였고 국가 독립을 위해 싸우는 한인의 기개를 과시하여 민족의 각성을 불러일으킨 점에 역사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2) 안중근 의거가 중국사회에 미친 영향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안중근 의거는 중국 인사들의 극찬을 받았고, 많은 영향을 중국인에게 끼쳤다. 그 당시의 중국인은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였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한국인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중국인을 대신해 복수를 했다는 인식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많은 중국인들에게 안중근 의거는 중국인에게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 이른바 1919년 5월4일 중국에서 일어난 “5•4운동”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 시기 전후, 중국 각 지역에서 안중근 의거 연극을 많이 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중국인들은 안중근 의사를 평화의 모델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중국에서 안중근 의거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다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들이 주목된다. 주은래는 『중조 역사관계에 대
한 담화』에서 “중일갑오전쟁 후, 중조인민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는 공동투쟁은 본세기 초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고 지적하였다.
또한 조선인들과 깊은 감정적 교류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저명한 아나키스트이자 중국 현대 문학의 가장 걸출한 문필가인 파금은 자신의 자서전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조선인들의 고난과 투쟁에 관해 많이 들어 왔다. 특히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역사적 사실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안중근은 소년시절의 내가 숭배했던 영웅이었다.”
그리고 남경국민정부주석이며 중국국민당 총재를 지냈었던 장개석이 1962년에 한국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장렬한 일생 천추에 빛나리.”라는 추념사를 써주었다. 이러한 평가를 통해 당시 안중근 의사는 중국인에게 대단히 중요한 영웅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은래의 평가를 보면 안중근 의사는 한국의 국경을 넘어서 한중양국간의 관계를 굳건히 맺는 존재로도 볼 수 있다. 그 시절 국가를 지키고자 세계의 평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은 추앙받아 마땅하다. 더 훌
륭한 것은 세상을 공존과 평화라는 시선으로 바라본 그 자체가 중국인에게 상상 의상의 가치를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파금같은 작가가 영웅으로 숭배한 안중근 의사는 한국인들에게만 중국인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남겼고 그 만큼 큰 영향력을 끼쳤다. 안중근 의사를 영웅으로 받들고 중국과 세계를 위해 노력하는 중국인도 점차 생겨났다.
그러나 여기에서 일본과 서양의 침략을 받아온 중국에 왜 안중근 의사처럼 눈에 뛰는 운동가가 나타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당시의 중국인은 일본의 침략에 대해 대응할 의지가 부족했던 것인지 아니면 힘이 없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포기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생긴다. 과연 그 시절에 개인이라는 존재를 나라와 연관시켜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중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을까? 수천년간의 봉건사상과 황제제도의 영향 속에서 거대한 힘에 부딪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불가능 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자신의생활을 유지할 것인가 하는 일에만 집중을 한 데 그 원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중국인들의 사상도 시대에 따라 발전을 해왔을 텐데 당시에서만 종종 한계에 부딪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상가와 행동파는 동일한 사람일 수도 있고 전혀 상관없을 수 도 있다. 안중근 의사는 사상과 행동이 일치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행동으로 표출했다. 하지만 그 당시 중국의 사상가들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겠다는 의지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였다.
중국은 봉건사상 소농의식의 영향을 오래전부터 받아왔고 개인 혹은 가문이란 개념에 익숙하다. 국가의 위기는 자신의 위기, 국가의 불행은 자신의 불행이라는 사고방식은 없을 수도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위급한 상황에서도 피동적으로 당하기만 하였던 것은 그 시대 중국의‘비극’라고도 볼 수 있다. 그 원인이 사상의 결핍성 때문인지 뭔가가 두려워하여 행동을 못하였다는 데있는지 하는 문제는 앞으로의 연구과제이다. 이는 중국의 지성사를 심도 있게 연구해야만 해결될 수 있는 일로 보인다. 무엇보다 안중근 의거가 중국의 지성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안중근의사라는 존재는 중국에 대해 매우 특별한 존재이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에서 안중근 의사가 그와 같은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안중근 의사는 소년시절부터 일제의 침략아래 고난의 생활을 직접 겪으면서 일본정부와 제국주의의 침략 본성을 확실히 깨달았다. 안중근 의사 가문의 가훈은 ‘정의’이었고 그의 부모님들은 그를 가장 올바른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교육하였다. 민족과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정의’라는 가훈은 안중근 의사 성장에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정의’즉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삶의 최고의 가치로 여긴 조선의 선비들의 전통 속에서 안중근이라는 인물이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3.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1) 동양평화론이란 무엇인가

안중근 의거도 매우 의미적인 사건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은 동양평화론이다. 물론 일제의 탄압으로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완성할수 없었다. 하지만‘서문’과‘전감’만으로도 안중근 의사의 위대한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우선 동양이란 한국, 중국, 일본 삼국을 중심으로 태국, 미얀마이 포함을 하는 범아시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대저 합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한다는 것은 만고에 분명히 정해져 있는 이치이다.” 이것은 동양평화론 서문의 첫 마디이다. 이 말은 동양평화론의 핵심이자 아시아 각국 모두 단결하여 공동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서방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이다. 여기에서 동양평화론의 주지는 바로 아시아 각국이 단결하여 자주독립을 쟁취하고 아시아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안중근 의사 동양평화에 관한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와의 면담에서 아래와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

일본은 주변나라에 대한 침략을 중지할 것.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빼앗은 대련, 여순을 중국에 돌려 줄 것.
여순에서 한, 중, 일 삼국 평화회의를 조직하여 동양평화를 도모하는 영구 대책을 세우고 실천할 것.
여순에 공동 은행을 설립하고 3국이 통용하는 화폐를 발행할 것.
한, 중, 일 삼국 청년들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 하여 여순 항구를 지킴으로써 여순을 동양평화의 근거지로 삼을 것.

일본의 침략은 결국에 이토 히로부미를 포함한 일제의 잘못된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안중근 의사는 한국황실의 존엄을 보전한다는 약속도 말뿐이었고, 러일전쟁으로 수많은 일본청년들이 생명을 잃고, 한일협약의 성립 때도 많은 한국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일제는 재정이 대단히 곤란한 상황이어서 그것을 중국과 한국 두 나라를 통해 해결하려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강조하였다.
자신에게 문제를 생기면 스스로 혼자서 그 원인을 파악하며 고쳐야 한다. 나라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나라에게서 장점을 배워서 자기나라의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 정상적이고 논리적인 행위이다. “죄는 지은 대로 가고 덕은 닦은 대로 간다.”는 명언에서 알 수 있듯이, 빼앗은 것은 반드시 돌려줘야 해는 날이 오게 된다.
일본이 중국과 한국을 침략한 것은 그 자체로 잘 못된 선택이었고 결국에 대가를 치를 수 밖에 없었다. 만일 일본이 전쟁을 택하지 않고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의 내용을 받아들였다면 평화를 진척시켰였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발전도도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일본에게 재정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2) 현대사회에서 볼 수 있는 동양평화론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을 쓴 목적은 자신의 사상을 후세에게 전하려는 것이다. 아쉽게도 완성되지 못하였지만 오늘날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이 더욱 주목되고 있는 가운데서 한, 중, 일 삼국은 꾸준한 교류와 학습을 진행하고 있다. 삼국의 학자들은 공동 역사교과서를 만들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이들은 삼국의 젊은이들이 공통된 역사인식을 공유하여 그 진실과 가치를 국경을 넘어서 향유하기를 바라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에서 강조한 공존의식은 매우 중요하다. 현재의 삼국 관계의 발전과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자국의 입장만을 강조한 역사해석은 정치문제 심지어 안보문제까지도 영향을 끼친다. 이는 한국과 일본이 “독도”문제를, 중국과 일본이 “타오위타오(釣魚島)”문제를 둘러싸고 벌이고 있는 역사 영토분쟁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 결과 동양삼국의 관계는 평화가 파괴되고 상호 긴장 관계만의 조장되고 있는 형국으로 치닫고 있다. 이것은 안중근 의사의 사상(동양평화론)과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공동의 역사교과서 출현을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현실른 역설적으로 공동의 역사교과서 편찬이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방안이라는 점에서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응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은 언론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역사는 자기반성의 거울이며 미래의 희망을 여는 열쇠이다. 역사문제에 대해 철저한 반성을 해야 국가간의 공통된 미래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 역사상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천년이 지나가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동양평화’이라는 사상을 전달하고자 하는 안중근 의사의 깊은 뜻과 상통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공동 역사교과서뿐만 아니라 학술발표회 통해 한, 중, 일간의 교류를 증진하여 서로의 이해를 더깊게 하고 평화사상을 공유하는 것이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실현하는 첩경이라고 생각한다.
안중근 의사와 히라이시 고등법원자의 면담 내용을 기록한 「청취서」에서 안중근 의사는 “이상의 방법(공동은행의 설립과 동양평화회의 조직: 필자)으로 동양의 평화는 지켜지나 일본을 노리는 열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라는 주장을 했다. 이는 자위를 위한 무장은 정당방위는 당연하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만약 강대국이 평화라는 구호를 내걸고 약소국들을 침략을 한다면 약소국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안중근 시대의 한국과 중국처럼 당해야만 할까? 다행스럽게도 국제사회의 노력으로 유엔(United Nation)에서 평화를 위한 상설위원회를 만들어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해결하는 역할을 맡은 평화유지군(PKO)라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이 조직이 있어 현재 약소국가가 침략을 받으면더 이상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이는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는 할 수 없을 지라도, 평화유지라는 동일한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유럽에 EU같은 공동체가 생기고 또한 APEC같은 경제협력기구도 출발하였다. 이 단체들의 핵심원칙과 목적은 결국 100여년 전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안중근 의사는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느낄 수 있고, 그의 동양평화론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은‘만고의 한’이라고 여기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4. 한중 관계의 미래

앞서 말했던 것처럼 안중근 의사는 한중 양국에게 큰 영향을 끼 훌륭한 역사인물이었다. 수교한 지 약 20년이 된 한중 양국은 정치, 경제, 외교,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교류와 발전을 해왔다.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를 중심으로 한중 양국간의 교류활동은 어떻게 이루어져왔던 것일까? 대표적인 활동들을 들면 다음과 같다.
1992년3월25일 중국 여순감옥에서 안중근 추모행사가 있었다. 이것은 안중근 순국 82년만에 처음으로 열린 것이다. 같은 해 6월3일 중국에서‘안중근 연구회’가 성립되었다. 이후 많은 한중 양국의 학자들이 안중근 의사에 대해 토론을 하고 그의 위대한 사상과 정신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왔다.
또한 2000년부터 양국은 함께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 작업을 시작하였다. 수많은 노력을 통해 유해를 찾으려고 했었으나 결국 이 작업은 중단되었다. 물론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한중 양국이 함께 손을 잡고서 안중근 의사를 중심으로 평화라는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 정신이 더 아름다운 것이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으로 방문하였을 때 시진핑 주석에게 한국 독립운동가 중국 하얼빈시에서 안중근 의사 기념비 건립을 건의하였다. 한중 양국 국민들이 모두 존중하는 역사 인물인‘안중근 의사 기념비’를 중국에 새우는 일 그 자체에서 너무나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점과 역사를 통해서 양국의 관계를 더욱더 긴밀하게 맺고자 하는 양국의 우호정신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한중 양국관계의 발전을 위해 안중근 의사를 통해 바라본 한국과 중국의 미래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앞으로 양국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선 한국과 중국은 올해부터 새로운 리더를 맞이하여 두 나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양국 리더의 사상과 행동에 따라 두 나라의 관계에게도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청화대 연설은 대단히 의미가 있었고 인상적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가 중국어로 한 연설 그 자체로 이미 중국인은 한국의 열정과 우호적인 태도를 느끼기 충분하였고 감동을 받았다. 이러한 노력에 담긴 진정성에서 중국인들은 중국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한국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중국도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한국과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열망을 시진핑 주석의 말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두 나라의 미래가 기대된다.
미래의 사회는 젊은이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한중 양국 공히 약 6만명의 학생들이 유학을 하고 있다. 이 6만명 학생 중 과연 안중근이란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또한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사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안중근 의사가 아니더라도 각국의역사에 대해 특히 그 역사를 통해 자신과 국가를 공동체라고 인식을 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답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채우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며 자기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알 수 있으면 그만큼 더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이6만명 유학생뿐만 아니라 더 많은 양국의 젊은 친구들이 자신에 대한 책임, 가족에 대한 책임, 더 나아가 국가에 대한 책임을 용감하게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인생에 수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있을지 모른다.“더 이상아직 어리다, 시간이 많다, 기회가 있을 것”이라며 회피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부딪치고 도전해야 한다. 그 맑고 밝은 에너지를 공유하고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주는 젊은이들의 노력이 아시아의 평화와 각국의 국가의 위한 발전을 이끄는 지름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서 한중 양국의 미래를 위해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 이 6만명 유학생들은 단지 유학생의 생활이 신기하고 재미있고 소중한 추억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양국의 발전을 위해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신이 스스로 국적의 벽을 넘어 서로 의사소통을 할 때도 다른 나라의 문화를 잘 이해 할 수 있고 오해를 덜 하게 된다는 것은 진리이다. 이것은 세계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마인드’라고 생각한다. 결국에 이런 사고방식은 국가간의 관계에게도 매우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다. 한중 양국의 미래는바로 이 6만명 유학생의 손에 달려있다. 이 후에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성장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안중근 의사의 사상을 본받아 점차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자아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점과 자신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니고 국가와 하나의 공동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점, 무엇보다 이러한 의식을 바탕으로 동양 삼국은 반드시 평화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양계초이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젊은이가 지혜로우면 국가도 지혜롭고, 젊은이가 부유하면 국가도 부유하다. 젊은이가 강하면 국가도 강하고, 젊은이가 독립적이면 국가도 독립적이다. 젊은이가 자유로우면 국가도 자유롭고, 젊은이가 발전을 하면 국가도 발전한다.” 양국의 미래를 결정할 한중 양국의 젊은이들은 앞으로 두 나라를 위해 안중근 의사처럼 열정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다.

5. 결론

앞서 논의한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안중근 의사라는 존재는 단지 일제에 반항할 의지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동포들에게 나라를 지키고자, 일본 제국주의를 대응하고자 하는 노력만을 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동양평화론을 통해 국제공존이라는 사상을 동양 삼국의 후세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특히 중국인에게 안중근 의사라는 존재는 더욱 더 특별한 인물이었다. 만약 안중근 의사와 같은 사람이 없었더라면 그 당시의 중국은 과연 언제쯤 안중근 의사 같은 독립운동가가 나타났을까? 진정으로 안중근 의사의 사상은 시대를 넘어 국경을 넘어 세계평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젊은이들 책임감을 가지고 그의 사상을 조금이라도 느끼며 그와 같은 세계인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책임감을 가져야 국가는 진정한 발전을 할 수 있으며 타국과의 관계도 잘 유지할 수 있으며 세계의 평화를 지킬 수 있다.
한중 양국의 미래도 역시 두 나라의 젊은이에게 달려있다. 앞으로 양국의 관계, 더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젊은이들은 각오를 굳게 하고 용감하게책임을 져야 한다. 안중근 의사는 단순한 역사인물이 아니라 우리의 우상이자 멘토라는 상징이라고도 불 수 있다. 그가 바라던 세상, 그가 원했던 평화를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아시아의 미래는 어느 한 나라의 책임이 아니고, 동시대를 사는 한, 중, 일 우리의 책임이고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의 평화, 세계의발전은 국경을 넘어야 완성할 수 있는 것이며 국적에 구애 받지 않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손을 잡고 함께 노력한다면 그 꿈은 반드시 실현되는 날이 올 것이다.




<참고문헌>

徐明勋, 『安重根义士知识问答』, 黑龙江朝鲜民族出版社, 2011.
金宇鍾 • 崔書勉『安重根 论文 传记 资料』, 辽宁民族出版社,1994.
국가보훈처 광복회,「청취서」,『21세기와 동양평화론』, 1996.
최서면,『새로 쓴 안중근 의사』, 집문당, 1994.
梁启超,『少年中国说』,http://baike.baidu.com/view/78855.htm
박은혜 대통령 청화대 연설.
박근혜 정치언론, http://baike.baidu.com/view/276606.htm


* 동아시아 공동 번영의 이정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이로미(세종대학교 정책과학대학원 일본학 전공 석사과정)




-목차 -
Ⅰ. 서론
Ⅱ. 본론
1.안중근의 생애
2.하얼빈 의거
3.동양평화론
Ⅲ. 결론





Ⅰ.서론



안중근 의사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척살한 지 올해로 103주년이다. 이 사건을 한국은 ‘공적(公賊)을 척살(刺殺)한 의거’라 하고, 일본은 ‘위인을 살해한 범죄’라 한다. 안중근은 한국에서는 ‘의사(義士)’ 라 불리지만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로 불린다. 한 세기가 넘는 세월이 흐르고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이 사건을 조명하였음에도 한국과 일본의 시각차는 여전하다. 독립대장 안중근은 동양과 서양을 잇는 만주철도의 교착지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를 처단했고, 동양과 서양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던 남북만주에서 동양평화와 대한독립을 외치며 순국하였다. 의거 후 한 세기가 지나도록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정세는 잡음이 끊일 날 없다. 동아시아의 주요국들은 탈냉전 시대를 지나 극심한 경제침체기를 겪으며 제 나라의 복지증진 문제를 풀기위해 골몰하는 형편이다. 최근 중국은 미국에 대해 ‘신형 대국관계’ 개념 신형 대국관계(新型 大國關係). 신흥 강국인 중국과 기존 대국인 미국이 패권 경쟁을 벌이지 말고
전략적 협력을 통해 상생하는 새로운 강대국 간 관계의 유형을 만들어가자는 의미. 《경향신문》 , 2013.6.7.일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6072218435&code=970204.
(검색일 2013. 7. 12.)
을 내놓고 동북아에서의 평화와 협력, 공동이익 추구를 표방하고 있다. 일본은 정치적으로는 평화헌법 개정, 군대 재무장 등 보수 회귀 노선을 타면서 경제적으로는 규제완화 및 무제한 양적 완화로 대표되는 아베 노믹스 추진 등 자국 중심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하여 주변국들의 우려를 사고 있다. 한국은 기존의 대미, 대일 외교 중심에서 변화하여 대중국 외교에 힘을 싣는 모양새다. 경제는 중국 쪽에, 안보는 미국 쪽에 비중을 더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韓 원칙외교 vs 日 보수외교’, 《동아닷컴》, 2013,7.8 일자
http://news.donga.com/3/all/20130708/56333523(검색일 2013.7.11.)
요컨대 현대 외교 관계는 실제적인 국익을 얻기 위한 정책이 이념보다 우선하며 그러한 외교관계는 다각적, 중층적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다자적 합의체가 필요해진다. 따라서 동아시아 주요 삼국의 협력구조는 어떠해야 하는지, 항구적인 유지를 가능하게 하는 공통분모를 어떻게 창출한 것인지 우리는 1세기 전 안중근의 혜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Ⅱ. 본론



1.안중근의 생애

(1)성장배경
1879년 한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황해도 해주부에서 안태훈과 배천 조 씨 사이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응칠(應七)이며 1907년 망명 후 이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의 집안은 해주부에 대대로 내려오는 향반(鄕班)가문으로서 이름난 부호였다. 부친 안태훈이 수구파의 탄압을 받아 고향에 은거하다가 70여 명의 모든 일가를 거느리고 신천군의 청계동 청계동(淸溪洞). 황해도 북서부 천봉산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여 여러 문인·묵객·은사 및 관광객들이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갑오개혁 후 신교육령이 반포되면서 안태훈(安泰勳)·김구·김익두(金益斗)·우종서(禹鍾瑞) 등 개화한 교육 선각자들의 눈부신 활약에 영향을 받아 사학(私學)이 크게 일어났다. 안중근이 2살 때부터 25년 동안 이곳에 살면서 학문과 무술을 익힌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terms.naver.com/entry.nhn?cid=1588&docId=560629&mobile&categoryId=1588(검색일 2013, 6, 30)
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서당에서는 사서삼경과 자치통감, 조선사, 만국역사 등을 수학했다. 학문보다 총포수렵, 기마를 즐겼다. 1894년 황해도에 동학군이 봉기하자 부친이 의병을 일으켜 진압에 나섰을 때 안중근은 무인기질을 발휘하여 공을 세웠다. 훗날 무력독립투쟁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이때 안중근 나이 16세였으며 김아려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둔다.

(2)천주교 활동
동학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부친 안태훈이 동학당의 쌀을 노획해 군량미로 사용한 일로 1년 뒤 정부에서 상환 독촉을 받고 명동성당으로 피신하였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에 입교한 그는 청계동으로 돌아가 전교에 힘써서 친인척은 물론 인근 마을 주민까지 입교시켰다. 1897년 19세 때 빌렘신부로부터 토마스라는 영세명을 얻고 세례를 받았다. 그후 빌렘 신부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불어를 배우면서 신사상을 받아들였다. 안중근은 자신의 국가와 민족을 살리기 위한 방도를 천주교에서 구했던 것이다. 민도(民道)를 높이는 것이 국가를 일신하는 길이라고 확신한 그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서 천주교대학 건립을 구상하고 뮈텔 주교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묵살 당했다. 이에 격분하여 “천주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은 믿지 못 하겠다”고 하며 배우던 불어도 관두었다. 외국어를 배우면 그 나라의 종이 된다는 이유였는데 이는 외국 문물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이 결국 서양 제국주의에 대한 복종으로 이어지기 때문임을 자각한 까닭이다. 천주교를 믿는데 있어서도 민족의 역사발전에 부응하는 종교, 즉 천주교의 민족화, 토착화 문제에 전력을 기울였다. 신운용, 「안중근의 생애와 사상의 특성에 대하여」, 제7기 박물관대학 “경술국치 100년, 민족수난사의 새로운 조명”, 부평역사박물관, 2010, p2 ; 안중근의사숭모회, ‘안중근의 생애/출생과 성장’. 안중근의사숭모회 홈페이지 참조, http://www.patriot.or.kr/01.life/submenu1101.php(검색일 2013, 6, 30)


(3)민권의식과 민족의식
안중근은 ‘김중환의 옹진군민 돈 5천 냥 갈취사건’과 ‘이경주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매진하는 과정에서 천주교의 내부병폐와 사회적 병리현상을 목도하고 ‘민권’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그의 민권사상은 “천명(天命)의 본성(本性)으로 천주가 태중에서부터 불어넣은 것”이라는 ‘천부인권론’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운용, 위의 글, p2

안중근의 민족의식이 성장한 데는 두 가지 사건의 영향이 컸다. 하나는 1904년 6월 자신의 부친인 안태훈이 청국인 한의사 서가(舒哥)에게 구타당한 사건이었다. 청국의 조선침략과 외세에 짓밟히는 조선의 불안정한 사법권을 보고 깊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때 조선의 사법권이 유린당하는 현실을 통탄하며 국가독립의 중대성을 피부로 깨달았다. 다른 하나는 러일전쟁 시기 일제가 대한제국에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했을 때 국권회복운동 단체인 보안회 보안회(保安會).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승세를 타자 각종 이권 탈취를 노리고 조선의 산림, 천택(川澤)과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며 조선 정부를 압박했고 이 사실이 조선 내에 알려져 유학자와 정부 관리, 언론기관이 모여 반대운동을 펼치기 위해 1907년에 설립한 단체이다.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102655&mobile&categoryId=200001108(검색일 2013, 6, 30)
의 행태를 보고 실망한 일이었다. 보안회가 반대 운동을 펼치자 그들과 함께 조선 침략에 앞장섰던 하야시 곤스케(林権助) 공사 및 부일세력 처단을 도모했다가 실패한 사건이었다. 항일운동에 소극적인 보안회를 조소하며 물러났으나 이 일은 안중근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서 보았던 일본의 침략성을 재확인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침략세력을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했다는 점과 그 중 한 명이 하야시 공사였다는 사실은 안중근의 향후 행보가 의병전쟁과 이토 처단의 길로 전화되는 전조였다. 신운용, 위의 글. p3


(4)애국계몽운동
러일전쟁 이후 조선의 국내외 정세는 급변하였다. 안중근은 천주교 포교활동의 한계를 느낄 때였다.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제가 1904년 2월 ‘한일의정서’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을 식민화하자 안중근은 그 모든 침략 정책의 주역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라고 확신했다. 국권회복운동 세력인 보안회 공조 실패 후 국내의 국권회복운동세력에게서 느낀 실망감, 러일전쟁 이후 국제정세에서 느껴지는 위기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국내를 벗어나 해외독립기지건설을 결심하였다. 1905년 산둥지방을 거쳐 상하이에 자리 잡은 안중근은 민영익과 서상근을 만나 구국의 방책을 협의하려다가 자신의 안일만을 추구하는 서상근을 타이른다. “국민이 국민된 의무를 행하지 아니 하고서 어찌 민권과 자유를 얻겠는가”, “지금은 민족세계인데 어째서 홀로 한국 민족만이 남의 밥이 되어 앉아서 멸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겠”느냐고 하였던 바 그가 민족 중심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상하이에서 안중근은 르각신부를 만나 구국의 방책을 얻었다. 교육의 발달 사회의 확장, 민심 단합, 실력양상이었다. 르각신부가 조언한 구국의 방책을 실현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학교 설립이라고 생각하여 진남포에서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돈의학교 운영에 참여했다. 안중근이 삼흥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는 점은 자못 흥미롭다. 안중근의 민족의식에는 세계와 호흡하는 개방성이 내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 지식인들이 결성한 교육진흥단체인 서우학회에 가입하였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삼흥학교의 교원과 학생들이 34원 60전을 보냈는가 하면 그의 모친과 제수들이 패물을 기부했다는 사실은 안중근의 활동이 개인 차원을 넘어 지지 세력을 배경으로 실행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신운용, 위의 글, p4
안중근은 1907년 7월 이후 고종의 강제퇴위, 정미7조약 체결 등 일제 침략이 강화되자 국채보상운동에 그치지 않고 국외망명을 결심한다. 빌렘신부가 무장투쟁에 반대하고 나서자 “종교보다 국가가 앞선다”고 선언한 뒤 간도로 망명하였다. 민족의 생존 위에 종교도 존재한다고 믿는 굳은 국가관과 종교의 목적이 국가의 독립을 지키는데 있다는 종교관을 확인할 수 있다. 신운용, 위의 글, p4


(5)의병투쟁
1909년 7월 정미7조약 체결, 8월 군대해산을 지켜본 안중근은 충격을 받고 교육을 통한 구국책에 한계를 절감한 뒤 무력에 의한 대항만이 구국의 길임을 깨달았다. 그는 노령에서 이범윤 등에게 거병을 종용하는 한편 노령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삼형제의 비유를 들어 항쟁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거병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으로 조선 통치권을 장악하고 의병을 폭도로 몰아 살육했으며 한민족이 일본의 보호를 받기 원한다는 말로 세계를 속이고 있으므로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동양은 망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5년 안에 러시아, 청나라, 미국과 개전할 것이니 대비해야 한다고 설득하면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의병을 일으켜 후세에 부끄럽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하여 거병 이유와 이토 처단의 명분을 명확히 밝혀줌으로써 러시아 한인에게 항일 투쟁의식을 불어넣었다.
여기서 안중근의 ‘인심담합론(人心團合論)’을 살펴보자. 안중근이 1908년 3월21일 《해조신문》‘긔서’에 발표한 것으로 당시 안중근의 현실인식을 엿볼 수 있다.
첫째, 대한제국의 침략당한 이유가 개인과 가족, 국가의 단결력 부족과 교만함에 있다고 진단하였으며 단합할 때만이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미국 한신사회의 통합운동을 벌였던 공립협회의 ‘국민단합론’에 공감한 결과였다. 둘째, 러시아 한인사회의 분열양상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 해결책으로 인심단합론을 제기한 것이었다. 본토와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분열된 러시아 한인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며 단결을 촉구하는 호소문이기도 했다. 셋째, 이미 이 무렵 ‘동양평화론’의 근간이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유는 그들의 단결력이었고,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한 이유는 교만이라고 주장하면서 죽음을 앞둔 국왕의 왕자들처럼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서양의 침략을 막기 위해 한, 청, 일 삼국의 단결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동양평화론’과 궤를 같이 한다. 넷째, 인심단합론에는 안중근이 러시아 한인사회의 여론형성에 일정한 역할을 했고,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를 배경으로 안중근은 러시아 내 항일 의병 세력의 결집체인 동의회 참여와 국내진공작전을 이끌 수 있었다. 동의회 참여 과정을 거쳐 안중근은 1908년 김두성을 총독으로 세우고, 이범윤을 대장으로 하며 안중근 자신은 참모중장(우영장)을 맡아 의병부대를 조직해서 그해 7월 일본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무참하게 패했다. 신운용, 위의 글, p6

그가 의병투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첫째, 그의 통솔력이다. 권력과 재산도 갖지 못했고 나이도 어렸던 그는 순전히 특유의 통솔력을 발휘하여 독자적으로 부대를 운영했다. 둘째, 의병투쟁의 목적과 대상이 분명했다. 그는 의병투쟁 중에 사로잡은 포로들을 풀어주었는데, 한국인들처럼 이토를 적으로 여긴다는 이유였다. 투쟁의 대상이 일본의 일반 국민이 아니라 일본인들을 위험에 빠뜨린 이토와 같은 침략세력임을 분명히 했다는 의미였다. 의병투쟁은 이토가 한일 양국의 공적(公賊)이라는 확신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는 계기였다. 셋째, 안중근의 의병활동은 종교성을 바탕에 두었다는 점이다. 그는 의병투쟁을 ‘천명(天命)’으로 여겼다. 일찍이 안중근은 무장투쟁을 결심하고 간도로 출발하기 전 빌렘신부에게 “국가 앞에서는 종교도 없다”고 선언했다. 이는 안중근이 국가, 종교, 인민을 불가분의 삼위일체로 여겼다는 뜻이다. 이러한 종교관은 의병투쟁 과정에서 일본 병사에게 쫓기며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동지들에게 삶의 희망을 갖게 하고 대일투쟁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비록 국내진공작전에는 실패했으나 러시아 당국은 안중근의 의병투쟁을 유래에 없는 대성공이라고 평가했다. 유리한 조건에서만 전투를 벌이고 비정규군의 형태유지와 탁월한 전술전략과 냉정한 전투자세, 뛰어난 사격술과 무기라고 지적했다.
안중근의 의병투쟁은 의병세력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이후 의열 투쟁으로 전환하는 계기였다는 점, 지속적인 대일항전을 위해 전투 경험을 쌓아서 향후 일제와의 의병투쟁을 전개하는 데 중요한 경험이었다는 점, 이러한 경험은 이후 독립전쟁의 밑바탕이 되었던 점, 러시아인에게는 한인의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보여주었고, 일제에게는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과시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신운용, 위의 글, p6~p7


2. 하얼빈 의거

(1)지정학적 배경
안중근이 북만주 헤이룽장(黑龍江) 성 하얼빈(哈爾濱)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하고 랴오닝(遼寧) 성 뤼순(旅順)에서 순국한 사정은 우연이 아니었다. 러시아와 일본이 그곳들을 중심으로 남북만주와 한반도를 두고 각축을 벌인 곳이기 때문이다. 윤병석,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동양평화론」,『안중근 연구-하얼빈의거 100주년의 성찰』, 국학자료원, 2011, p267


①러시아의 남하정책
시베리아 경략 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는 17세기 중엽 헤이룽 강에서 청과 첫 충돌 이후 국경선을 확정하였으나 끈질기게 남진정책을 추진한 결과 1858년 아이훈(愛琿)조약으로 시베리아 전역에 대한 영유권을 획득하고, 1869년 베이징조약을 체결하여 연해주까지 병합하였다. 본격적으로 시베리아와 연해주 개발 사업에 착수한 러시아는 태평양 방면으로 남하하여 연해주 남단 주요항인 블라디보스톡에 군항을 건설했다. 정형아, 「근대도시 건설과 국제정치의 영향-중국 대련시를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중국근현대사학회, V.45, 2010, p55

북쪽의 연해주와 시베리아,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를 연결하는 시베리아 철도를 부설한 다음 나아가 만주와 한반도를 겨냥하여 우스리스크에서 헤이룽장 성을 잇는 동청철도(東淸鐵道)를 놓고 헤이룽장 성의 수도인 하얼빈을 만주경략의 거점 도시로 삼았다. 게다가 이 하얼빈 역에서 남쪽으로 창춘(長春)과 선양(瀋陽)을 거쳐 랴오둥반도의 남단 도시 다롄(大連)과 뤼순을 연결한 뒤에도 남지선(南支線) 설치 기회만을 노렸다. 윤병석, 위의 글, p268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뤼순과 다롄, 웨이하이웨이(威海衛)까지 점령하자 청 정부는 일본과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을 체결하여 랴오둥 반도의 할양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는 러시아의 동진정책을 방해하는 것이었기에 러시아는 청이 위태로워지고, 조선의 독립은 보장받지 못하고, 아시아의 평화가 깨진다는 명목을 들어서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이 할양받은 랴오둥 반도를 중국에 반환하도록 압박하여 일본의 만주 진출을 좌절시켰다. ‘삼국간섭’을 말하며 프랑스는 러시아와 동맹 관계였던 터라 러시아를 지지하였고, 독일은 러시아와 프랑스 동맹이 느슨해지기를 바라고 러시아를 지지하였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데 일본이 유용하리라는 점과 청일전쟁 결과 청이 개방한 시장에 개입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간섭에 반대하였다. 송금영, 『러시아의 동북아 진출과 한반도 정책(1860-1905)』, 새미, 2006, p195-p199
한편 청에게는 랴오둥 환수 대가로 다롄과 뤼순을 러시아가 조차하게 해줄 것을 요구하여 두 지역을 1898년부터 25년간 러시아가 조차하기로 하는 뤼순·다롄조계지조약(旅大租地條約)을 체결했다. 다롄과 뤼순은 중국정부의 영토였으나 각국영사가 행정과 감독을 장악하는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따라서 조차국인 러시아에게 실권이 있었기에 사실상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러시아는 헤이룽장 성과 창춘 성을 횡단하는 동청철도 부설권을 얻자 랴오둥 반도를 포함한 남만주 경영의 기선을 잡고 다롄의 도시건설과 뤼순 군항 경영에 골몰하였다. 윤병석,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동양평화론」, 『안중근과 그 시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편, 경인문화사, 2009, p385


②일본의 대륙정책
한편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뒤 대륙진출을 목표로 하던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한반도에서 청의 군대를 몰아내고 압록강과 발해만 너머 뤼순과 다롄까지 점령했다. 북쪽으로 선양까지 진출한 일본은 1895년 청과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차지하고 남만주의 랴오둥반도의 영유권을 획득하였으나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에 굴복하여 랴오둥반도를 고스란히 반납하였다. 삼국간섭의 치욕을 겪은 일본은 남만주 경영에 분주한 러시아와의 일전을 결심하고 전쟁준비에 돌입하였다. 그리하여 1904년 2월 랴오둥반도 남쪽, 대한제국 수도 한양의 서쪽 연안인 인천 풍도 앞바다에서 러시아 해군을 타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승전국임에도 수만에 달하는 육해군병의 희생자를 냈지만 일본은 뤼순공방전을 감행하였고, 1905년 정초에는 난공불락의 뤼순군항을 함락시켜 승세를 굳혔다. 그러자 일본의 만주 진출을 꺼린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재에 나선 결과 일본과 러시아는 같은 해 9월 포츠머스조약을 맺었다. 러시아는 랴오둥 반도와 뤼순항에 대한 조차권과 창춘 이남의 철도부설권 등 만주지역에서의 권익을 일본에 양도하였고, 대련과 뤼순은 일본 통치하에 들어간다. 일본은 랴오둥 반도의 조차지 전체를 관동주(關東州)로 명명한 뒤 정형아, 위의 글, p57~58
그곳에 관동군(關東軍)을 주둔시키고 관동도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와 만주 경략에 주력하였다. 특히 러시아가 미완으로 남기고 간 뤼순군항 건설과 남만주철도 부설에 박차를 가하여 만주 침략의 교두보로 삼았다.
안중근이 표적물로 노린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 시기는 뤼순군항 건설이 완성되고 남만주철도가 하얼빈 인근까지 확장되어 일본의 만주경영이 실적을 올리던 무렵이었다. 마침 러시아의 재무상 코코프체프(Kokovtsev)가 극동지방 방비와 만주경영 점검을 위해 하얼빈을 방문한다고 하자 일본은 간도문제 간도문제(間島問題). 간도는 두만강 지류 연안의 평야 및 구릉으로 형성된 지역으로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영토 귀속 문제를 두고 발생한 분쟁이다. 을사조약 체결 후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이 만주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1909년 간도협약을 맺고 중국에 간도를 양보하였다. 당시 간도 주민은 청국인보다 조선인이 월등히 많았던 점으로 보아 간 도는 한국의 지배 하에 있었다고 파악된다. 네이버 지식백과(Basic 고교생을 위한 지리 용어사전, 2002.2.5, (주)신원문화사)
http://terms.naver.com/entry.nhn?cid=3435&docId=944321&mobile&categoryId=3435(검색일 2013,6, 30)
를 해결할 목적으로 일정을 맞춰 러일회담을 마련했던 것이다. 윤병석, 위의 글, p385


(2)의거 경과
의병전쟁이 실패한 후 안중근은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기 위하여 망명지인 연추(煙秋)에서 1909년 2월 연추한인일심회 발기에 참여하고 1909년 3월에는 황병길 외 동지 11명과 ‘정천동맹(正天同盟)’, 곧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여 회장을 맡는다. 여기서 ‘정천(正天)’이란 그의 종교사상을 반영한 말로 추정되며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 유지’라는 천명을 실천하겠다는 그의 의지를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정천동맹은 안중근이 최재형, 이범윤 등의 친러파와 결별을 선언하고 대내외에 안중근 세력이 건재함을 선포하는 포문이었다. 연추한인일심회는 정천동맹을 결성하기 위한 포석으로서 그의 정치적 역량이 노령 사회에서 확고하게 인정받는 시금석이었다. 따라서 일심회에서 정천동맹으로 전환한 안중근은 그의 정치적 지도력이 러시아 한인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증표이며 정천동맹은 동지들의 대일투쟁 의지를 다지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신운용, 위의 글, p8

안중근은 연추에서 재기를 도모했으나 여의치 않자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하였다. 1909년 10월 블라디보스톡에는 이미 이토의 만주방문 소문이 파다하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코코프체프와 만나 동양침략정책을 협상하기 위해 북만주를 시찰한다는 소식을 듣고 겨레의 원수를 갚은 절호의 기회로 판단한 그는 10월 21일 국내진공작전 때의 전우인 우덕순(禹德淳)과 함께 하얼빈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통역을 맡길 유동하와 합류하여 하얼빈에 도착한 일행은 하얼빈 국민회 회장 김성백의 집에 묵었다. 다음 날 23일에는 의거결의를 기념하여 사진을 찍고 조도선과 합류하였다. 24일 아침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은 의거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동철철도의 첫 번째 교착지인 차이자거우(蔡家溝)에서 하루를 묵었다. 25일에는 거사의 만전을 기하기 위해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자거우에서 거사를 일으키기로 하고, 안중근과 유동하만 하얼빈으로 돌아와 하얼빈 의거를 준비하였다. 윤병석, 2009년 글, p386~387
10월 26일 운명의 날이 밝자 이토가 하얼빈에서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하얼빈 역으로 간 안중근은 나이 어린 유동하를 타일러 집으로 돌려보내고 역 구내 찻집으로 들어가 이토가 등장할 때까지 기다렸다. 차이자거우에서 먼저 거사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던 우덕순과 조도선은 러시아 경비병의 의심을 사 안타깝게 먼저 체포되었다. 오전 9시 15분 경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도착하고, 기차에서 내린 이토와 코코프체프가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할 때 안중근은 신문 삽화에서 보았던 기억을 토대로 이토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3발을 발사하였다. 첫 번째 탄환이 이토의 가슴에 명중하고 두 번째 탄환이 흉부에, 세 번째 탄환이 복부에 명중했으나 곧 이토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에 뒤따르던 일본인을 향해서 3발을 더 발사한다. 러시아 헌병이 덮치자 안중근은 “코리아후레(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한 다음 태연자약하게 체포되었다. 치명상을 입은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20분 만에 절명하였고 체포된 안중근은 역 구내 러시아 헌명대 분소에서 러시아 검찰관의 심문을 받았다. 이때 안중근은 성명을 대한국인 안응칠, 연령 31세, 신분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으로서 독립전쟁 중 적의 괴수를 처단, 응징한 것이라고 밝혔다. 윤병석, 2011년 글, p272
그날 저녁 일본 영사관에 인계되어 영사관 지하 감방에 구금된다.
일제는 배후관계 파악과 연루자 체포에 혈안이 되어 국내외에 걸친 광범위한 조사 심문을 시작하였다. 사건 현지에서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외에 정대호 등 11인을 관련자로 지목하고 체포·구금·심문에 들어갔다. 한국에서도 거사 관련용의자를 색출하여 안창호, 이갑, 김구 등을 구속 조사하는 한편 안중근의 고향집을 덮쳐 정근, 공근 두 동생과 모친 조 씨까지 심문, 조사하였다. 1주일에 걸친 기본조사와 심문을 통해 의거의 전말을 파악한 일본 정부는 외무성이 주관하여 의거 관련자에 대한 본격적인 심문조사와 처벌수순을 밟았다.
한국통감부 및 뤼순, 다롄의 관동도독부 관하 법원에 안중근과 관련자를 송치하였다. 구라치 데쓰키치(倉知鐵吉)를 현지에 급파하여 지휘 감독하게 하고 현지 법원에서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 검찰관을 하얼빈에 파견, 조속한 공판 절차를 밟게 하였다. 이때 통감부는 한국어에 능숙한 사카이 요시아키(境喜明) 수사관과 통역 소노키 스에요시(園木末喜)를 파견하여 안중근의 회유 변절을 획책하였다. 윤병석,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100주년의 성찰-안중근 연구가 나아가야 할 길-」,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 이태진 외, 지식산업사, 2010년 글, p515~516
한편으로는 고종황제가 당시 돈 4만 원의 거금을 하사하여 이토를 모살하게 하였다는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도 펴면서 정확한 정보이고 풍설이 아니라고 추궁하였으나 이에 안중근은 거짓 날조로 황제를 모해할 수 있느냐며 질책한 다음 이미 목숨을 내놓기로 한 사람인데 무슨 돈이 필요하겠느냐는 말도 덧붙였다고 한다. 葉天倪, 「韓皇의 受誣」, 《安重根傳》, p23 윤병석, 2010년 글, p545 주석 재인용.
일본이 피고인들을 넘겨받자마자 신속하게 절차를 진행한 것은 당시 시점이 한국 병탄을 눈앞에 두었던 때라 그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되도록 축소하기 위한 의도로 파악된다. 윤병석, 위의 글, p543.


(3)공판투쟁
공판은 1910년 2월 7일부터 같은 달 14일 사이에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전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마나베 쥬죠(眞鍋十藏) 재판장 단독심리로 미조부치 검찰관과 통역 소노키 및 서기 와타나베 료이치(渡辺良一)로 구성된 재판단에 일본인 관선 변호사 가마타 마사하루(鎌田正治)와 미즈노 요시타로(水野喜太郎)가 변호를 맡았다. 국내 유지들과 안중근 측에서 요청한 변호신청은 모두 거부당하고 일본인 일색으로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재판정에 선 안중근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의거를 결행한 것이며 이는 곧 일본의 안전과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윤병석, 위의 글, p517.
일제의 한국병탄을 합리화하려는 미조부치(溝淵)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미조부치는 러일전쟁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주장했으나 안중근은 청일, 러일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이토를 도적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또한 을사조약이 한국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주장하는 미조부치에게 “형제지간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먹이로 한 것”이라고 비유하며 을사조약에 담긴 한국 병탄 야욕을 명확히 했다. 안중근은 일제의 한국 병탄 야욕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이토를 처단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방법으로 법정투쟁을 택했던 것이다. 신운용, 위의 글, p9

공판은 단 6회 개정으로 끝났다.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에 대한 심문심리는 1~3회 개정 때만 있었고, 이토의 죄악 15개조의 이유를 진술할 때는 재판장에게 제지당하기도 했다. 4회 때는 미조부치 검찰관이 일본법에 의한 구형논고와 이유를 설명했고 5회 때는 일본인 관선변호사의 변론이 있었다. 2월 14일에 진행된 마지막 6회 공판은 마나베 재판장의 판결로 끝이 났다. 안중근에게는 사형이 내려졌고, 우덕순에게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에게 각기 징역 1년6개월이 선고되었다. 윤병석, 위의 글, p518
안중근은 6회의 공판을 거치면서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로 일본의 왜곡된 논고를 비판했다. 1회 공판에서는 의거의 이유에 대해 일본의 잘못된 정책이 원인이라고 밝혔다. 피고인들에 대한 심문이 주를 이뤘던 2회 공판에서는 우덕순이 안중근과 현실인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같은 이유에서 이토를 처단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3회 공판에서 안중근은 일본 고메이(孝明) 천황을 시해한 이토야말로 역신(逆臣)이라고 언급하고 15개조의 죄악을 나열하며 이토 처단의 이유를 밝혔다.
이에 당황한 재판부는 공공질서에 방해가 된다며 진술을 중지시키고 방청객을 모두 퇴정시키기도 했다. 4회 공판에서 미조부치가 안중근의 의거는 이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행위이므로 정치범 취급을 할 수 없다고 논고하자 안중근은 5차 공판에서 불공정하고 편벽된 재판이라고 반론을 펼쳤다. 오해가 아니라 이토의 한국침략정책에 반대한 정치적 사건임을 강력하게 논증하면서 만국공법에 따라 전쟁 포로로 처리해 줄 것을 역설하였다.
결국 일본은 2월 10일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안중근은 2월 17일 관동도독부 법원에서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을 만나 재판의 불법성을 따지고 동양평화론에 대해 언급하였다. 안중근은 1910년 3월 25일 뤼순감옥에서 마지막으로 가족과 면회를 마치고 생의 마지막을 맞이했다. 신운용, 위의 글, p9~p10


3. 동양평화론

안중근은 1909년 12월부터 약 4개월에 걸쳐 『안응칠역사』을 집필하여 1910년 3월 15일 탈고한 뒤 『동양평화론』을 작성했다. 안중근은 1910년 2월 17일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에게 『동양평화론』을 완성하고 싶으니 사형 집행을 한 달 정도 연기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묵살하고 26일에 사형을 집행했고 『동양평화론』은 완성되지 못했다.

(1)주요내용
미완의 유고로 남은 『동양평화론』은 서(序)와 전감(前鑑),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 등 4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은 서문과 전감 일부뿐이고 현상과 복선은 목차로만 남았다. 재판과정의 심문조서와 법정 진술 내용을 종합하여 대강의 내용을 추정한다. 특히 1910년 2월 14일 히라이시 고등법원장과의 면담 내용을 기록한 〈청취서〉를 통해 안중근이 주장하는 ‘동양평화론’의 핵심내용을 알 수 있다.

서(序)에는 『동양평화론』의 저술 목적을 기술했다. 안중근은 서세동점의 시대상황을 비판하면서 동양평화를 실천하기 위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거사의 이유, 그리고 동양평화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장(場)으로 뤼순을 선택했음을 밝히고 있다. 서양세력 가운데 특히 러시아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보인 반면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을 칭찬하면서 한국과 청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승리였다고 논평했다. 그러면서 한국과 청은 일본 황제가 동양평화 유지와 한국독립의 공고화를 약속했기에 일본을 지지했고, 또한 같은 황인종으로서 일치단결한 것이었으나 일본이 이를 저버리고 침략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책망했다. 그 원인을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침략세력 탓으로 본 안중근은 동양 평화를 위한 의전(義戰)을 하얼빈에서 개전하고, 담판(談判)하는 자리를 뤼순(旅順)으로 정했으며, 이어 동양평화 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는 것이라고 취지를 적었다.
전감(前鑑)이란 ‘거울로 삼을 만한 지난날의 경험이나 사실’을 뜻하는데 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원인과 과정, 결과를 살펴보면서 일본의 침략성을 경계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한 원인은 스스로를 ‘중화대국’이라 일컫는 교만함과 부패한 권신척족, 그리고 신하와 백성이 불화했기 때문이고, 일본이 승리한 원인은 전 국가적 단결이 가능했던 까닭이라고 분석했다. 이재봉, 「20세기의 동양평화론과 21세기의 동아시아공동체론」, 《평화학연구》, Vol.12, No.1, 2011, p12.
또한 청일전쟁 직후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차지한 러시아의 침략정책에 주목해야 한다고 인종론적 입장에서 주장하였다. 한편으로는 동양평화가 유지되지 못한 원인을 일제의 동양정책 과실이라고 지적하였고, 러일전쟁에 대한 논평에서도 동양평화를 위해 한국과 청국이 도왔기에 일본이 승리할 수 있었다고 진단하였다. 그런데도 ‘한청(韓淸) 양국 유지인사(有志人士)의 허다한 소망‘을 절단하였으니 “같은 인종 이웃나라를 해치는 자는 독부(獨夫)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일제를 책망하였다. 그리고 포츠머스조약에 한국은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일제가 한국문제(한국에서의 일본의 우위권 승인)를 조약문에 넣은 것은 같은 인종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신운용, 「安重根의 東洋平和論과 伊藤博文의 極東平和論」, 『안중근과 그 시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편, 경인문화사, 2009, p541

현상(現狀)은 일제의 한국침략의 실상을 적은 것으로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15개조의 이유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추정된다.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 한국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요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라.

「안응칠 역사」 중에 기술된 15개조의 「이토 히로부미 죄상」 안중근의사기념관 홈페이지 참조, http://ahnjunggeun.or.kr/?page_id=1414(검색일 2013, 7, 1)


복선(伏線)은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한 방책에 대한 서술일 것이다. 주요 내용은 1910년 2월 17일에 있었던 히라이시 고등법원장 면담 기록인 〈청취서〉를 토대로 추측한다면 동양평화를 유지하는 방법론은 크게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세계 각국의 신용을 얻는 일이다. 일본이 강점한 뤼순항을 청에 돌려주어 동양평화의 근거지로 만들자는 것이다. 뤼순항은 명대(明代)부터 전략척 요충지였고 동양 굴지의 부동항이었다. 그곳에 일제 관동군이 들어와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어서 만주 침략의 교두보로 삼은 상태였다. 윤병석, 2010, p525~526
따라서 한·청·일이 공동 관리하는 군항으로 개발하고 여기에 삼국 대표로 구성된 ‘평화회의’를 조직하면 세계가 놀라 일본을 다시 신뢰할 것이라는 논지였다. 둘째, 평화회의를 조직한 뒤 동양 삼국의 국민으로부터 회비 1원씩 모금하여 은행을 설립하고 공통화폐 발행, 주요지역에 평화회의 지부와 은행 지점을 병설하는 등으로 재정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이는 일제가 동양을 침략한 원인을 경제적 궁핍에서 찾고,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면 일본도 침략정책을 포기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발상이었다. 셋째, 평화회의를 정착시킬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뤼순군항 개발과 평화회의 조직, 공통 은행 설립만으로도 동양평화를 지킬 수는 있지만 열강이 일본을 노리고 있으니 무장을 필수적인 일이라고 강조했다. 동양 삼국의 청년들을 모아 군대를 편성하고 이 청년들에게 2개 국어 이상을 가르쳐서 우방 또는 형제 관념을 갖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면 어떤 나라도 일본을 넘볼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 과정에서 인도·태국·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이 참여하여 동양의 상공업이 발전하므로 결국 패권이라는 말이 무의미해지고 만주철도 문제 같은 분쟁도 사라지는 동양의 미래상을 제시했다. 신운용, 「安重根의 東洋平和論과 伊藤博文의 極東平和論」, 『안중근과 그 시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편, 경인문화사, 2009, p544
넷째, 세계 각국의 지지를 얻는 일이다. 동양평화 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세계 각국의 지지는 필수적이라는 주장이었다. 천주교인은 세계 인구의 2/3을 차지하므로 로마교황에게서 승인을 받는다면 세계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신운용, 위의 글, p545
이는 서양 전체를 침략세력으로 간주하여 동양과 대립각을 세우는 황인종연대론이나 아시아주의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일본을 이토와 같은 침략세력과 침략정책에 반대하는 천황 및 일본국민으로 구분해 분석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마지막 장인 문답(問答)에는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일제의 아시아주의로 무장한 일본인을 등장시켜서 대항논리인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격론을 벌여 마침내 일본인이 설복 당한다는 내용이리라 추측한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일본이 서양침략세력의 정책을 모방하지 말고 새로운 방법론을 취해야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이 보장된다는 주장이었다. 서양을 인종과 문화가 다른 폭력세력으로 전제한 다음 그들의 침략을 막아내고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한·청·일 삼국의 연대를 강조하였다. 삼국이 정치, 경제, 군사, 외교적으로 국가연합에 가까운 공동체를 구성하되 한국과 청은 일본의 지도를 받아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일본의 군함으로 중립지역인 뤼순을 보호하는 등 황인종의 선봉인 일본이 주도적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재봉, 위의 글, p12
동양평화론은 일본이 아시아에서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였다.

(2)사상적 배경
안중근이 이토를 처단한 이유 가운데 ‘동아시아의 평화 파괴’, ‘한국의 독립과 동아시아의 평화유지를 위해 전쟁을 한다고 밝힌 후 모든 열강들을 기만한 죄’라는 항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양평화는 안중근의 중심 사상 중 하나였다. 그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식 아시아주의와 동양평화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①일본의 아시아주의
당시 중요한 담론이었던 ‘동양’은 일본의 창작품이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문명개화에 성공한 일본이 스러져가는 청조를 대신하여 동아시아의 새로운 맹주로 등극하기 위해 서양에 대립하는 범주로 고안해 낸 상상의 공동체였다. 서영희, 「한국 근대 동양평화론의 기원 및 계보와 안중근」,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안중근의 하얼빈의거와 동양평화론』 , 지식산업사, 2010, p302


a. 대륙침략론과 대등적 연대론의 혼재
일본이 자신이 속한 동양을 버리고 서구문명화의 길로 접어든 것은 1885년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의 ‘탈아론(脫亞論)’이 계기였다.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양 열강의 확장주의 수단을 채용해서 아시아의 이웃나라를 대상으로 강경하게 확장주의를 펼쳐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쉬용, 「일본의 확장주의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안중근과 그 시대-안중근 의거 』,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편, 경인문화사, 2009, p478
아시아 연대라는 개념은 조선침략론을 집대성한 요시다 슈인(吉田松陰)의 동문인 가쓰 가이슈(勝海舟)가 1863년에 아시아 연대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침략주의를 거론한 이래 정한론으로 발전하였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등 정한론자들은 근대국가체제 확립을 우선시 한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에게 패한 뒤 재야 민권파로 변모하였다. 민권파의 아시아 연대론 역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일본의 우월의식이 바닥에 깔린 강권적인 아시아관을 가졌는데 이는 일본의 아시아주의 사상의 한계였다. 박한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일본 외교이념의 흐름(1868~1954):아시아주의와 국제주의를 중심으로」, 《국가전략》 제10권 1호, 2004, p89~90

동양주의, 동양평화와 관련이 있는 유사 개념들로서 동양주의(아시아주의), 아시아 연대론, 삼국공영론 등이 존재하였다. 동양주의, 즉 (대)아시아주의는 요시다 쇼인과 같은 아시아 침략주의자들에 대해 ‘아시아는 하나’라는 논지 아래 구미 열강의 아시아 침략에 대항해서 아시아의 단결을 도모하자고 주장했다. 주로 18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성립되었다. 민권이론가이자 민권운동가였던 우에키 에모리(植木枝盛)는 아시아 각 민족들의 평등한 연대를 주창했고, 사회운동가였던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는 1893년『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을 펴내 일본과 조선이 대등한 입장에 서서 ‘대동(大東)’이라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주창했다. 이러한 주장은 다시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의 ‘아시아 연대론’과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의 ‘아시아 문화일체론’으로 계승되었다. 평등적 연대를 주창하는 사상에 대하여 겐요샤(玄洋社) 현양사(玄洋社). 일본 후쿠오카에 본거지를 둔 일본 극우 정치 단체.
와 고쿠류카이(黑龍會)는 노골적으로 일본이 아시아 연대의 맹주라고 주장하면서 한일병합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b. 대아시아주의와 일본맹주론의 결합
1890년대 이후 서구 열강들이 본격적인 동아시아 진출을 확대하자 일본의 아시아주의와 대일본주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를 나타냈다. 당시 일본의 초대 총리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이른바 ‘이익선(利益線)’, 즉 ‘주권선의 안위에 깊은 관계를 가진 지역’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의 이익선이란 한국을 의미했으며 이 발언은 청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표명이었다. 이익선의 확보라는 생각은 이후 러일전쟁 때까지 일본의 핵심 대외목표가 되었다. 1895년경 아라오 세이(荒尾精)도“흥업(興亞)의 대업을 성취하는 기초를 구축하여야 한다”고 하며 ‘흥아론’을 주장하였는데 아시아문명을 뛰어넘는 일본적 가치, 주의, 행동양식을 과장, 미화시켜 이웃 아시아 국가에게 강요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박한규, 위의 글, p94

근대 일본은 ‘동양’ 개념과 아시아 연대론을 고안하여 대외정책의 이데올로기로 삼았지만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주도하는 동양이라는 범위 내에서 한국과 청 등 아시아국가와 제휴하여 서양에 맞선 사례는 없었다. 오히려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빼앗기자 두 차례에 걸친 영일동맹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권인 한국 지배권을 공고히 했던 예처럼 서양 열강과 동맹하여 아시아를 침략하는 데 앞장섰다. 서영희, 위의 글, p303

일본이 주장하는 동양평화는 아시아 국가가 연대하여 서양 침략세력을 몰아내자는 면에서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동일하지만 일본맹주론에 바탕을 둔 패권주의, 침략주의라는 점에서 명확히 구별된다.

② 중국의 아시아 연대론
일본이 동양 개념을 앞세워 대아시아주의를 주장할 때 중국의 지식인들은 둔감한 태도를 보였다. 유구한 세월 동안 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여 동양문명의 대표자라는 정체성이 뚜렷했기에 중화 이외의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연대의식이 희박했다. 그나마 아주(亞洲), 동방(東方), 원동(遠東) 등의 단어로 아시아를 황인종의 포괄적 인종 구성체로서 인식하기는 했다. 량치차오(梁啓超)의 황인종우월론은 동아시아 문명의 우월성을 강조했지만 주도권은 중국에 있다고 보았다. 러시아의 만주 침략 이후에는 일본을 상대로 중일연대를 제안하기도 했다. 쑨원(孫文)은 일본의 현실적인 지위를 인정하면서 서양에 대항하기 위한 황인종의 연대, 즉 대아시아주의를 제창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패도가 아닌 왕도를 따르는 각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한국이 빠진 중일의 황인종연대론이었다. 리다자오(李大釗)는 일본의 대아시아주의가 약소민족의 병탄을 위한 제국주의라는 점을 비판하면서 중국과 조선인, 모든 아시아인, 개명된 일본인까지 일본의 패권에 반대하여 연대할 것을 제안했다. 서영희, 위의 글, p304~305


③ 한국의 아시아론
a. 연대론의 등장-『조선책략』
동아시아 지역에 방어적 운명공동체론으로서 연대론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것은 1880년 『조선책략(朝鮮)』의 방아론(防亞論)이 최초이다. 러시아에 맞서 한, 청, 일 삼국이 연대해야 한다는 전략적 개념이 동아시아에 최초로 등장한 것이었고, 이후 조선 지식인의 동아시아 정세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b. 공러의식과 삼국연대론
조선책략은 조선에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했다. 그러한 공러(恐露)의식은 러일전쟁을 황인종과 백인종의 대결로 곡해하게끔 유도했다. 서영희, 위의 글, p312~313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1880년 일본의 자유민권운동 계열의 아시아 연대론 단체인 흥아회가 등장하자 청국공사 하여장과 조선 개화파들이 참석하여 일본의 아시아 연대론에 공감하였다. 서영희, 위의 글, p314
당시 한국의 지식인들은 유학이나 공무 등을 통해 일본과의 교류가 잦았던 탓에 어떤 형태로든 일본발 아시아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김옥균의 경우 후쿠자와 유키치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기에 아시아 연대론에 공감하여 한, 청, 일 삼국의 상호 제휴를 의미하는 ‘삼화(三和)’를 자신의 호로 삼기도 했고, 상하이 여관에 투숙했을 때도 이와다 미와(岩田三和)라고 서명할 정도로 아시아 연대 실현에 몰두하였다. 안창호는 이토와 가진 회견에서 삼국의 정립(鼎立)친선이 동양 평화의 기초라는 의견에 공감하고 서양세력의 아시아 침입을 막기 위하여 조선과 일본, 중국이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은식은 인종론과 문명론에 근거하여 동아시아 삼국의 연대를 주장한 오오가키 다케오(大垣丈夫)의 영향을 받았다. 김경일, 위의 글, p207
문명개화파들의 아시아 연대론은 삼국공영론, 삼국동맹론, 또는 삼국제휴론으로 불린다. 삼국공영론은 계몽주의 시대 민족지가 내세운 가장 핵심적인 대외정책으로서 실은 일본의 정한론에 그 뿌리가 닿아있다. 한국의 김옥균, 중국의 캉유웨이, 순얏센, 인도의 스브하스 찬드라 보스, 핀란드의 에밀리오 아기날도 등을 통해서 무비판적으로 각국에 수출되었고 김민환, 「동양3국공영론」, 『개화기 민족지의 사회사상』, 나남, 1988, p64~67, 김경일,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본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열린 민족주의와 보편주의로의 지평」, 《정신문화연구》 제32권 제4호, 2009, p203~204 재인용
한국이 일본과 ‘보호조약(을사늑약)’을 체결한 이후부터 동양주의로 변질되었다. 삼국동맹론이 발전한 형태인 동양평화론은 일진회 등 일부 부일세력이 주장하는 동양평화론과 성격이 달랐다. 일제의 침략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자주적 논리로 정착되었다. 신운용,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이등박문의 극동평화론」, 『안중근과 그 시대-안중근 의거 』,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편, 경인문화사, 2009, p536~537
삼국제휴론은 개신유교주의 계열의 《황성신문》에서 주로 나타나듯 황인종의 공동 대응을 주장할 때 민족이 아닌 동양이라는 지역 단위의 대응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한, 청, 일 동양 삼국 정족론(鼎足論)을 펼친 배경에는 동양 삼국의 문화적·인종적 동질성과 지정학적 상호 의존성이라는 관념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영희, 위의 글, p318
한국이 청일전쟁 이후 청의 내정간섭으로부터 탈피하고 을미사변으로 악화된 한일관계가 개선되자 현실적인 외교방안으로 검토된 것이었다. 서구 열강, 특히 러시아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외교방안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현광호,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그 성격」, 『아세아연구』, 제46호 3호, 2003, p


c. 고종황제와 중립국화론
개화지식인들과 달리 고종과 명성황후는 전격적으로 조선책략적 사고를 거부하고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의 내정간섭과 일본의 보호국화 책동에 저항하려 했다. 고종은 이미 미국 등 구미열강과 수교를 맺어 국제열강 사이의 세력균형을 이용하는 균세외교론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 아시아에 국한하지 않는 외교를 펼치면서 서구 문물을 수용하는 개화정책을 추진하여 궁극적으로는 자강(自强)을 전제로 한 중립국화를 추구하였다. 대한제국의 집권세력은 마지막까지 러시아에 의존하여 일본에 주권침탈을 저지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동양 삼국의 연대로 러시아에 대항해야 한다는 아시아 연대론과는 판이한 노선을 걸은 것이다. 서영희, 위의 글, p315~316


(3)안중근 사상의 동아시아적 의의
당시 한국 안팎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나오는 동아시아 전략은 삼국제휴론의 맥락에 서 있었다. 그럼에도 1세기가 지난 현재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안중근이 제시하는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오늘날에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① 동양평화회의 건설-다자적 협의기구체
한, 중, 일 삼국이 연대하고 제휴하는데 머물지 않고 다자간 협의기구 성격을 띤 평화회의 건설을 제안하였다. 나아가 평화회의를 실질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담고 있다. 다만 ‘평화회의’라는 개념은 안중근 자신이 늘 탐독했던 《독립신문》, 《황성신문》에 실렸던 만국평화회의나 1909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에게 전해들은 헤이그 평화회의 소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아이디어였다고 짐작된다. 다만 안중근의 평화회의 구상은 금융기관과 무장력까지 갖춘 집행부의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강대국의 분쟁조정에만 주력하는 만국평화회의와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것은 동북아 지역에 최초로 제시되는 현재의 유럽연합과 닮았으며 동양 삼국과 인도 베트남 타이 등 동남아시아까지 포괄하는 지역적 범주를 고려할 때 현재의 ASEAN+3 체제와 비슷한 광역공동체 구상이었다. 서영희, 위의 글, P319~320

② 은행의 설립-경제공동체
동양 범주에 한, 청, 일 삼국 외에도 타이, 버마 등 동남아시아와 베트남, 인도까지 포함시켜 아시아 대륙 전체를 포괄하는 지역 공동체 구상이었다. 이는 1990년대 말부터 제기된 동아시아 공동시장이나 동북아시아 경제공동체, 또는 한, 중, 일 자유무역협정(FTA)과 궤를 같이 한다. 이재봉, 위의 글, P14

③ 뤼순군항과 공동군대 편성
안중근은 당시 국제분쟁의 단골무대였던 뤼순항에 국제군대를 창설하자고 제안했다. 이 아이디어는 합방론을 주장했던 안경수의 ‘한청일동맹론’에서도 언급된 사항이었지만 안경수의 주장은 일제의 한국병탄을 합리화시키는 논리였다. 안중근의 생각은 동아시아의 집단 안보체제 또는 다자안보협력체 구축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국제적 분쟁지역을 아예 중립화 시켜서 분쟁의 축을 협력의 축으로 바꾸고자 한 발상이다. 이재봉, 위의 글, p13
우리는 여기서 현재 동북아시아에서 갈등과 긴장의 중심인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묘안을 얻을 수 있다.


3. 결론



다자주의와 관련하여 영국학파의 이론가 불((Hedley Bull)은 그의 주요저서인 『The Anarchical Society』에서 세계정치에서 질서의 문제를 논하면서 국가의 체제(system of states)와 국가의 사회(society of states)를 구분하고, 후자에 있어서 네 가지 목표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첫째는 국가의 체제와 국가의 사회 자체의 보존, 둘째는 개별국가의 독립성, 즉 외부적 주권 유지, 셋째는 전쟁 부재 의미에서의 평화의 보존, 마지막은 국제사회의 공동 목표― 무력 사용의 제한, 약속의 이행, 그리고 소유권의 안정― 의 달성이 그것이다. 신욱희, 위의 글, p7
안중근이 생각했던 ‘동양’의 해당하는 오늘날의 동아시아에는 제국주의와 냉전시대의 암울한 유산이 존재하는 탓에 유럽연합과 같은 체제 통합까지는 기대하기 어렵다. 중국과 북한, 러시아가 한 축을 이루고, 한국과 일본, 미국이 다른 한축을 이루는 상태에서 견제와 도발이 끊이지 않는 한 진정한 협력 체제를 이루기는 쉽지 않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돌아보자. 애초 완벽한 합의는 불가능한 법이며, 그럼에도 세력균형을 넘어서는 공유된 리더십은 필요하다. 다자간 협의체, 경제공동체, 집단 안보체제, 상호 문화 이해를 통한 젊은 세대의 공동체의식 함양, 그리고 동아시아 공동체 차원에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을 동아시아 공동의 실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 출발은 동아시아 국가 사이에 소통과 이해이다.
첫째, 낡은 시대의 편견을 버리고, 과거의 아집을 버려야 한다.
둘째, 구성 국가 간의 심도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최근에 들려오는 한, 중, 일 공통한자를 만들자는 생각은 참으로 유용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김태은, ‘디지털시대, 왜 책인가 & 동아시아 문명의 보편성… 한·일 지성들 진단’, 《뉴시스》, 2013, 7, 5일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3&aid=0005246511(검색일 2013. 7.11)

셋쩨, 동아시아 국가들의 저작물 번역 작업을 활성화하는 방안이다. 일본이 서구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서구의 지적 산물들을 철저히 번역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문화적 편차를 줄이고 컨텐츠를 풍부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최근 동아시아 대중의 공통 키워드는 ‘한류’인 듯하다. 그러나 대중의 마음을 잠시 흔들고 지나가는 유행이나 트랜드는 클래식이 되지 못한다. 지속가능하고 발전지향적인 문화적 소통은 당장의 실리추구보다 더 큰 소산을 가져올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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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숭모회 http://www.patriot.or.kr
안중근의사기념관 홈페이지 http://ahnjunggeun.or.kr/

*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한일관계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학과, 석사과정 카와무라 미사키


목차

1. 머리말
2.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내용
3.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의미와 그 특징
4.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실현의 방안
5. 맺은말





1. 머리말

필자는 안중근의거에 대해 초등학교 5학년 수업에서 처음 들었다. 그 때 나에게 특별한 생각은 없었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사건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깊은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필자에게 안중근이라는 인물은 ‘살인자’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면서 한, 중, 일 젊은이들이 모여서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한일관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한일관계는 악화의 길을 걷고 있다. 독도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역사교과서 등 한일관계의 걸림돌이 상존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안중근과 관련하여 최근 박근혜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한중 양국이 존경하는 안중근기념비를 세우자는 건의를 중국당국에 하였다. 이에 대해 아베 수상은 “이토 히로부미 수상은 위대한 인물이자, 존중해야 한다”라며 불쾌감을 드러내는 등 일본 극우세력은 한중 양국의 역사인식과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는 국제평화에 역행하는 행위로 한일양국의 우호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태도로 볼 수 없다.
이런 상황을 직시하면서 필자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내용과 의미 특징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먼저 필자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착목한 계기는 한국외국어 대학교 어느 교수님과의 대화에서 기인한다. 그는 “안중근의 사상과 삶을 깊이 이해하는 데서 한일관계의 평화구축이 시작된다”고 조언하였다. 그 말에 자극을 받아 필자는 안중근, 특히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안중근에 대해 공부하면서 필자는 현재의 다양한 평화론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진보적인 생각을 100년 전에 하였다는 사실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현재와 미래의 한일관계를 새로운 방향으로 구축하는데 ‘<동양평화론>은 기본적인 이론’이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안중근의 동양평화에 주목한 필자는 이 글에서 우선 ‘동양평화론’의 내용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동양평화론’의 의미와 그 특징을 기술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동양평화론’의 실현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필자는 전문연구가들처럼 깊이 있는 연구성과를 낼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이해주기 바란다. 다만 필자가 공부하면서 느꼈던 점, 그리고 여러분들과 의견을 공유하자 하는 마음, 더 나아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실천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에서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이 자리에 섰다.


2.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내용

1) 배경과 대상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후 일제에 의해 여순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 감옥 안에서 그는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집필을 결심하고 이를 밝힌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안중근이 2월17일 히라이시(平石) 고등법원장을 만나 책이 완성될 때까지 사형을 연기해 달라는 요청을 전했다는 <청취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옥중에서 동양정책과 전기를 쓰고 있는데 이것을 완성하고 싶다. 또한 나의 사형은 洪 신부(프랑스인 洪湯九 신부)가 나를 만나기 위해 오게 되었다고 하니 그를 만날 기회를 얻은 뒤 내가 믿는 천주교의 기념스러운 날 즉 3월25일에 집행해주기 바란다.

이를 히라이시(平石) 고등법원장은 책이 완성될 때까지 수개월이라도 사형집행 일자를 연기하겠다고 약속했고, 그러므로 안중근은 공소권 청구를 포기하였다. 3월15일 <안응칠역사>의 집필을 마친 안중근은 3월 25일을 자신의 사형집행일로 요구하였기 때문에 ‘동양평화론’ 집필에 시간이 더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래서 그는 2월 17일 히라이시를 만나 3월 25일로부터 15일 정도 사형집행 연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그의 요구를 묵살하고 말았다. 그는 서문과 전감을 쓴 후, 1910년 3월26일 사형을 당해 결국 ‘동양평화론’은 완성되지 못한 채 끝났다.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을 집필할 결심을 한 목적과 배경 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가까이 수백년 이래로 구주의 여러 나라들은 도덕(道德)을 까맣게 잊고 날로 무력을 일삼으며 경쟁하는 마음을 양성해서 조금도 기탄하는 바가 없는데.

여기에서 보듯이 도덕을 잊고 무력과 경쟁만을 일삼고 있는 현실을 바꾸기 위한 방안으로 ‘동양평화론’을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이는 그의 종교관 즉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라는 천명의 연장선에서 이루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주된 대상은 누구였을까? 이는 다음에서 확인된다.

일본은 세계 각국에 동양평화를 문란케 하고 파괴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일본은 하여튼 큰 책임이 있다. 잘못을 바로 잡기를 서슴지 말라는 금언이 있지 않는가. 내가 만일 일본사람이라면 일본이 취해야 할 정책에 필요한 의견이 있다.

이처럼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을 쓴 목적은 일본을 위해서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을 평화의 방향으로 계몽하지 않으면 동양전체가 몰락할 것이라고 단정한 그는 어떻게 해서든 일제의 침략정책을 바꾸려고 했고 그 구체적인 방안이 바로 동양평화론이었던 것이다. 결국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일본이 살길을 제시한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일본의 근대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일본이 안중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수많은 무고한 일본인 희생자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일제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그 침략정책을 바꾸기 위한 최후의 전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서문의 내용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는 목적으로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지금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뻗쳐오는 환난을 동양인종이 일치단결해서 극력 방어해야 함이 제일의 上策임은 비록 어린 아일지라도 익히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일본은 이러한 순연한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인 이웃나라를 깎고 友誼를 끊어 스스로 蚌譎의 형세를 만들어 漁夫를 기리는 듯 하는가. 韓淸 양국인의 소망이 크게 절단되어 버렸다.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진다면 부득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에게 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議論이 韓淸 양국인의 肺腑에서 용솟음쳐서 상하 일체가 되어 스스로 백인의 앞잡이가 될 것이 명약관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 동양의 몇 억 황인종 중의 허다한 유지와 강개남아가 어찌 袖手傍觀하고 앉아서 동양전체의 까맣게 타죽는 참상을 기다릴 것이며 또 그것이 옳겠는가. 그래서 동양평화를 위한 義戰을 하얼빈에서 개전하고 談判하는 자리를 旅順口에 정했으며 이어 동양평화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는 바이니 諸公은 눈으로 깊이 살필지이다.

즉,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다음과 같이 파악할 수 있다. 안중근의 의견에 따르면 그 당시의 세계는 동서로 나누어졌었다. 서양 인종들은 서로 경쟁하고 침략을 일 삼는 방식을 세우는 가운데, 동양은 학문과 덕을 중용시하고 자기 나라의 문명을 치켜왔고, 서양을 침략할 의도도 없었다. 러, 일 전쟁 때 일본은 경쟁하는 마음을 키우던 러시아에게 당당하게 맞서, 한국독립 그리고 동양평화를 위해 힘을 썼다. 한청은 일본의 대의명분을 믿고 일본군을 지원했다. 이것은 다 일본이 ‘동양평화’와 ‘한국독립’ 을 지킨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일제는 한국의 국권을 빼앗아, 한국인의 배신자가 되었다. 이제 한국인은 일제에게 속은 것을 깨닫고 일제와 투쟁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국권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일제와 싸웠던 것이다.
지금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뻗쳐오는 것을 막아야 하는 상황인데 일제는 한청을 완전히 배신해, 한국의 국권 박탈, 더 나아가 만주와 청까지 야망을 드러내 동양평화를 어지럽혔던 것이다. 이로 인해 한청 국민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일본은 한국에 국권을 돌려주고, 만주, 청 등 동양에 대한 침략 야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안중근의 주장이다. 그것이 일본에게 바른 길이며, 동양평화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 후 한, 중, 일 삼국이 서양세력의 침략을 막아,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 서문에서 ‘동양평화론’을 서술하는 목적을 서양세력의 침략을 막을 방법을 추구하는 데 두었고, 또 다른 목적을 일제의 침략정책의 바로잡는데 두었다. 그러므로 안중근은 동양, 세계의 평화를 위해 진력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안중근은 평화 사상가이었다고 볼 수 있다.

3)전감(前鑒),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의 내용

전감에서 안중근은 청일전쟁에서 청국의 패배 이유를 ‘중화대국’이라는 교만 때문이라고 진단하였다. 그 반면, 일본의 승리 원인을 한 덩어리 애국당을 이루었기에 가능했다고 분석하였다. 그리고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차지한 러시아의 침략정책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고 분석하였다. 그러면서 일제의 정책과실을 지적하였다.
아시다시피,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의 서문과 전감만 쓰고 현상, 복선, 문답은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해 안중근이 무엇을 주장하려고 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가 쓰고자 했던 내용은 히라이시와의 면담 기록 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것을 통하여 어느 정도 예측할 수가 있다.
우선 안중근은 군항 도시인 여순(旅順)에 주목하였다. 그는 러일의 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여순을 청국에 돌려주고 동양평화회의를 만들어 여순을 영세 중립지대로 만들자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곳에 은행을 설치해 공동개발의 자금을 마련하고, 학교도 세우는 등 여순을 공동체 지역으로 만들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었다. 실제로 이런 내용이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에 기술하고자 한 내용이 아닐까 싶다.
안중근이 <현상> 부분에 기술하고자 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 살해 15개조 이유>로 보인다. 이는 일제에 인한 한국 침략의 상황을 잘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이토의 지휘로 한국 왕비를 살해하였다.
둘째,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이토는 병력으로써 5개조의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그것은 모두 한국에 매우 불리한 조항이다.
셋째,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이토가 체결한 12개조의 조약은 한국에 군사상 대단히 불리한 사건이다.
넷째, 이토는 기어이 한국 황제의 폐위를 도모하였다.
다섯째, 이토는 한국 군대를 해산하였다.
여섯째, 조약 체결을 한국민이 분노하여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 때문에 이토는 한국의 양민을 다수 살해하였다.
일곱째, 한국의 정치 기타의 권리를 약탈하였다.
여덟째, 한국의 학교에서 사용한 좋은 교과서를 이토의 지휘 아래 소각하였다.
아홉째, 한국 인민의 신문 구독을 금지하였다.
열째, 전혀 충당할 만한 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질이 좋지 못한 한국 관리에게 돈을 주어 한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드디어 제일은행권(第一銀行券)을 발행하였다.
열한째, 한국민의 부담으로 돌아갈 국채 2,300만 원을 모집하여 이를 한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그 돈을 관리들 사이에서 마음대로 분배했다고도 하고 또는 토지를 약탈하기 위해 사용했다고도 하는데, 이것은 한국에 대단히 불리한 사건이다.
열두째, 이토는 동양의 평화를 교란하였다. 그 까닭을 말하면 즉 러일전쟁 당시부터 동양평화 유지라고 하면서 한국 황제를 폐위하고 당초의 선언과는 모조리 반대의 결과를 낳기에 한국민 2천만은 다 분개하고 있다.
열셋째, 한국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는 한국보호라는 명분으로 한국 정부의 일부 인사와 의사를 통하여 한국에 불리한 시정을 펴고 있다.
열넷째, 지금으로부터 42년 전 현 일본 황제의 부친을 이토가 없앤 사실은 한국민이 다 알고 있다.
열다섯째, 이토는 한국민이 분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황제나 기타 세계 각국에 한국은 무사하다고 속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안중근이 복선과 문답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신운용의 주장이 참고된다. 필자도 그의 주장을 따랐음을 밝혀둔다.
그는 복선의 뜻(뒷일의 준비로서 암암리에 방책을 마련해 둔다는 뜻)을 인용하여, 복선에서는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한 방책에 대해 서술하려고 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안중근과 히라이시 고등법원장 면담 상황을 담은 일본 외무성의 ‘청취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게다가 문답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안중근은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으로써 ①세계 각국의 신용을 얻은 일이다. ② 일본이 해야 할 급선무는 현재의 재정을 정리하는 것이다. ③평화회의를 정착시키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④세계 각국의 지지를 얻는 일이다. 라는 4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이걸로 인해 안중근의 해법은 일본이 서양침략세력의 정책을 모방해서는 안 되며 새로운 방법론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답은 일제의 대한(對韓)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법 즉 아시아주의로 무장한 미조부치 검찰관과 같은 일본인을 등장시키고, 이에 대한 대항이론으로써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내세워 상호논쟁을 통하여 일본인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설복당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3.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의미와 그 특징

이상에서 살펴본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동양평화론’의 절대성

안중근은 동양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을 1910년 2월 17일 히라이시와 면담에서 밝혔다. 이 때 그가 절대로 죽음이 두려워 하거나 감형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 점에서 그의 생사관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미 죽음을 초월하였던 것이다. 그는 오로지 ‘동양평화론’을 완성하는데 남은 시간을 바치려고 했다.
무엇보다도 그 순간까지도 동양평화를 삼창을 하고 싶다고 외칠 정도로 동양평화는 그에게 절대적인 명제였다. 물론 이는 평화를 천명이라고 본 그의 종교관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의병전쟁과 ‘동양평화론’의 관계

1905년 노일 전쟁에 승리한 후 서울에 들어온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에 ‘군림’했다. 이토는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하였고, 고종 황제를 1907년 헤이그밀사파견을 구실로 퇴위시켰으며 더 나아가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에 대해 안중근은 먼저 ‘대한의병군참모중장(연해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의병운동의 리더)’의 자격으로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이토를 죽인 것이다. 이른바 이토처단은 ‘의병투쟁’과 그의 사상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이는 그 혼자만의 전투이었던 것이다. 꼭 해내야만 했고, 결국 그는 끝까지 해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동양평화론’은 이토의 극동평화론의 허구성을 반박하면서 진정한 평화를 지키기 위한 의병전쟁의 또 다른 이론투쟁이었음이 분명하다.

3) 안중근의 일본인식

‘동양평화론’이나 <안응철역사>에서 확인되듯이 안중근은 일본인 전체를 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1908년 7월경의 의병전쟁에 참여한 의병들은 포로로 잡은 일본인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안중근은 이 포로들도 한국인과 똑같이 평화를 사랑하고 이토의 한국침략을 증오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일본인들이 있기 때문에 동양의 평화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고, 일본인 들이 반드시 언젠가는 ‘안중근의 날’을 외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안중근은 이토 이외에 저격을 당한 일본인들에 대해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하였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안중근의 일본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4) ‘동양평화론’의 구체성

동양평화론이 관념적이지 않고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라는 사실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안응철역사’, ‘청취서’ 등과 신문(訊問)과 재판기록에서 엿볼수 있다. 먼저, 청취서에서 보듯이 여순(旅順)을 영세 중립지대로 만들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나는 개인 사정으로 이번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했다”고 재판정에서 말하였다. 여기에서 안중근은 평화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계획을 새웠고 실행을 위해 구체적인 생각도 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안중근이 목표로 삼았던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는 이토의 그것과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토의 평화론은 한국과 동양의 침략을 합리화기 위한 침략이론인 것이다. 반면에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한국을 넘어 동양, 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절대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은행의 설립, 공동군대의 창설, 평화회의의 설치, 삼국 청년들에게 2개국어 이상의 교육 등 구체적으로 그 실천방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면에서 관념적이지 않고 구체성을 띤 이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4.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실현의 방안

안중근이 목표로 삼았었던 ‘동양평화’를 어떻게 우리가 활용하고 실현시킬 수 있을까.현재 ‘역사 교과서 왜곡’ ‘야스쿠니 신사 찬배’ ‘위안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등 일본의 역사왜곡이라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일본인들이 제대로 이해시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상호 교류라고 생각한다. 이에 필자는 다음과 같이 그 방안을 제시하고 한다.

1) 청소년들의 교류

청소년의 경우 한・중・일역사체험캠프 등를 통해서 교류하는 것이 좋다. 삼국의 청소년들이 공동 생활을 하면서 의견을 기탄없이 교환하는 과정에서 선입견이나 편견을 없앨 수 있고 이는 서로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효과적일 것이다.
실제로 필자는 2008년도에 제주도에서 개최된 ‘한・중・일역사체험캠프’에 학부 학생으로서 참가했다. 그 때 처음 만났던 한중의 친구들과 제주도의 역사나, 한중의 역사를 함께 접하게 되어서 너무나도 유익한 캠프였다.
이를 통하여 이러한 교류가 동양 삼국의 평화를 만들어나가는데 큰 도움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캠프는 일년에 한번씩 개최지를 바꿔 5박 6일간 삼국의 중, 고등학생들이 참가하고 있다. 이들 학생들은 처음에는 서먹서먹한 분위기지만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서 금방 친해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전통 의상・음식 소개, 인사말 배우기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하여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관광지, 역사유적을 돌아보는 행사, 역사 현안에 대해 서로 거리낌 없이 토론하는 시간을 통해 진정한 국제 교류와 평화의 중요성을 느꼈다고 참가자들에게서 필자는 들은 적이 있다..
특히 이러한 교류의 장에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소개하면 일본청소년들이 안중근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왜 일본이 역사문제를 청산해야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미래의 한중일 역사를 만들어 가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장소를 제공하는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2) 대학생, 대학원생들의 교류

대학생 대학원생의 경우에는 학술대회를 통한 교류가 효과적이다. 자국인들끼리 자국의 입장에서만 아시아의 역사에 대해 토론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분명한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긍정적인 가능성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국인들끼리 토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시아 각국의 상황과 역사경험을 공유하면서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배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교류가 된다고 본다. 오늘 같은 학술대회가 앞으로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컨대, 일본에서 한국학을 하는 사람들의 교류를 위한 기회를 마련하고, 그리고 일본을 넘어서 세계의 한국학 전공을 하는 대학생, 또는 대학원생들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중심으로 하는 학술대회를 앞으로 지속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한국학을 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안중근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런 교류를 통해서 구체적인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정착의 기반이 조성될 것이다. 이는 아시아의 평화를 현실화하는데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안중근 장학 기금 등의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해외 한국학 전공자들이 안중근을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해야 된다.

3) 성인들의 교류

성인의 경우는 시민 단체나 개인간의 교류를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쟁을 겪었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강연을 듣는 것이다. 필자는 학부학생 때 강연을 통해서 그 당시 겪었던 끔찍한 경험을 했던 일본군 출신의 할아버지,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비참함을 경험한 할머니,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간 한국인 할아버지, 상상할 수 없는 경험을 했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등 여러 사람의 강연을 들었다. 젊은이들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은 경험을 들려주는 이들의 모습에서 감동 받았고, 앞으로 이런 강연이 많이 열릴 필요가 있다고 절감했다. 무엇보다 이는 아시아 평화를 생각하는데 하나의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중근을 중심으로 평화적인 한. 중. 일의 교류가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예로 안중근을 모신 미야기현의 다이린지(大林寺)라는 절을 들어보겠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이 남긴 유묵인 ‘爲國献身軍人本分’을 당시 상등병이었던 치바 도시치(千葉十七)가 일본으로 가져간 후, 그의 후손들이 70년이라는 세월을 거쳐서 간직해 왔다. 안중근의사 탄신 100주년인 1979년, 진본을 한국에게 돌려주었다. 안중근 의사의 위패를 모신 대림사 경내에는 유묵의 탁본을 떠서 기념비를 세웠다. 이에 따라서 한일의 영원한 우호를 기원하며 매년 가을에 ‘조국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통한 한일시민들의 추모모임이 열리고 있다.
사진으로 그 탑에 쓰여진 유목을 봤을 때, 사형수가 쓴 글로는 보이지 않는 정도로 훌륭한 유묵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 대한 애국심을 유목으로 표현했다는 것에서 그의 위대성을 저절로 느끼게 된다.


5. 맺은말

지금까지 필자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내용과 그 특성 및 의미를 살펴보면서 필자나름대로 안중근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동시에 한일 관계의 개선과 발전 방안을 생각해보았다.
필자도 처음부터 알았었던 것이 아니라, 발표준비를 하면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연구를 하면서 필자는 “안중근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다”라는 이유를 어떻게 하면 일본인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일본인들에게 안중근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옮겨갔다.
필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더 많은 일본이들이 배우고 제대로 평가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 평가란 이토를 죽였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정치가들나 사상가들도 도달하기 어려운 평화론을 100년전에 이미 안중근이 주창하였다는 점에서 우선 이루어져야 한다. 단지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다는 사실을 넘어 이토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일본들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하고 더 나아가 아시아의 평화를 담보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이러한 때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그 초석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앞으로의 한일 관계와 동양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각적인 차원에서의 교류가 가장 중요하다. 이러할 때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대해서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 특히 일본인들에게 안중근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리는 일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안중근의 사상을 살려 한일양국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교류와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 한중일 외교 관계는 결코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에서 주장했었던 것처럼 앞으로 시민들의 교류를 넘어, 동양삼국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할 역사적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군사적, 경제적인 공동체 구성을 위한 동양삼국의 논의를 이제부터라도 시작한다면 안중근 꿈의 현실도 멀지 않을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오늘처럼 젊은이들이 아시아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교류하는 자리가 필요하다. 필자도 앞으로 한・중・일청소년역사체험캠프 등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바탕으로 하는 한중일 우호관계에 힘을 쓸 생각이다.


<참고자료>
박천욱, 『교과서보다 쉬운 독학국사』, 일빛, 서울, 2004.
사이토 타이켄, 『내 마음의 안중근』, 집사재, 서울, 2002.
신운용, 『안중근과 한국근대사』,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연구소, 서울, 2009.
국가보훈처・광복회, 『21세기와 동양평화론』, 서울, 1996.
趙景達, 『近代朝鮮と日本』、 岩波新書、東京, 2012.
中塚明, 『日本と韓国・朝鮮の歴史』、高文研、東京, 2002.
吉岡吉典, 『「韓国併合」100年と日本』、新日本出版社、東京, 2009.


* [안중근 의사를 통해 바라본 한중 관계의 미래] 에 대한 토론문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학 카와치노 요코

한국으로 유학 온 지 벌써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한일관계를 전공하는 필자는 안중근의사는 한일관계의 핵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한일관계를 중심으로 공부하던 필자는 중국을 포함한 관점에서 아시아의 문제를 깊이 염두에 두지 못했다. 이점에서 토론자는 오영매 선생님의 글에 감동을 받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중국이면 청일전쟁, 난징대학살 등 일중간에서 직접적으로 벌어진 사건만을 바라보아왔던 토론자에게 발표자의 논문은 “뒷통수 맞았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물론 안중근 의거는 일제와 인류에 대한 일종의 ‘경종’이었고, 그의 동양평화론은 세계가 함께 나가야할 ‘미래상’이라는 점도 발표자의 논문을 통해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한국과 중국은 작년에 수교 20년을 맞이하였다. 올해는 양국에 새로운 지도자가 탄생 되었다. 안중근이라는 공통적인 가치를 가지고 양국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있다. 시민레벨의 학술대회나 문화교류 등은 꾸준히 이어왔고, 국가레벨에서는 한중 공동으로 유해발굴활동을 해왔다. 특히 지난 달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대통령이 시진핑 주석과 회담을 가지면서 안중근의사의 기념비의 건립을 제안했다는 것은 한국과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의 관심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한중 양국은 한일관계와 달리 새로운 시대를 향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
이런 절묘한 시기에 발표된 오영매 선생님의 발표문을 통해 당시 안중근의사라는 존재가 중국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동양평화론은 과거를 넘어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안중근의사를 통해 볼 수 있는 한중관계의 전망과 미래를 자세히 알 수 있었다.이런 귀중한 기회를 준 오영매 선생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하지만 토론자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토론자는 다음과 같이 오영매 선생님이 논문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한 견해를 곁들여 질문을 하고자 한다.

1. 중국에 안중근과 같은 운동가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

1) 중국은 한반도와 달리 56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이다. 개인-가족-민족-국가 이러한 구조가 성립된다. 그러므로 개인과 국가를 직접적으로 연결해서 생각하기보다 가족지상주의 또는 민족중심의 사고가 중국인을 지배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같은 시기 중국인 가운데서 안중근과 같은 인물이 나올 환경이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2) 침략의 강도에서 한국보다 약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일제의 강제에 의해 한국은 을사늑약, 정미 7조약으로 거의 식민지상태로 전락하였지만, 중국은 여전히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여기에서 을사늑약으로 한국이 망하면 중국도 곧 망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경고하기 위해 인천 앞바다에 뛰어든 반종례(潘宗禮)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토론자의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

2. 개인과 국가의 일체에 대한 문제

또한 안중근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이상적이고 대단히 선구적이다. 토론자 역시 발표자의 견해에 동의한다. 더욱이 발표자는 향후 중국의 발전에 유학생들의 역할이 크다고 강조하면서 중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개인과 국가가 일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발표자는 앞으로 중국유학생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상을 갖고 행동을 해야 중국이 발전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지 알고 싶다.

3. 유학생의 갈등문제

중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발표자가 한국에서 공부를 하면서 중국에 대한 새로운 사실과 시각을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토론자 역시 한국에서 공부와 교류를 하면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다시 보게 되고 새로운 역사시각을 접하게 되었다. “남이 있음으로 내가 성립되고, 남을 통해 나의 존재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나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이들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나라를 알게 되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필연적으로 외국유학생들은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토론자도 예외는 아니다. 발표자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 특히 이번 안중근 발표를 맡으면서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에 대한 인식과 갈등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묻고 싶다.

4. 동양평화론의 의미

토론자는 공통의 가치관이 국제사회 미래와 발전의 길을 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일중의 한계를 함께 국제사회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가해국’과 ‘피해국’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안중근이 주장한 ‘인류평화’라는 공동의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 물론 한국과 중국이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는 데 일본의 책임이 크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토론자는 일본이 역사청산을 하지 않는 한 이는 요원한 일이라는 것도 통감하고 있다.
토론자는 국제관계를 공부하면서 ‘진정한 평화’란 뭣인지 매번 묻고 묻는다. 인류역사에서 이 평화라는 말은 자기 이익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일제의 한국 침략의 명분은 역시 ‘평화’였고 미국의 이라크침공의 표면적인 이유 역시 ‘평화’였다.
앞으로의 한일중 관계가 냉혹한 국제현실 속에서 평화라는 진정한 빛을 찾는 인류의 모델이 되기를 열망한다. 그리고 발표자가 언급한 대로 ‘각국의 입장, 주장’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가치인 ‘진정한 평화’를 중심으로 상호관계를 구축해야 앞으로의 한일중의 발전이 있을 것이다. 이번의 학술대회를 계기로 안중근이라는 하나의 진실을 한일중이 공유를 한다면 이 또한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안중근 의거가 중국의 지성사를 되돌아 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발표자의 주장은 정확한 지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안중근 의사라는 존재는 중국에 대해 매우 특별한 존재이다”라는 부분에 공감한다. 이는 일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라고 확신한다.
역사학자 E H, Carr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대화”라고 정의 내렸다. 발표자의 주장 속에서 이 말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꾸준한 대화가 또 새로운 세계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안중근이라는 인물은 아시아와 세계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만들어가는 지름길이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토론자는 “안중근은 과거이며 현재이고 동시에 미래임”을 확신한다. 그는 3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일제에 의해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우리 한일중 삼국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란 ‘뜨거운 심장’을 공유하고 있고, 이는 미래에도 계속 뛸 것이다. 토론자도 그 심장이 멈추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멈춘다면 참담한 과거로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안중근의사가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 <동아시아 공동 번영의 이정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대한 토론문

오연(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학대학원 한국학과)

100여년 전에 쓰여진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이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현재 동아시아에서 역사 및 영토관련 분쟁이 치열한 가운데서도 한편으로는 역사 관련 대화와 화해의 노력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 일환으로 이렇게 한・중・일 학생들이 한데 모여 토론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점은 고무적이며 여기에 적게나마 일조할 수 있어서 영광스럽고 기쁘다.
이로미 선생님은 발표문에서 안중근의 생애, 의거과정, 동양평화론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그리고 당시 한국, 중국, 일본의 아시아론도 잘 정리해 주었다. 짧은 기간에 이런 논문을 쓴 이미로 선생님에게 격려와 존경의 말씀을 올린다.

그러나 논문의 완결성을 위하여 다음 과 같이 몇 가지 보충할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1. 논문의 구성 문제

우선 제목과 본문의 구성을 보면 논문의 제목은 <동아시아 공동 번영의 이정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라는데 제목과 달리 이 논문의 핵심이 될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부분은 분량이 1/2쪽 정도여서 아쉽다. 그리고 논문의 분량을 보면 본문에서는 <안중근의 생애>를 약 9쪽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논문의 전체 분량을 고려했을 때 지나치게 긴 것 같다. 생애보다는 제목대로 동양평화를 중심으로 기술하거나 아니면 제목을 <안중근의 생애와 동양평화론>으로 하는 것이 어떠했을까?. 또한 <안중근의 생애>에서 이로미 선생님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아쉽다.

2. 사실관계의 확인

1) 안태훈의 천주교 입교과정
이로미 선생님은 안중근의 부 안태훈의 천주교입교를 동학군으로부터 노획한 군량미 문제로 명동성당으로 피신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기술하였다. 하지만 안태훈은 명동성당으로 피신하기 전에 이미 천주교 입교를 결심하였다. 신운용, 「안중근가문의 천주교수용과 향촌사회」, 『남북문화예술연구』 8, 2011, 194-196쪽.
무엇보다 1895년 7월 9일 군량미와 관련하여 탁지부가 안태훈의 무죄를 선언하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의병전쟁 때 안중근의 계급문제
안중근은 의병전쟁에 최재형부대의 우영장으로 참여하였다. 의병전쟁에 참모중장으로 참 여한 것은 아니다. 참모중장은 안중근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이는 다른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3) 이토의 하얼빈 방문의미
선생님은 이토의 코코프체프 회담의 목적을 “간도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일정을 맞춰 러 일회담을 마련했던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간도문제는 1909년 9월 4 일 「간도에 관한 일청조약」과 「만주 5안건에 관한 협약」으로 일단락되었던 것이다. “간도 문제를 해결할 목적”에서 간도문제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4) 유동하 문제
선생님은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에서 거사를 일으키기로 하고 안중근과 유동하만 하얼 빈으로 돌아와 하얼빈 의거를 준비하였다.”라고 기술하였다. 하지만 유동하는 채가구에 간 적이 없다. 따라서 “안중근과 유동하만 하얼빈으로 돌아와”라는 표현은 사실과 다르다.
5) 우도선과 조도선의 체포 시점
선생님은 “우덕순과 조도선은 러시아 경비병의 의심을 사 안타깝게 먼저 체포되었다.”라고 하였지만 우덕순과 조도선이 체포된 시점은 안중근이 러시아헌병에게 잡히고 나서 26일 오후 11경이다. 따라서 이 표현도 사실과 다르다.
6) 저격사건 과정
선생님은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총을 꺼내어 사살함”라고 저격과정을 설명하셨다. 좀 더 자세한 과정을 보면 이토 히로부미가 오전 9시 15분 하얼빈 역에 도착해 차내에서 약 20분 정도 코코프체프와 대화한 후, 그의 권유에 따라 명예 사령관으로서 러시아 수비병을 사열하기 위해 열차에서 내렸다. 그가 수행원의 안내를 받으며 러시아 군대 앞을 막 지나가는 순간, 안중근이 총 3발을 쏴 이토 히로부미를 명중시켰고 안중근은 혹시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 것을 대비해 다시 총 3발을 쏴 주위에 있던 일본 관리들을 쏘았다.

3.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효용성과 실현 가능성을 위한 제언

그리고 “안중근이 생각했던 ‘동양’의 해당하는 오늘날의 동아시아에는 제국주의와 냉전시대의 암울한 유산이 존재하는 탓에 유럽연합과 같은 체제 통합까지는 기대하기 어렵다.”라는 이로미 선생님의 견해에는 찬성할 수 없다.
평화를 위한 모든 논의는 종국에는 체제 통합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논의의 시작부터 '시대의 암울한 유산'을 극복 불가능한 무엇으로 상정하고 연대의 한계를 명확히 하는 것은 발전적인 논의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많은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 해서 평화를 위한 공동체를 도모할 기대조차 접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연합을 지향할 때 평화에 보다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인식이 공유되어야 한다.
또한 “중국과 북한, 러시아가 한 축을 이루고 한국과 일본, 미국이 다른 한 축을 이루는 상태에서 견제와 도발이 끊이지 않는 한 진정한 협력 체제를 이루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예전에는 냉전의 프레임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세력이 대립하였지만 글로벌 시대에 접어든 지금 각 국가들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정치, 경제, 문화의 상호교류를 통해서 한국, 중국, 일본은 공통체를 향해 가고 있는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 이러한 오늘날 동아시아 삼국관계에 있어 미국과 러시아가 주요한 축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마지막으로 이로미 선생님께서는 공통한자를 만들자는 생각을 언급하셨는데 제 소견으로는 이보다는 삼국 공동 역사교과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동아시아 삼국이 직면한 여러 문제들은 언어나 문자 그 자체에서보다는 자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비롯된 충돌과 오해의 탓이 크다. 안중근을 보는 시각에 있어서도 중국과 한국은 안중근이 “의사"라고 생각하고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로 간주되는 것은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고 서로 각국의 입장에서만 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자국의 입장을 무조건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같은 사안에 대한 타국의 입장과 이해를 접할 기회가 기본적으로 주어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세계사의 흐름이나 주변국가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경우, 균형감을 가지고 자국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역사와 시대를 성찰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어려워진다. 이와 같은 문제점은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교육에서 두드러진다. 주변 국가의 역사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알지 못함으로써, 자국중심의 역사인식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중・일 각국의 역사, 특히 상호 영향을 미친 사건과 관련된 각국의 역사적 사실을 아는 것은 역사인식을 공유하기 위한 토대라고 할 수 있다. 한・중・일 3국의 관계를 자국사뿐 아니라 상대 나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중근에 대해서도 자국사를 넘어서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제의 시각으로만 볼 때 이토 히로부미를 위대한 영웅 또는 평화주의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라를 위해서 공을 세우고 죽은 위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웅의 기준은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행동하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달려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원인과 과정, 결과를 살펴보면 일본의 침략성을 경계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침략전쟁은 인류의 평화와 인권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제의 아시에 침략에 앞장선 이토 히로부미는 동아시아의 평화, 인권의 역사를 볼 때 진정한 영웅도 평화주의자라고도 할 수 없다.
역사인식의 공유를 위해서는 주변 국가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야 좀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다른 나라의 역사를 볼 수 있으며, 자국사에 대한 균형있는 인식도 가능하다. 동아시아 3국이 정치나 경제 등에서 대국임을 자부한다면 그러한 자부심에 맞는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적어도 그러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동아시아 시민이라는 입장에서 역사를 보고 공동 교재를 만들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잘못된 근대사 인식을 밝히고, 더 나아가서는 바람직한 동아시아 근대사 인식과 한・중・일 삼국의 역사인식 공유를 모색해야 한다.
1992년 한중 국교정상화이후 경제적 상호 의존도가 빠른 속도로 높아지고 있다. 예전에는 서로의 이익이 각기 달랐지만 이제는 같은 이익을 긴밀하게 공유하고 있다. “前事不忘,後事之師” 이전의 경험을 잊지 않으면 이후에 귀감이 된다. 소중한 감성을 지성으로 바꾸어 문화와 역사의 지적체계로 조성하여 갈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문화교류를 이룰 수 있다. 당장의 이익뿐만 아니라 역사인식을 공유할 때에야 비로소 서로에 대한 진정한 이해의 길이 열리고 동양의 평화와 공존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한일관계」에 대한 토론문


우제경


카와무라 미사키 씨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한일관계」에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 논문을 통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그 의미를 곱씹어 보는 기회를 얻었다. 또한 발제자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어떻게 실현할 지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한일 양국 간 상호 교류가 절실하다고 판단하였고 이를 위해 각 세대별로 어떤 활동을 해야 할 지도 제시하였다.

발제자는 글을 마무리하며 상호 교류를 통해 안중근의 사상을 실현시키고 한일 관개를 개선할 방안을 생각해보았다고 하였다. 허나 양국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지금 일본이 지닌 역사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점 말고는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다른 방법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양국의 새로운 관계 구축을 위한 방안 보다는 역사인식 개선에 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발제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 일로에 있다. 긴 세월 동안 양국은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보여 왔으며, 그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얼마 전 11일에 미국 여론조사기관 중 하나인 퓨리서치가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하나 발표했다. 그들은 일본이 저지른 1920~1940년대에 있었던 침략 행위에 대해 일본인들이 충분히 사과했는지에 대해 한ㆍ중ㆍ일 세 나라를 대상으로 조사했다. 이에 대해 한국 국민 98%, 중국 국민 78%가 ‘사과가 불충분했다’라고 응답했다. 반면 응답한 일본인의 48%는 ‘충분히 사과했다’라고 반응했으며 ‘사과가 충분하지 않다’는 대답은 28%에 그쳤다. 이 조사는 과거 일본이 행한 침략 행위와 그 후 대응에 대해서 세 나라가 지닌 생각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발제자는 이와 같은 역사 문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통해 해결해가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안중근 연구자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동양평화론』을 알리고 아시아 평화를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동의 한다. 그러나 카와무라 마사키 씨가 실현 방안으로 제시한 대학, 대학원생들의 학술대회, 시민 단체 등의 교류는 이미 존재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여러 대학과 역사연구소 등에서 매 해 다양한 학술 대회를 개최하여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재조명하고자 하였다. 금번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의 현대적 함의세미나’도 그 중 하나이겠다. 특히 지난 2009년에는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의사숭모회, 안중근ㆍ하얼빈학회와 동북아역사재단, 국사편찬위원회는 등 다양한 단체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그 후에도 외교통상부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와 함께 ‘21세기 동아시아 평화와 안중근’을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비록 이와 같은 학술대회의 대다수는 발제자가 시도하고자 하는 대로 대학생이나 대학원생들이 주최하여 열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참여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여러 학술대회가 이미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일반 개인들의 교류도 마찬가지이다. 시마네 현의 기업인 고마츠 아키오(小松昭夫) 씨는 매년 안중근 의사 심포지엄을 연다. 그는 1994년에 '인간자연과학연구소'라는 한일 과거사 연구 단체를 만들고 2001년부터는 안중근 의사 연구 및 한일 역사관련 심포지엄을 매년 개최해오고 있다. 시마네 현에서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한 다음부터는 심포지엄을 그 날에 맞춰 열어오고 있으며 일본인들에게 안중근 의사와 그의 『동양평화론』을 알리는데 집중한다. 이미 이러한 활동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안중근 의사의 사상을 공유하고 양국 간 사람들의 의견을 나누는 것만으로는 카와무라 마사키 씨가 지적한 일본의 역사 왜곡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소원해 보인다.

그간 안중근의『동양평화론』을 알리려는 다양한 노력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그러나 한일 관계에서는 여전히 그가 그리던 ‘평화’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는 지금까지 행해온 교류에 한계가 있었다는 반증이라고 본다. 그 한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밝히고 그 문제점을 보완할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동안 일본인들의 역사 인식 전환이 이루어지지 못한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냉철한 파악이 선행되어야 지금 일본인들이 지니고 있는 역사 인식을 바꾸고 한일관계를 긍정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대안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