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연구소장 베이징 지역 역사기행
부제
  천안문광장, 만리장성, 자금성, 이화원
일시
  2017.10.14
작성일
  2017-09-30
조회수
  426

   
 
 
 
 
 
 
 
 
 
 
 
 
 
 
 
 
 
 
 
연구소장은 2017년 9월 10일부터 9월 13일까지 베이징 역사기행을 다녀 왔다. 베이징에서 천안문관장, 자금성, 이화원 등을 견학하고 돌아왔는데 그곳들의 개요를 아래에 싣는다.

북경 여행 참고

1. 천안문광장
톈안먼 광장(천안문 광장, 중국어 간체: 天安门广场, 정체: 天安門廣場, 병음: Tiān'ānmén Guǎngchǎng)은 베이징의 자금성 톈안먼 앞의 광장이다. 1989년의 톈안먼 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다. 명나라 초기에 창건되어 1651년 개축되었다. 남북으로 880m, 동서로 500m, 넓이 44만m²로, 도시에 있는 광장 중 세계에서 가장 넓다.
게요: 명나라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했던 시기에는 천안문에서 남하해 〈대명문〉(大明門)(청조에서는 〈대청문〉(大淸門), 신해혁명 후에 〈중화문〉(中華門)으로 개명)에 이르는 〈천보랑〉(千歩廊)이라고 하는 큰 길과 현재의 장안로에 존재하는 〈장안좌문〉(長安左門)과 〈장안우문〉(長安右門) 사이를 묶는 T자형의 공간이 존재하여, 천안문 광장의 원형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1954년에 〈천보랑〉의 좌우 관청과 창고를 철거하고, 중화문과 장안 좌우문을 철거해 현재의 〈천안문 광장〉이 형성되어 천안문 광장 건축에 더해 〈인민영웅기념비〉도 건설되었다. 또 1976년에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다음 해에 걸쳐 광장의 남쪽 중화문 유적지 부근에 〈모주석 기념당〉이 건설되었다. 천안문 광장은 최대 100만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국가 행사나 역사상 큰 사건의 무대가 되어 왔다. 그 때문에 몇 번이나 혁명 운동의 무대로도 이용되어 항쟁이 일어났다.

구조: 남북 880m, 동서 500m의 세계 최대의 광장이다. 포석은 화강암이다. 북쪽은 베이징 제일의 큰 길인 장안로가 위치하며, 그 반대 쪽인 자금성(고궁)의 입구에 천안문이 위치한다. 광장 안은 북쪽에서 인민영웅기념비, 모주석 기념당, 정양문(正陽門)(전문, 前門)이 설치되었고, 광장의 서쪽에는 인민대회당(전국인민대표대회 의사당), 동쪽에는 중국국가박물관(구 〈중국역사박물관〉 및 〈중국혁명박물관〉)이 있다. 이것은 태양이 뜨는 방향을 과거, 지는 방향을 미래에 비유한 것이다. 주위 보도의 포석에 섞여 장방형 철판이 깔려 있는 부분이 있어, 아래에 물을 흘릴 수 있도록 배수로 구조로 되어 있다. 대규모 집회에는 철판을 떼어 내고 주위를 천막으로 가려, 임시 화장실로 사용할 수 있다. 광장: 국내 외의 관광객으로 넘치고 있지만, 국가적 상징 시설로 잘 활용되고 있으며, 많은 경비병이 순찰을 하고 있다. 일찍이 두 번의 천안문 사건이 일어난 장소이기 때문에, 중국 정부나 중국 공산당에 비판적인 시위가 재발하지 않게 하고 있다. 광장 북부에는 국기게양대가 있어, 일출과 일몰에 맞추어 매일 국기의장대에 의한 국기의 게양식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된다. 또 야간은 특정일을 제외하고는 출입금지 지역이 된다.

천안문사태: 톈안먼 사건, 제3차 천안문 사태(중국어 간체: 天安门事件, 정체: 天安門事件, 병음: Tiān'ānmén shìjiàn), 또는 6·4 사건(중국어: 六四事件, 병음: liùsì shìjiàn)은 1989년 6월 4일, 후야오방의 사망 이후 발생한 톈안먼 광장 등지에서 시위대와 인민이 벌인 반정부 시위를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공산당 정부가 유혈 진압한 사건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1989년 춘하계 정치풍파(1989年春夏之交的政治風波)라 지칭하는 반면, 비판적인 반체제 세력 및 서방세계에서는 톈안먼 광장 저항시위(天安門廣場抗議, Tiananmen Square protests) 또는 톈안먼 광장 도살(중국어 간체: 天安门广场屠杀, 정체: 天安門廣場屠殺, 병음: Tiān'ānmén Guǎngchǎng túshā, Tiananmen Square Massacre), 89년 민주운동(중국어 간체: 八九民运, 정체: 八九民運, 병음: bājiǔ mínyùn)이라고 칭한다. 중국의 검색엔진에서 톈안먼 사건을 검색하면 접속이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에, 5월 35일(5월 31일+4일), VIIV(로마숫자 64), 82(8의 2승, 답이 64=6월 4일) 등을 은어로써 사용하기도 한다.
애초 공식 발표로는 민간인 사망자 300여 명, 부상자 7천여 명이 발생한 사건이다. 국제적십자협회는 2,600 여명으로 사망자를 발표했다. 비공식 집계로는 5천여 명 사망, 3만여 명 부상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 후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가 1990년 7월 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정식 발표한 것을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4,550명이었으며, 군인과 전경은 56명이 사망, 7,525명이 부상당했다.

배경-시위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40주년, 5·4운동 70주년, 후야오방 전 중공 총서기 사망, 대륙 경제 통화팽창, 대륙 공산당 관리들의 부패, 대륙의 대량 인민 실업 직면, 소련의 정치와 경제 개혁이 주요한 배경이다. 4월 15일에 개시된 학생 시위대의 항의 운동 이후, 6월 3일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톈안먼 일대에서 대륙 군대, 전경과 시위대가 충돌한 뒤 유혈 사태가 빚어졌다. 항의 충돌은 사태 전에도 있었고, 뒤로도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 내 자신의 지지세력인 청렴파 후야오방과 유교반대파 자오쯔양을 자신의 후계자로 보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후원하였다. 하지만 후야오방은 1987년 1월 베이징에서 학생 시위대 수천명이 공안(경찰)과 충돌한 일을 계기로 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났고, 자오쯔양이 후임 당 총서기가 됐다. 이런 후야오방이 4월 중난하이에서 소집된 중앙 정치국 회의에 참석했다가 갑자기 심장병 발작으로 쓰러져 4월 15일 세상을 떠나자,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해임됐던 청렴파 후야오방에 대한 평가를 공정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4월 17일부터 학생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시위를 계속하였으며, 참가자 수는 계속 늘어났다. 4월 22일 장례식을 계기로 시안 등지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중국 당국은 5월 20일 부분적으로 계엄령을 내렸고, 6월 3일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톈안먼 일대에서 대륙 군대, 전경과 시위대가 충돌한 뒤 유혈 사태가 빚어졌다. 반특권, 반부패 시위 확대가 후야오방의 사망이 발단이라고 하지만, 과거의 공산주의 경제 체제에 급변이 진행되고 민족 분규가 잦아지는 등의 난국에서 과감한 경제 개혁으로 개방의 폭을 넓혀온 중국 실용주의파는 계획가격에 시장가격제를 급작스레 도입하고 국영근로자의 양로복지를 감축해 철밥통을 깨는 쌍궤제(雙軌制)라는 정책을 실시했으나 하위 간부들이 고통을 분담하기 보다 부패를 행해 인민의 항의 시위가 조장됐으며, 인민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개혁개방 실시 뒤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격화하자 인민들이 개혁개방 경제책을 내놓은 공산당을 비판하기 시작했으며, 경제 개방을 위해 설치했던 특구가 조계지로 비판받기도 했다. 물가 상승과 분배의 불평등, 사회적 불평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고, 많은 하강 노동자와 학생들이 단위 체제와 산업 수요가 변화해 실업상태에 직면하였다. 항의 소요가 학생, 하강 근로자들, 농민공 뿐 아니라, 문화 대혁명 관련자들, 석방된 정치범들, 사회 불만세력들이 섞이며 후반에 들수록 격화하기도 했으며, 정부에 위협이 커지고 시위 사태의 수위가 높아지자 진압 결정이 내려졌다.

영향: 사건 이후 중국의 혼란을 지지한 서양 세계와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중국 내 덩샤오핑의 정치적 입지가 축소되었다. 보수파의 압력으로 덩샤오핑은 권좌에서 물러났으며 개혁, 개방 정책들이 하나 둘씩 뒤집혔다. 시위를 확대시킨 책임으로 자오쯔양 총서기가 중국 정치 무대에서 떨어져 나가며 연금에 처해졌고, 대륙의 시장경제 체제로의 개혁이 지체되었다. 1991년, 장칭이 연금 상태에서 자살하면서 덩샤오핑은 '우(右)도 경계해야하지만 주로는 더욱 좌(左)를 경계해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발표하고 베이징을 떠나 군과의 유대 관계를 공고히 한 뒤, 이듬해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해 개혁, 개방의 확대에 나서자고 했다. 자오쯔양 후임에 장쩌민이 승계하였으며, 2~3년 간 근신의 길을 걸었다. 관료파 리펑은 사태 뒤 총리를 계속 맡았다. 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주의 영도를 수정하고 시장 개방을 확대하며 학생운동을 차단하는 한편 덩샤오핑 체제의 공산당 영도에는 변화를 꾀하지 않고 있다.

현재: 2005년 11월 18일 ‘후야오방 기념대회’를 시점으로, 후진타오 주석이 과학적 사회주의와 청렴를 숭상했던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복권을 조심스레 추진했으나, 덩샤오핑 노선과의 마찰로 하지 못했으며, 여전히 중국에서 톈안먼 사태를 언급하는 것은 위험한 일로 되어 있다. 지금도 매년 6월 4일을 전후하여 천안문 광장에는 대륙 공안이 대규모로 배치되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검색엔진 중국어 구글에서도 중국 정부의 요청으로 천안문사태에 대해 정보검색을 하지 못하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2. 자금성
자금성(중국어: 紫禁城, 병음: Zǐjìnchéng 쯔진청[*])은 베이징의 중심에 있는 명과 청 왕조의 궁궐이다. 자금성의 규모는 궁궐로는 세계 최대의 규모이다. 현재는 황실이 사라져서 중국어권에서는 주로 고궁(중국어 간체: 故宫, 정체: 故宮, 병음: Gùgōng 구공[*])으로 불리고 있으며, 1925년 10월 고궁 박물원(중국어 간체: 故宫博物院, 정체: 故宮博物院, 병음: Gùgōng Bówùyùan)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1] 동서로 760m, 남북으로 960m, 72만 m²의 넓이에 높이 11m, 사방 4km의 담과 800채의 건물과 일명 9999개의 방(실제로는 8886칸이라고 한다.)이 배치되어 있다.[2] 1961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87년 "명·청 시대의 궁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곳의 중문인 오문의 가운데 문은 황제만 사용했으며 현재도 일반인의 출입을 엄금한다.

자금성의 정문을 천안문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으나, 자금성의 정문은 오문(午門)이며, 천안문은 황성 내성의 남문이다. 자금성의 주위에는 해자와 성벽들로 둘러싸여 있다. 해자의 너비는 52m이며 깊이는 6m에 이른다. 해자에는 동서남북으로 해자를 가로지르는 4개의 다리가 있다. 궁궐 주위의 장벽의 길이는 4km에 이르며 높이는 10m나 되며 4개의 큰 출입구가 뚫려 있다. 자금성은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크고 보존이 잘된 고건축물이며, 자금성 안에는 오직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황제의 상징인 용 문양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1406년 명나라 영락제가 베이징으로 천도하면서 건설한 황궁으로, 명~청 시대 24명의 황제가 살았던 궁전이다. 1961년에는 중국 정부로부터 제1차 전국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88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자금성 건축물과 고대 예술품 및 궁정역사 유적 위주의 내용물을 주로 전시하는 대형 종합 박물관이기도 하다. 자금성은 명대부터 청대까지(1420~1912) 중국 황실의 궁궐이었다.

중국 베이징의 중심에 자리해 있고, 지금은 궁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거의 500년 동안 의례적이면서 정치적으로 중국 정부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와 그 식솔들의 집이기도 하였다. 1406년부터 1420년까지 지어졌고, 전체엔 980여 채의 빌딩이 있으며 72 핵타르에 이르는 넓이를 갖고 있다.(180 에이커-약 4,050평방미터에 해당하는 크기의 땅-를 넘는다.) 이 궁궐은 전통적인 중국의 호화로운 건축의 예라 할 수 있고, 동아시아와 다른 곳의 문화 및 건축적인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자금성은 1987년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고, 가장 크게 보존된 고대 목재 건축물로 유네스코에 기록되었다. 1925년 이래로 자금성은 고궁박물관에 속해있는데, 고궁박물관의 광범위한 예술품들의 수집품은 명-청 시대의 황제의 수집품 위에 지어졌다. 예전 박물관 수집품의 일부는 대만의 국립 고궁 박물관에 있다. 두 박물관은 같은 기관이었지만, 중국의 국공 내전 이후 분리되었다. 연간 1460만 명이 넘는 관광객 덕분에, 고궁 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방문하는 미술관이다.

이름 자금성이란 이름은 1576년 처음 공식적으로 나왔다. 자금성이란 이름은 상당한 의미를 지녔다. 자금성의 자紫(보라색, 자주색)는 북극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고대 중국이 능소화의 별이라고 불렸으며, 전통적인 중국의 점성술이 하늘의 황제의 집이었다.> 천체지역 주변, 능소화 담벼락이 천체의 황제와 그의 가족의 영역이었다. 지구 상의 황제의 거주지로서 자금성은 세속적인 상대였다. 금禁 또는 ‘금지된’ 이란 말은 황제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궁을 들어오거나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성城은 도시를 의미한다. 오늘날, 자금성은 중국에서 고궁이라고 가장 흔히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예전의 궁궐’을 의미한다. 이런 건물들로 구성된 박물관이 고궁박물관이다. (古宮博物館)

역사 홍무제(1328년~1398년)의 아들 주 디가 영락제(1403〜1424년)로 즉위하고 나서, 그는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겼고, 1406년 자금성 건축을 시작했다. 14년이 걸린 이 공사엔 100만명 이상의 일꾼을 필요로 했다. 사용된 재료에는 중국 남서부에서 발견되는 고급의 녹나무 목재와 베이징 근처에서 채취되는 큰 대리석 등을 포함한다. 정전의 바닥은 특별히 쑤저우에서 구운 “금 벽돌”(金砖, 벽돌모양의 금괴)로 포장되었다. 1420년부터 1644년 동안 자금성은 명 왕조의 중심지였다. 1644년 4월에 순 왕조의 황제라고 자칭한 이자성의 반란으로 자금성은 함락되었다. 그는 자금성의 일부분을 불 지르며 명의 장군 오삼계와 만주 군이 합쳐진 군대가 도달하기 전에 피했다. 10월까지, 만주군은 중국의 북쪽에서 패권을 주도했고, 의례는 어린 세조 황제가 중국이 청 왕조의 지배하에 있다고 선언하기 위해 자금성에서 거행됐다.

청의 지배자들은 몇몇 주요한 건물의 이름을 바꾸었는데, “패권”보다는 “조화”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으며, 이는 이름에 두 개의 언어가 섞여있게 만들었다.(중국어와 만주어) 또한 궁궐에 샤머니즘적 요소를 소개했다. 1860년에, 2차 아편전쟁 동안,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는 자금성을 차지했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점령했다. 1900년에 서태후는 다음 년도까지 자금성이 군대에 의해 점령되도록 내버려둔 채 의화단 사건 동안 자금성을 도망쳤다. 24명의 황제의 거처가 되고 나서-14명의 명 황제와 10명의 청 황제-자금성은 1912년에 푸이(청 왕조의 마지막 황제)의 퇴위로 중국의 정치적 중심에 종지부를 찍었다. 새로운 중국 정부의 동의로, 외전은 공용으로 넘겨진 반면, 내전엔 1924년에 쿠데타로 쫓겨나기 전 까지 푸이가 지냈다. 궁궐 박물관은 그 후 1925년에 자금성 안에 지어졌다.

1933년에, 청일 전쟁은 자금성 안에 국보를 방출하게 만들었다. 수집품의 절반은 2차 세계 대전 말에 반환되었지만, 나머지는 장제스의 국민당이 중국 내전에서 지고난 후인 1948년에 그에 의해 타이완으로 방출되었다. 이 상대적으로 작지만 굉장히 높은 수준의 수집품들은 1965년까지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고, 그것은 타이페이의 국립 궁궐 박물관의 핵심으로 전시 되면서 다시 대중에 공개되었다. 1949년에 중국 인민 공화국의 수립 이후에, 나라가 혁명의 열기로 휩쓸리면서 자금성에는 몇몇 손상이 있었다. 문화 혁명 동안엔, 그러나 더 큰 파괴는 총리 저우언라이가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대군을 보내면서 예방되었다. 자금성은 중국의 건축과 문화의 발달과정에서 상징적인 궁궐이기 때문에 1987년에 “명과 청 황제의 궁궐”로서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것은 현재 궁궐 박물관이 관리하고 있고, 모든 건물을 1912년 이전 상태로 수리하고 복원하기 위해 16년간의 재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최근에는, 자금성에 상업 기업의 존재가 논란이 되고 있다. 2000년에 오픈한 스타벅스는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2007년 7월 13일에 문 닫았다. 중국의 언론은 또한 2006년에 외국 방문자에게 가격을 속이기 위해 중국 시민들의 입장은 거부하는 몇몇 기념품 숍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3. 만리장성
지구상에서 가장 큰 인공 구조물은 무엇일까? 기준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지겠지만 흔히들 꼽는 것이 중국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다. 만리장성의 규모와 관련해 전해지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달에서도 보이는 지구상의 유일한 구조물이 바로 만리장성이라는 것이다. 만리장성을 우주 공간에서 맨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긴 머리카락도 몇 미터만 떨어지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만리장성이 아무리 길다 해도 인간이 볼 수 있는 한계범위에 들어올 만큼 폭이 넓지 않으면 우주 공간이 아니라 지구 상공의 높은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만리장성의 최대 폭은 7미터인데 이를 볼 수 있는 한계범위는 대략 지상 23.3킬로미터까지이다. 23.3킬로미터 이상 위로 올라가면 만리장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지상 23.3킬로미터는 지구의 성층권이지 우주 공간이 아니다. 그리고 만리장성을 볼 수
있는 높이에선 고속도로 · 운하 · 철도 같은 다른 인공구조물도 볼 수 있다. 2003년 10월 발사된 중국 최초의 유인우주선 ‘선저우(神舟) 5호’를 타고 지구궤도를 선회하면서 양리웨이(楊利偉)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리장성은 보이지 않는다.” 양리웨이가 우주에서 만리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수십 개의 가지를 뻗치고 있는 만리장성이 인류 역사상 가장 긴 구조물이라는 사실이다. 현재까지도 그 길이를 정확하게 측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상당 부분이 멸실되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지금 남아 있는 2414킬로미터의 두 배에서 두 배 반 정도, 즉 지구 둘레의 8분의 1에서 7분의 1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 수학자의 계산에 따
만리장성에 사용된 돌로 피라미드를 쌓으면 30개나 만들 수 있다고 한다.
현재의 만리장성은 명나라 때 세워진 것으로, 보하이만(渤海灣)에 접해 있는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출발하여 서쪽을 향하고 베이징(北京)과 다퉁(大同)을 거친 다음 남쪽으로 흐르는 황허(黃河)를 넘는다.(최근 중국은 연개소문이 축조한 천리장성의 동쪽 끝인 박작성[泊灼城, 현 이름은 호산장성(虎山長城)]을 기점으로 삼기도 한다) 계속해서 산시성(陝西省)과 오르도스(Ordos, 현재의 내몽고자치구)의 경계를 따라 남서를 향해 달리다가 다시 황허를 넘는다. 그리고 실크로드의 북서쪽으로 연결되어 자위관(嘉峪關)에 이른다. ‘성(城)’은 ‘흙(土)으로 이룬다(成)’는 글자의 조합처럼 원래 흙벽을 의미하고, 장성은 ‘길게 흙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때 ‘성’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돌 등으로 쌓은 ‘성’과는 다르다. 흙으로 만든 성벽은 오래 견디지 못한다. 비가 오면 흙이 흘러내리기 십상이고 겨울의 혹독한 추위는 흙벽을 벗겨낸다. 부단히 보수하지 않으면 서서히 붕괴하여 장성이 어디에 있었는지 모를 지경이 된다.

장성은 본래 사람 키 정도의 참호를 파고 그것을 수비하기 위해 쌓아올리는 정도에 불과했다. 말(馬)을 방어하면 충분하기 때문에 현재와 같이 요소요소에 있는 봉황대는 후대에 세운 것이다. 장성을 쌓는 기술도 발전했는데 판축(版築)이라 하여 양쪽에 판(版)을 세우고 그 사이에 흙을 넣어 굳히고 그 작업을 차례로 반복하여 흙벽을 구축했다. 물론 지역에 따라 재료가 달랐는데 어떤 부분은 사용된 회반죽이 너무 단단해 못이 박히지 않는 곳도 있었다. 또한 석재가 많은 곳은 돌과 혼용하거나 석벽으로만 쌓기도 했다. 만리장성하면 진시황제가 떠오르지만 진시황제가 처음으로 만리장성을 건설한 건 아니다. 처음에 장성은 춘추전국시대에 현재의 산둥지방에서 일어난 제(薺)나라가 중원에 있는 각 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 후 화베이(華北)에 세력을 가진 연(燕)나라와 초(楚)나라 등 여러 나라가 북방 이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계속해서 장성을 건설했다.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후 북방 유목민족 흉노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이미 건설되었던 각국의 성벽을 보강하고 연결했던 것이다.

흉노는 날카로운 무기로 무장한 기마부대로 중국을 위협했고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했을 무렵에는 황허 이남의 오르도스 일대를 점령할 정도였다. 기원전 215년 진시황제는 장군 몽염(蒙恬)에게 원정을 명하여 잃어버린 땅을 회복한 후 기존에 건설되어 있던 장성들을 연결하도록 했다. 당시는 망국의 한을 풀고자 하는 사람들이 호시탐탐 진시황제에게 반기를 들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선 외적 불안요소인 흉노의 침입을 막는 사전 대비책으로 만리장성을 구축하는 것이 참으로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진시황제는 기존의 장성을 보수하고 장성이 없는 지역에는 새로이 성벽을 쌓으면서 10년에 걸쳐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만리장성
건설은 흉노가 쳐들어오지 않으면 진나라도 공격하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진시황제가 보인 평화 정책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 후 한나라가 역시
흉노를 막기 위해 장성을 연장했고 명나라 때에는 몽골의 침입에 대비해 장성을 확장 · 강화했다.

장성을 쌓는 건 돈도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쉽게 작업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 장성의 유적을 보면 버드나무와 갈대를 단단히 묶은 것과 점토를 교대로 사용해 장성을 축조한 곳이 있지만 어떤 지점에서는 3킬로미터 높이의 산꼭대기까지 2톤이 넘는 화강암 석재를 운반해 장성을 쌓아야 했다. 기중기도 없던 시대에 그냥 오르기도 힘겨운 그 꼭대기까지 무게가 2톤가량 되는 화강암 석재를 어떻게 운반할 수 있었는지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장성 쌓기가 가장 어려웠던 지역 가운데 하나는 산하이관 부근이다. 이곳에선 짧은 거리이지만 바다를 건너 장성을 연결해야 했다. 그래서 거대한 바윗돌들을 실은 배들을 바다 속에 가라앉혀 그 위에 장성을 쌓았다. 당시의 공사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중국 4대 민간 전설 중의 하나인 ‘맹강녀(孟姜女)’ 전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진시황제 때 맹강녀의 남편 범희양이 축성(築城) 노역에 징용되었다. 오랫동안 편지 한 장 없던 어느 날 맹강녀의 꿈에 남편이 만리장성에서 일하다 죽는 모습이 나타났다. 맹강녀는 급히 남편에게 겨울옷을 입히려고 몇 달에 걸쳐 만리장성 건설 현장에 도착했으나 남편은 이미 죽었고 시신마저 찾을 길 없었다. 당시 축성 노역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이 죽으면 시신은 성채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맹강녀가 성벽 앞에 옷을 바치고 며칠을 엎드려 대성통곡하자 성채가 무너지더니 남편 시신이 나왔다. 맹강녀는 시신을 거두어 묻고 나서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산하이관 인근에는 맹강녀묘(孟姜女墓) · 맹강사당(孟姜祠堂) · 맹강녀원(孟姜女苑)이 있다. 맹강녀원 내에는 ‘지아비를 위해 천리 길을 울며 장성에 도착하였다’는 전설을 위주로 하여 ‘밤새 겨울옷을 만들고’, ‘만 여 장정의 장성축조’, ‘망부석’ 등 20개의 장면이 그려져 있다.

만리장성은 장소에 따라 벽의 높이가 3미터에서 8미터까지 다양한데 일반적으로 하단부의 너비는 7미터, 정상으로 올라가면 그 너비가 4~6미터로 줄어든다. 요철형의 흉곽 길이는 안으로 1미터, 밖으로 2미터이다. 서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에 12미터 정도의 탑을 세웠는데 이곳은 무기고나 초병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건설상의 난관이 있더라도 만리장성을 구축하는 일은 방대한 군대를 유지하는 것에 비하면 수월한 일이었다. 그래서 통일 전쟁에 동원했던 방대한 군대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대규모 성벽을 건설하여 전쟁에 동원되었던 군사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고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만리장성은 별로 효율적이지 않았다.

한편 중세 유럽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고 네모나거나 원반 모양으로 생겼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중심은 예루살렘이고 그 서쪽에 서유럽이 있으며 반대편에는 기이하고 환상적인 다른 세상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 유럽인들에게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는 페르시아 넘어 동쪽에 찬란한 문명이 있음을 알렸다. 그가 유럽인으로서 세계 최대의 문명국인 중국(원나라)을 다녀간 최초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가 쓴 《동방견문록》은 서유럽 사람들에게 꿈과 환상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학자들은,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가 다른 여행가들에게서 흔히 듣던 풍설을 정리한 것일 뿐 그는 단 한 번도 중국을 방문하지 않았다고 의심한다. 마르코 폴로가 임종하기 직전에 그의 친구들은 그가 쓴 아시아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들이 진실이 아닌 상상의 산물이라고 고백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의 반밖에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한다. 많은 학자들이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전혀 방문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그가 중국을 방문했다면 반드시 보았을 몇 가지 중요 사항, 즉 차 · 젓가락의 사용 · 전족 등 중국의 대표적인 풍물과 풍습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만리장성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점은 그런 의심을 더욱 증폭시킨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으로 가는 길에 여러 번 지나쳐야 하는 만리장성을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까? 《동방견문록》을 철저하게 연구한 헨리 율(Henry Yule, 1820~1889)도 여행 일정으로 보아 마르코 폴로가 몇 번이고 넘었을 만리장성에 대해 설명이 없다는 점에 의문을 표시했다. 물론 현재 잘 알려져 있는 만리장성, 즉 벽돌과 돌로 쌓아올린 장벽과 흉벽으로 이루어진 만리장성은 몽골제국 멸망 후 명나라 때 지어진 것으로 마르코 폴로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들 지역에는 한나라 때 쌓은 만리장성들이 존재한다. 원래 높이는 10미터가량 됐지만 현재는 3미터 정도의 높이로 남아 있다. 마르코 폴로가 방문했을 때는 이미 이 장성들이 허물어져 방치되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중국을 대표하는 만리장성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것은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방문했다는 것을 의심케 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4. 이화원
이허위안(I-ho Yuan)
고전적인 조경 풍치림으로 베이징 시[北京市] 서쪽 교외에 있다. 1153년(金貞元 1) 완안량이 행궁을 설치한 것이 시초이다. 원대에는 옹산과 옹산박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완서우 산[萬壽山]과 쿤밍 호[昆明湖]이다. 명대에는 이곳에 호산원을 조성했으며, 청대인 1764년(건륭 15)에 개축하여 청의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1888년 서태후가 군비를 유용해 다시 개수하고 이허위안이란 이름을 붙였다. 1924년 공원으로 바뀐 이후 해마다 약 4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들고 있다. 총면적은 290㏊이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동북부는 궁전구역으로 런서우뎬[仁壽殿]이나 러서우탕[樂壽堂]과 같은 웅장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있다. 풍치구역은 궁전구역 서쪽에 있다. 이름난 경관으로는 전통적인 채색화가 그려져 있는 창랑[長廊:길이 728m] 회랑, 쿤밍 호를 가로지르는 스치쿵차오[十七孔橋] 다리, 그리고 푸른 호수 안에 떠 있는 듯한, 한백옥을 쪼아 만든 돌배 등이 있다. 또한 완서우 산 앞에 우뚝 솟은 매우 화려하게 지어진 포샹거[佛香閣]와 양쯔 강[揚子江] 남부 조경 풍치림의 특성을 풍부하게 살린 셰취위안[諧趣園] 등도 유명하다.
이화원(중국어 정체: 頤和園, 간체: 颐和园, 병음: Yíhéyuán 이허위안[*])은 북경 서북부의 하이뎬 구에 위치한 정원 공원이자 궁전이다. 주로 60m 높이의 만수산과 쿤밍호에 많은 공을 들여서 공사를 하였다. 이화원의 면적은 2.9평방킬로미터이고 이중에 3/4이 호수로 구성되어 있다. 쿤밍호는 2.2평방킬로미터를 차지하며, 사람을 동원해서 바닥을 파낸 완전 수작업 호수이다. 파낸 흙은 만수산을 쌓는 데 사용되었다. 7만 평방 미터의 공간에 궁과 정원 그리고 고전적인 건축을 살려낸 것이 특징이다. 이화원으로 바뀌기 이전의 이름은 청의원(淸漪園)이다. 이허위안의 모든 경관 배치에 중국 조경 풍치림 예술의 큰 성과가 집약되어 있다. 이밖에 시산 산[西山]과 위취안 산[玉泉山]은 경관에 웅장함을 더하고 있다. 이허위안은 중국 조경 풍치림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하다.
1750년 건륭제 재위 15년에 공사를 개시하였다. 솜씨좋은 장인들은 정원양식의 다양한 궁궐을 창조해 내었다. 쿤밍호는 기존의 작은 연못을 확장하여 항저우의 서호를 모방하여 만들어졌다.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으로 영프연합군의 공격에 의해 수난을 당했고, 모조리 약탈 당했다. 1900년에도 의화단의 운동 때도 8개국의 서양 열강에 의해 공격당하였다. 다행히도 완파되지는 않아서, 1886년과 1902에 서태후에 의해 재건되었다. 1888년 현재의 이화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서태후는 이곳을 여름 피서지로 사용하였다. 서태후는 이곳을 재건하기 위해, 해군 예산 30만은을 유용하여, 재건과 확장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1998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유네스코는 중국의 조경과 정원예술의 창조적인 예술을 빼어나게 표현하였다고 선언하였다.
1153년 금나라 완안량 황제가 행궁을 설치한 것이 시초가 됨
원나라 때 완서우 산과 쿤밍 호를 만듦
1764년 청나라 건륭제가 개축하여 청의원(淸漪園)이라는 이름을 붙임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 당시에 프랑스-영국 연합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불태워짐
1888년 청나라 서태후가 해군 예산 30만은을 유용하여 재건하고 이화원이라는 이름을 붙임
1900년 의화단 운동 당시에 일본과 서양 8개국 연합군에 의해 공격당함
1902년 서태후가 다시 파괴된 부분을 재건함

5. 베이징
그렇게 오랫동안 중국처럼 거대한 나라의 정치·문화 중심지로서의 위치를 고수해온 도시는 세계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베이징은 과거 8세기 이상을 중국 역사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왔다. 따라서 베이징에 대한 지식 없이 중국을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2,000년 훨씬 이전에 지금의 베이징 부근은 이미 중국 동북부 국경지대의 중요한 군사·교역 중심지였다. 원대(元代:1271~1368)인 1267년 이곳에 대도라는
이름의 신도시가 건설되어 행정수도가 되었다. 명(明:1368~1644)의 제1·2대 황제 재위기간에는 난징[南京]을 수도로 삼았으며, 전대의 수도였던 대도는 베이핑[北平]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명의 제3대 황제는 베이핑을 다시 수도로 삼고 베이징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그후 베이징은 국민정부가 난징을 다시 수도로 삼았던 짧은 기간(1928~49,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충칭[重慶]으로 천도)을 빼고는 계속 수도로서의 지위를 지켜왔다. 베이징(북경, 중국어: 北京, 병음: Běijīng 듣기 (도움말·정보))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이다. 허베이 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동쪽으로는 톈진 시와 경계를 접한다. 행정구역 면적은 16,412km²로 매우 넓고, 인구는 약 2150만 명이다.