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아베의 미일동맹, 100년 전 영일동맹의 복사판
부제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일시
  2017.10.28
작성일
  2017-10-28
조회수
  391

   
 
 
 
 
 
 
 
A History


The Anglo-Japanese Treaty was actually a series of three treaties signed before World War I. Anglo-Japanese naval cooperation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development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 There was extensive cooperation before a formal agreement was signed. Japan first acquired modern naval vessels from British shipyards. Royal Navy officers helped train Japanese officers. With the rise of a modern German Navy, Britain saw Japan as a useful ally in the Pacific. The major rationale for the treaty in 1902, however, was a mutual concern with Russia. Japan saw its relationship with the Royal Navy as helpful in building a modern navy. The first Anglo-Japanese Naval Treaty was signed in 1902. The Russo-Japanese War (1904-05) changed the strategic situation in the Pacific. Britin and Japan rennewed the Treaty, but the terns were substantially different, extending its scope (1905). Britin and Japan renewed the Treaty a third time, again with an expanded scope (1911). This was the Treaty in force at the time of World War I. Japan joined Britain in World War I and in the post-War settlement received several former German island colonies in the Pacific that were to play a role in World War II. The Anglo-Japanse Treaty finally lapsed (1923), primarily because of American concerns at the Washington Naval Conference (1921).


* 기사: 아베의 미·일 동맹, 100년 전 대륙세력 꺾은 영·일 동맹 복사판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2017.10.28

.일본 외교는 영리하다. 영·일 동맹(Anglo-Japanese Alliance) 시절에 그랬다. 그 동맹은 국제정치의 화려한 전설이다. 해양세력의 결속이다. 상대는 대륙세력 러시아. 그 조합은 러·일 전쟁 승리의 발판이었다. 일본 외교는 어리석다. 나치 독일과의 동맹이다. 그것은 일본의 패망(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1902년 영·일 동맹은
신흥국 일본의 국제정치 압승
러시아와의 전쟁 승리 발판 돼
하야시와 고무라의 국익 외교 성취

1941년 일·독·이 삼국동맹은
미·영을 적으로 만든 마쓰오카 오판
2차 세계대전 패망으로 이어져

21세기 아베 외교의 야망은
트럼프와 밀착해 시진핑 ‘중국몽’ 견제
미·일 동맹 결속력, 한·미 동맹 추월해

2017년 한반도의 지정학은 그대로다. 해양과 대륙세력의 결전장이다. 대륙세력은 시진핑의 중국. 해양세력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과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일본이다. 미·일 동맹의 결속력은 단단하다. 한·미 동맹은 추월당했다. 동맹은 섬나라 일본의 본능이다. 나는 역사 현장을 추적했다.

.1902년 1월 30일 영국 런던-. 영·일 동맹이 체결됐다. 세계는 놀랐다. 러시아는 충격에 빠졌다. 최강 영국은 ‘영광스러운 고립’을 포기했다. 신흥국 일본의 외교 승리다. 동맹 드라마의 시작은 청·일 전쟁이다. 일본은 압승했다(1895년). 중국의 영향력이 붕괴했다. 중국은 한반도 종주권을 내놓았다. 그 혁명적인 변화는 사상 처음이다.

.전쟁은 일본 군부와 외교의 합작이다.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의 개전 이유는 정의(情誼)와 자위. “이웃 조선과의 우호와 일본 방위를 위한 것이다.” 위선과 오만이 넘친다. 종전 장소는 시모노세키. 그곳은 유적지다.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무쓰의 흉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무쓰의 비망록(『건건록(蹇蹇錄)』)은 일본 외교력의 원천이다. 드라마는 반전한다. 러시아 주도의 삼국간섭(프랑스+독일)이다. 일본은 전리품 랴오둥 반도를 포기했다. 조선은 러시아로 기울었다. 일본은 잔혹한 야만 행위로 응수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다. 일본은 담판외교로 전환했다. 로바노프-야마가타 비밀 의정서, 니시-로젠 협정, 만한(滿韓)교환론, 한반도 분할론이 등장했다. 러시아는 거부했다.

하야시 다다스(林董)는 영·일 동맹의 주연이다. 1900년 7월 그는 주영 공사로 부임한다. 그의 영어는 16세 때 영국 유학으로 연마됐다. 협상 상대는 영국 외무장관 랜스다운(Lansdowne). 가문의 5대 후작이다. 무대는 랜스다운 하우스. 런던 버클리 광장 근처다(지금은 멤버십 클럽). 나는 그곳을 찾았다. 건물의 외관은 수려하다. 안내인은 “250년쯤 된 건물인데 일부가 재건축됐다”며 “한 세기 전 동맹의 흔적은 랜스다운 초상화가 걸린 방에서 유추할 수 있다”고 했다. ‘크러시 홀’에 초상화가 걸려 있다. 원색의 화풍은 귀족의 체취를 쏟아낸다. 그 속에 치열하면서 노련한 협상 장면이 담긴 듯하다. 나는 건물 역사서를 펼쳤다. “하야시 공사는 이곳을 자주 방문한 교양 있는 신사다. 랜스다운 후작은 그에게 ‘일본인은 예의 바르고, 질서 있고, 믿을 만하다’는 평판을 전했다. 이는 중국에 대한 영국의 인식과 뚜렷이 대비된다.”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러시아의 만주 점령은 중국에서 영국의 이익을, 조선에서 일본의 권익을 위협했다.” 러시아의 야심과 질주는 거셌다.

1901년 4월 본격 협상이 시작됐다. 랜스다운= “영국은 조선에 대하여 아주 미미한 관심밖에 없다. 그러나 영국은 조선이 러시아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하야시=“조선에 대한 중립 유지는 쓸데없다. 조선인들은 자치 능력이 전혀 없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는 조선을 폄하했다. (『하야시 다다스 비밀회고록』(A.M. 풀리, 신복룡·나홍주 번역)

.1901년 11월 이토가 러시아를 방문했다. 하야시는 “이중 플레이는 신용 상실을 초래한다”고 했다. 그 움직임은 영국을 초조하게 했다. 가쓰라 다로(桂太郞) 내각은 혼선을 정리했다. 이토의 친러시아 구상은 폐기됐다. 신복룡(전 건국대 교수) 박사는 “이토의 다음 세대 외교 리더십인 고무라 주타로 외상과 하야시의 국익을 낚아채는 안목과 열정이 외교 쾌거를 이룩했다”고 했다.

영·일 동맹은 노골적이다. “영국의 권익은 중국과 연관돼 있다. 일본은 중국에서의 권익과 더불어 조선에 대해 특별한 이익을 갖는다.” 그 역사책은 단정한다. “조약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서명 장소는 랜스다운 하우스. 그때 런던에 대한제국 공사(민영돈)가 있었다. 그는 정세 변화를 몰랐다. ‘코리아 패싱’은 쇠락하는 나라의 징조였다.

2년 뒤 러·일 전쟁이 터졌다. 동맹의 비밀 각서는 위력을 과시했다. 일본의 해전 승리로 전쟁은 마감했다. 그 무렵 2차 영·일 동맹이 논의됐다. 주역은 랜스다운과 하야시 그대로다. 2차 동맹은 일본의 한반도 독점을 보장했다. 일본은 강대국 반열에 진입했다. 1921년 워싱턴 체제가 형성됐다. 영·일 동맹은 폐기됐다. 21년의 외교 동행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터졌다. 일본 체제는 군부 우위다. 그 풍광 속에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가 등장했다. 그는 제네바 대사 시절 국제연맹 탈퇴를 주도했다. 그의 강단 있는 영어 연설은 강렬했다(그는 미국 오리건대학 출신). 1940년 7월 외상이 된다.

.마쓰오카 외교는 소용돌이다. 두 달 뒤 독일·이탈리아와 3국 추축 동맹을 맺었다. 미국과의 적대 상황은 굳어졌다. 1941년 4월 일·소 중립 조약이 체결됐다. 그는 삼국동맹을 과신했다. 미·영 압박의 방파제로 기대했다. 치명적 오판이었다.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는 “영·미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외교의 대실패다. 독일이 이길 것 같지만 최종 승자는 미·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삼국동맹은 일본을 파멸로 이끌었다. 마쓰오카 외교는 돌출과 파격이다. 그는 신의를 우선하지 않았다. 하야시의 회고는 핵심을 찌른다. “우호적 열강과의 신의 유지가 국제관계에서 가장 중요하다.” 한·미 동맹의 신뢰 기반이 흔들린다. 트럼프 대통령의 11월 방한 반대 시위는 거칠다. 동맹이 취약하면 나라는 얕잡아 보인다.

동북아는 스트롱맨들의 각축장이다. 북한의 핵무장은 긴장 요소다. 시진핑 주석의 ‘중국몽(夢)’은 대담하다. 외교의 꿈은 19세기 말에 꽂혀 있다. 청·일 전쟁 이전 질서로의 복원이다. 아베 총리는 동맹의 역사적 묘미를 안다. 아베는 미·일 동맹을 다듬는다. 그 방식은 영·일 동맹의 복제라는 느낌이다. “일본이 대중국 포위망에 앞장서겠다. 미국은 일본을 지원해 달라”는 것이다. 아베와 트럼프의 밀월은 깊어진다. .

[출처: 중앙일보]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아베의 미·일 동맹, 100년 전 대륙세력 꺾은 영·일 동맹 복사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