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연구소 지평리 한국전쟁 전투지역 답사
Subtitle
  지평리 미불연합군 전투지역
Date
  2013.3.20
Register Date
  2013-04-15
Count
  3520

   
 
 
 
 
 
 
 
 
 
 
 
지평리 전투

* 자료정리: 사단법인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2013.03.20)
1) 전투 개요
- 날짜 1951년 2월 13일 ~ 2월 16일
- 장소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 결과 UN군 승리
- 교전국: 미국/프랑스 대 중국
- 미8군 2사단 제23연대(연대장:프리만 대령) 및 프랑스 1대대(뭉클라르 중령)와 UN군 측 구성(5,600명)
- 중공군 제42군 125사단 등 (60,000명)이 UN군 포위
- 1951. 2. 13밤부터 중공군의 인해전술 및 백병전 전개(프리만 대령과 뭉클라 중령은 빨간 머리띠 두르고 육박전에 참가), 이때 프리만 대령은 다리에 부상을 당했으나 지휘관이라는 이유로 후송 거부하고 계속 전투지휘 후에 4성장군의 영예, 한편 뭉클라르 중령(프랑스)은 예비역 중장이면서도 대대 규모를 이끌기 위해 스스로 계급을 중령으로 강등하고 참전한 2차세계대전 영웅
-1951. 2. 14 낮 12:50 리지웨이 8군사령관 헬기로 연대 지휘본부 격려 후 기병 1개 연대 및 전차 25대 지원 도착
-1951. 2. 15 밤 중공군 퇴각
-UN군 전사 52명, 부상 259명, 실종 42명
-중공군 전사 5,000여명, 포로 79명

2) 개요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국 2 보병사단 23연대전투단과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중국 인민해방군 39군과 3일간 벌인 격전. 3일 동안 완전히 포위된 미군 연대전투단과 프랑스 대대는 포위 3일째인 2월 16일에 미국 1 기병사단 5 기병연대 3대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크롬베즈 특별임무부대에 의해 구출되었고,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

3) 배경
1950년 10월,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1.4 후퇴와 장진호 전투로 대표되는 참담한 후퇴를 겪어야 했던 유엔군은 평택-원주-삼척 선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1951년 2월부터 반격 개시. 이런 유엔군의 반격 작전에 공산측은 2월 11일에 2월 공세를 개시, 횡성군과 홍천군 사이 삼마치 고개 및 지평리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 중국군은 지평리에 주둔하고 있던 유엔군을 몰아낸 다음 남한강을 도하하여 서울 남쪽으로 진출하려고 계획.

4) 전투 경과
2월 13일 저녁, 중국군 2개 사단이 전방 2개 대대에 8차례에 걸친 파상 공격을 해왔으나, 미군은 이를 모두 격퇴. 이 날 전투 중에 폴 프리먼 23연대장은 부상을 입었으나 후송을 거부하고 계속 전투 지휘. 다음 날 미국은 공중보급으로 지평리의 미국군 및 프랑스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보급했으며 중국군은 유엔군의 공군력 때문에 낮에는 숨어서 대기. 이날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이 직접 헬기편으로 연대를 방문하여 연대원들을 격려.

2월 14일 저녁 7시, 중국군은 4개 사단 규모의 병력으로 다시 일제 공격을 시작했고, 중국군 1개 연대 병력이 방어선을 돌파했고, 진지 내에서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미군 및 프랑스군은 끝내 진지를 사수했고 중국군은 새벽녘에 다시 철수. 이 무렵 후방에서는 미국 1 기병사단 5 기병연대(연대장 크롬베즈 대령)를 주축으로 한 구조대(크롬베즈 특임대) 편성.

5) 크롬베즈 구조대
2월 14일, 크롬베즈 대령의 5기병연대는 어둠이 깔릴 즈음 진격을 개시했으나 부서진 다리때문에 진격이 멈추었고, 배속된 전투공병중대가 급히 교량 복구에 투입.
2월 15일 아침, 크롬베즈 대령은 1대대를 우측 산지로, 2대대는 좌측 산지를 장악하도록 지시하여 두 대대는 중국군과 치열한 교전을 계속.
전투는 오전 내내 계속되었고, 크롬베즈 대령은 연대에 배속된 전차 23대를 진격대열에서 분리하고 L중대 165명과 공병 일부를 전차에 탑승시켜 지평리로 곧장 진격하라고 명령.

6) 결과
지평리 동쪽에서 국군 5 사단 및 8사단을 붕괴시킨 중국군의 4차 공세는 결국 지평리에서 23연대 및 프랑스 대대의 치열한 저항과 후방의 화력 지원, 그리고 중국군 자체의 문제로 인해 결국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퇴각.

* 중국군의 주요 패배 원인
- 화력의 열세
- 5개 사단에서 동원된 6개 연대를 통합한 지휘체계 부재
- 중대급 병력을 축차 투입하면서 병력 우세를 적절히 활용하지 못함

8) 의의
1950년 말의 연이은 패배로 떨어졌던 유엔군의 사기가 다시 고무되었으며,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화력과 견고한 방어진지로 물리친 최초의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