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지평리 지구 전투전적비/몽양 여운형 생가 답사 계획
Subtitle
  연구소 2021년 6.25 프로젝트
Date
  2021.06.08
Register Date
  2021-06-16
Count
  90

   
 
 
 
 
 
 
 
 
 
 
 
 
 
 
 
 
 
 
 
 
 
연구소 지평리 지구 전투전적비 답사 계획

1. 개요
일시: 2021.06.08.
장소: 지평리 지구 전적비
주관: 동인전기공업주식회사
(사)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참가자: 연구소 이사장 정병호 박사 외 6명

2. 일정 계획
09:30 서울 출발
10:10 힐하우스 카페(휴식)
10:40~11:40 기념관 견학
11:40~12:00 지평 막걸리 담사
12:20~13:30 중식(용문 광이원: 031-774-4700)
15:00~15:40 몽양 여운형 기념관 답사 (031-775-5600)
15:50 서울로 귀환(서울 도착 예정: 17:00)

3. 지평리 전투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2사단 제23연대는 1951년 2월초 한강진출 작전
을 진행 중인 미 제9군단과의 연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쌍터널을 정찰
한 후 지평리 일대에 배치되었다. 2월 11일 밤에 시작된 중공군의 공
세에 밀려 전선이 원주까지 내려오자, 미 제10군단의 최북단 돌출부가
되었고, 이어 중공군 제39군 예하 3∼5개 사단에 포위되었다. 그러나
제8군사령관은 공산군이 양평부근의 한강계곡으로 침투하여 유엔군 주
력을 포위할 기도라고 판단하여 지평리 고수를 명령하였다. 동시에 미
제9군단장에게 한강 이남의 교두보에서 적과 교전이 없는 국군 제6사
단과 영 제27여단을 여주지역으로 이동시켜 미 제10군단의 통제하에
공간지역을 보강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때 횡성전투에서 국군을 공격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공산군은
지평리를 공격하면 유엔군이 남쪽으로 철수할 것이며 또한 원주에 집
결한 유엔군도 계속 철수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들은 전과를 확대
하기 위하여 중공군 제39, 40, 42군의 총 8개 연대로써 지평리 지역을
공격하도록 했다. 지평리는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적으로서는 이 지역을 장악하면 유엔군 방어부대들을 양분할 뿐만 아
니라 서부전선의 후방을 위협할 수 있었고, 유엔군으로서는 사통팔달
인 지평리지역을 확보하여 좌우전선과의 연계를 용이할 뿐만 아니라
결국 중공군 2월 공세의 작전기도를 무력화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당시
지평리 일대에 배치된 미 23연대전투단은 제23연대와 프랑스대대로 편
성되어 있었다.

연대는 1951년 2월 13일 낮 동안 포병사격과 항공폭격으로 진지로 접
근하는 적의 공격을 저지하였으나 22:00부터 중공군이 자동화기와 박
격포, 포병으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경적, 호각, 나팔 등을 불
면서 포위망을 압축해 오자 상당히 고전하였다. 진지 전면에서는 피아
를 식별할 수 없는 수류탄전과 육박전이 전개되었으나 수적인 열세에
도 불구하고 포병의 조명지원에 힘입어 적을 격퇴하고 방어진지를 끝
까지 고수하였다. 공산군은 유엔군의 전선 중 돌출된 지평리와 횡성을
공격목표로 선정하고 먼저 4배 이상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지평리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동부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근접항공지원의 엄
호 하에 펼친 축차적인 지연작전과 지평리 고립방어 전투로 막대한 인
명 손실을 입게 되었다.

밤이 되자 백병전은 더욱 치열해져서 곳에 따라서는 수백 명에 이르는
중공군의 시체가 겹겹이 쌓였고 23연대장은 중상을 입고도 후송을 마
다하고 병사들 곁에 머물러 싸움을 독려했다. 이 날 밤 중공군은 마침
내 유엔군 진지의 한 모퉁이를 점령했으나 15일 새벽 날이 새자 유엔
공군의 근접 항공지원 사격을 견디지 못해 물러났다. 이날 지평리 남
쪽의 후방에 있던 미 제1기병사단에서 나온 크롬베즈(Crombez) 특공대
는 지평리로 들어가는 주보급로를 다시 열고 저녁 무렵엔 23연대의 원
진으로 들어가 포위망을 풀었다. 중공군은 공격개시 1주일 만에 공세
작전을 종료하고 북으로 철수하였다. 지평리전투는 미군이 중공군과
싸워서 얻은 최초의 전술적인 성공으로써 이제 새로운 각오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고 확신함으로써 강력한 공격작전
을 구상할 수 있게 되었다.

● 몽양 여운형(1886.5.25 ~ 1947.7.19.)
한국의 독립운동가·정치가. 초당의숙(草堂義塾)을 세우고, 신한청년
당(新韓靑年黨)을 발기하였다.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하여 한
국의 사정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에 이어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본관은 함양(咸
陽), 호는 몽양(夢陽)이다.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양서면(楊西面) 신원리(新院里) 묘곡(妙谷)이라는 곳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조부 여규신(呂圭信)과 종조부 여규덕(呂圭德)은 동학에 가담하
였는데 몽양에게 끼친 영향이 컸다. 하지만 부친 여정현(呂鼎鉉)은 조
부와 달리 조선시대 양반사회의 계급주의를 신봉했으며 몽양은 이러한
부친을 자신의 성장기에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 회고하였다. 몽양은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촌 관계였던 족숙(族叔) 여병현(呂炳鉉)
의 도움으로 서울로 갔으며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서 기독교를
접했고, 흥화학교(興化學校)를 거쳐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전
신(電信)기술을 공부하여 통신원 기술자가 되고자 하였다. 하지만 통
신원이 일본 소유로 넘어가자 취업을 거부하였다. 1906년 부친이 사망
하자 집안의 노비를 모두 불러모아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워 그들을 해
방시켰다.

1907년부터 서울 종로에 있었던 승동교회(勝洞敎會)에서 선교사 보조
원 생활을 했었고 같은해 양평 고향집에 기독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워 향리의 청년들을 계몽하는데 앞장섰다. 1910년 선교보다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강릉에 초당의숙(草堂義塾)을 세워 평등사상과 신
학문을 가르치는데 전념하였다. 하지만 총독부에 의해 학교는 1년만에
폐쇄되고 말았다. 국권이 피탈되고 학교가 폐쇄되자 승동교회로 돌아
와 평양신학교를 다녔다. 또한 그는 스포츠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대한
민국 최초의 야구팀인 YMCA 야구부(황성기독교청년회 베이스 볼 팀)의
주장으로 활약한 것으로 추측되며 1912년 11월 2일 와세다대학의 초청
을 받아 일본까지 원정경기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직접
목격한 신문물과 조선유학생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깨우치고 선교사
클라크를 따라 서간도(西間島: 퉁화)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견학하
였고 이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1914년 겨울 중국으로 건너갔다.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추천장을 받아 장로교 선교회가 운영하는 난징
[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몽양
의 중국 유학은 그의 가치관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1916년 상하이[上海]로 가 협화서국 서점(Shanghai Mission
Bookstore)에 취업 하였으며 선교사, 인성학교 교사, 여행대행업 등을
했다. 1918년 상하이에서 장덕수(張德秀)를 만나면서 여운형은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몽양은 정치와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
작했다. 조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김규식(金奎植)을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고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발기하였다. 이 일은
국내 독립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이 되었
는데, 일본정부는 이를 자치운동(自治運動)으로 회유하고자 그 해 11
월 그를 도쿄[東京]로 초청하였으나 오히려 장덕수(張德秀)를 통역관
으로 삼아 일본의 조야(朝野) 인사들에게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
였다.

1920년 5월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하였는데, 국제
공산당 위원인 보이틴스키(Grigorii Voitinsky)가 조선의 독립을 지원
할 수 있다는 제안에 공산당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볼셰
비키정부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제공한 자금을 이동휘, 김립이 가로채
독단적인 처리하자 고려공산당은 분파되어 와해되고 말았다. 1921년
이르쿠츠크(Irkutsk)에서 열릴예정이었던 원동(遠東)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고비사막을 횡단하고, 바이칼호수를 건너는 고난한 여
행으로 도착하였으나 대회 장소는 모스크바로 변경되었다. 1922년 1월
7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났으며 조선의 사정을
논의하였다. 중국 상하이로 돌아와 쑨원과 중국공산당 인사들과 교류
하면서 1925년부터는 중국혁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하지만
1927년 장개석(蔣介石)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 축출로 몽양이 믿었
던 소련의 지원과 국공합작체계의 정치적 모델이 무너지고 말았다. 낙
담한 그는 체육부 코치로 생활하면서 싱가포르에서 인삼사업을 모색하
다 1929년 7월 10일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는 혐의로 상하이 주재 일
본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국내로 압송되었는데 국내 언론에서는 그의 압
송이 대서특필되었으며 중국에서 실패한 공산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서 허망한 날을 보냈으나 국내에서는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재판 결
과 독립운동을 전개한 죄목으로 4년간 복역하였다. 1933년 출옥하자
그는 민족의 영웅으로 추대되었고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
장에 취임하였는데 경영난으로 어려웠던 신문사는 그의 명성에 힘입어
번창하였다. 하지만 베를린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1936년 신문이 일제에 의하여 폐간되자 사임한 후 1944년 비
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8·15광복을 맞아 안재홍(安在鴻), 정백(鄭栢) 등과 건국준비위원회
(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하였으나 임시정부의 지사들과 대립되었고 건
준위 조직 내부 박헌영이 주도하는 극좌익세력과 정치투쟁 내분에 휩
싸였다.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
정의 인정을 받지 못해 실패하였다. 12월 조선인민당을 창당, 1946년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을
결성하였으나 정책 노선이 명확하지 못해 조직을 장악하지 못했고 반
대파 좌익세력에게 밀려 탈퇴하였다. 또, 1947년 5월 근로인민당을 조
직하였으나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
진하던 중 극우파 한지근(韓智根)에 의하여 1947년 암살되었다. 덴마
크체조를 국내에 보급한 체육인이기도 하였으며, 광복 후 대한체육회
의 전신인 조선체육회 제11대(1946∼1947) 회장을 지냈다. 2005년
3·1절에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된 데 이어 2008년 2월 21
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